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92화 (92/179)
  • #92

    오웬은 충격 속에서 소리쳤다.

    “번쩍번쩍이라니!”

    날뛰는 그를 보며, 세이나는 자신이 불러온 눈덩이가 점점 더 불어난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엘렌은 좀 특이한 머리칼은 전부 변태로 인식하게 된 모양이다.

    “번쩍번쩍이라뇨! 그런 말을 하다니! 그 여자 대체 뭡니까?!”

    그리고 오웬은 미친 청각의 소유자였다. 엘렌이 그렇게 외쳤을 땐 이미 멀어진 후였는데, 잘도 그 소리를 주워들었다.

    오웬은 씩씩대며 세이나의 집으로 돌아왔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좋은 첫 만남.

    망했구나.

    “사람의 외모를 두고 그렇게……. 크흠! 표현하는 게 아니지.”

    “각하께서부터 입을 가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큼, 미안하군.”

    오웬이 뱉은 고함이 어찌나 큰지, 서재에서 일하고 있던 라샤드도 나와 버렸다. 오웬은 그를 붙잡고 엘렌이 한 말을 되풀이했다. 번쩍번쩍!

    ‘이러면 디온은 더 어려워지겠는걸.’

    그쪽의 머리 색도 보통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마무리가 어색했던 두 사람이다.

    고백과 거절. 만약 엘렌이 디온이 울고 있는 모습을 목격이라도 했더라면, 그들의 만남은 양쪽 모두에게도 달갑지 않아질 것이다.

    그래서 가장 뒤로 미루어 두기도 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할 생각도 없었고. 그리고 이렇듯 사라진 것을 보니 원하지 않는 쪽이 맞는 듯했다.

    보통 머리 색이 아닌 그 남자는 지금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나친 기대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시끌벅적한 식사 시간이 마음에 들었던 순간이.

    할아버지마저 떠난 이후로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또, 지금 다시 혼자 식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답을 하기 어려웠다.

    대충 챙겼던 매 끼니는 이제 ‘다음’을 생각할 만큼 의미가 있었고. 적당히 구색 맞추듯 있던 식기들은 거의 모두 식탁 위로 올랐다.

    세이나에게는 이제 세 가지 요리책이 있었다.

    하나는 있던 것이었고, 하나는 라샤드가 가져온 것, 또 하나는 디온이 소설책인 줄 알고 사 온 것이다.

    그래서 엘렌도 함께였으면 했다.

    그 시간은, 어쩌면 엘렌 덕분일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공작님이랑은 조금 괜찮아졌으니,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생각해야겠지.’

    “물론 밤중에도 좀 빛나긴 합니다만.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막 환하진 않아요! 세이나도 봤잖아요, 네!?”

    “아, 예 그렇죠. 예쁜 색이에요.”

    “그럼요. 내가 인기가 얼마나 좋은데.”

    오웬이 새로운 투덜거림을 꺼낼 무렵, 라샤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게 끄덕이는 눈짓의 의미를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고생해.

    ‘아, 예.’

    요즘 일이 많다 했던가.

    그럼 공작저에 있는 게 더 나을 텐데. 오늘도 굳이 여기까지 왔다.

    다, 엘렌을 향한 지극한 걱정 때문이겠지.

    세이나는 턱을 괴고 초조하게 앞을 오가는 오웬을 지켜보았다.

    분이 다 풀릴 때까지 저 투덜거림을 다 들어줘야 하나 싶었다. 뭐, 자신이 굴리기 시작한 눈덩이라 할 말은 없었다.

    “오웬, 엘렌을 봤을 때 뭔가…… 뭔가 느껴지지 않았나요?”

    “뭘?”

    “엘렌, 예쁘잖아요!”

    “그게 왜?”

    원작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남주와 여주가 만났을 때 첫눈에 스파크가 튀는 극적인 전개는 이 소설에는 해당하지 않는 듯했다.

    “다음엔 가지 않을 겁니다. 번쩍번쩍이라니. 내가 얼마나 여린 사람인데.”

    그리고 이로써 여주인공과 담을 쌓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세이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 미안해요. 오웬. 아마 저 때문인 것 같아요.”

    오늘은 이야기를 길게 하는 날인가 보군.

    그녀는 엘렌에게 그러했듯, 차근차근 ‘번쩍번쩍’에 엮인 일화를 설명했다.

    잔뜩 뾰로통해 있던 오웬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흥미롭다는 얼굴이 되었다. 자신이 나타나기 전의 일을 이렇듯 자세하게 들은 게 처음이라 더욱 그랬다.

    세이나는 간략하게 요점만 간추려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요즘 점점 말솜씨가 느는 것 같은데.

    “그러네요. 세이나 때문이군요.”

    그녀의 생각에 동의라도 하듯, 오웬은 빠른 이해력을 보였다.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윽. 뭐야 저 눈빛.

    “……뭘 원해요?”

    그제야 그가 끼익, 맞은편의 의자를 빼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말해도 좋은 착석은 아니었는데, 한쪽 무릎만 의자에 기대고 양손을 식탁 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점점 앞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접근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세이나였다.

    그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앞으로 말을 편하게 하면 용서해 주겠습니다.”

    “그래요. 난 상관없어.”

    딱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끄덕여 보이자 그의 한쪽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장난기가 다분한 표정이었다.

    “날 존경한다는 게 정말이야?”

    아니다. 어려운 거였군.

    말을 낮추자고 하자마자 오웬은 얄밉게 그녀를 놀리려 들었다.

    존경. 그 순간을 떠올린 세이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 이상은 부담스러우니까 다가오지 말아 줄래요.”

    “왜? 편하게 말하자면서.”

    “아닙니다. 하늘 같은 헌터 선배께 그러면 안 되죠. 제가 무례했습니다. 죄송.”

    “선배라니. 그런 것도 있…….”

    그때였다.

    탁!

    돌연 오웬의 정수리 위로 책이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오웬은 물론, 세이나도 눈을 크게 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오웬의 뒤에 나타난 은발의 청년은 몹시 싸늘한 눈빛이었다. 그가 더 아프라는 듯 책을 꽉 눌렀다.

    “신간.”

    “윽!”

    “필요하다 했죠?”

    그리고 툭 책이 떨어졌다. 홀연히 사라지는 디온의 뒷모습을, 세이나는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쟤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다가올 때까지도 제대로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나타났는데 저렇게 바로 사라지는 꼴이라니.

    혹여 말이라도 걸까 도망치는 것 같지 않나.

    “이것 봐, 못된 놈 같으니.”

    세이나가 디온을 보는 사이, 오웬은 책을 주워 들었다. 무심결에 펼친 책의 가장 위, 어떤 이름에는 검은 밑줄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흘려 쓴 글자가 있었다.

    범인.

    “이제 이건 못 읽겠어.”

    “안 읽을 거면 줘요. 내가 읽을래.”

    “쳇, 나는 도련님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는데 말이지. 대우가 너무 야박하지 않아?”

    세이나는 킥킥 웃으며 책을 받아 들었다. 얄미운 얼굴이 울상이 되었으니 그래도 디온에게 썩 고맙게 느껴졌다.

    오웬은 그러고도 계속 정수리를 만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간지럽지?”

    긴 손가락 사이로 붉은색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저걸 두고 번쩍번쩍이라니. 화르륵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래도 예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오늘 밤에는 그의 머리카락을 제대로 봐 두어야겠다 생각하며, 세이나는 그가 매만지는 정수리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이상한 것이 포착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 오웬?”

    “응?”

    “머, 머리가…….”

    오웬은 세이나의 반응에 급히 손을 내렸다. 그의 손안은 깨끗하기만 했다. 우려했던 피도 없고, 뽑혀 나온 것도 없었다.

    하지만 세이나의 표정은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오웬의 머리가……!”

    * * *

    점점 잦아지고 있다.

    제 거실을 날아다니던 파란색 물체를 봤을 때의 소감은 바로 그것이었다.

    열심히 움직이는 양 날개는 나비를 닮았고, 꺄르르 웃는 얼굴은 어린아이를, 작은 몸은 인형 같다.

    아주 먼 옛날에 사라졌다던 페어리를 닮은 모습. 그러나 지금은 신화시대가 아니었고, 세이나는 뛰어난 헌터로서의 자질을 또 바로 입증해 냈다.

    그녀는 이제는 제 앞에서 빙빙 도는 물체를 보며 말했다.

    “알레데이아네요.”

    “……그러게 알레데이아야.”

    “그게 뭡니까?”

    세이나의 목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온 디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알레데이아라는 이름을 가진 마물은 이제 바로 그의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마물이죠.”

    마지막 놈을 잡은 게 이틀 전이었던가. 점점 마물의 등장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번 것은 좀 심각했다.

    알레데이아는 이미 멸종했다 알려진 마물이었다.

    “이게, 저걸 만들었어?”

    라샤드는 그 물체를 따라 눈을 굴리다 문득 앞을 가리켰다. 그의 지목을 받은 오웬이 인상을 찌푸렸다.

    “불쾌한 지칭이네요.”

    “재수 없는 얼굴이 썩 닮았는데. 혹시 이쪽도 친척입니까?”

    “그 말, 그대로 돌려줘도 되냐?”

    “아, 그래. 정정하지. 그러니까…….”

    라샤드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우뚝 멈춘 끝에는 바로 오웬의 정수리가 있었다.

    디온이 책으로 내리쳤던 바로 그 자리였다.

    “……저 풀을?”

    세이나는 나지막이 답했다.

    “네. 공작님께도 있는 바로 그 네잎클로버요.”

    흔들흔들. 네잎클로버가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오웬의 정수리에서 솟아난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세이나에게도, 라샤드에게도, 뒤늦게 나타난 디온의 정수리에도 공평하게 풀은 돋아나 있었다.

    “뽑으면 안 됩니다. 뽑는 순간 정신도 날아갈 거예요. 그리고 말했지만, 다시는 꿈 먹기는 안 할 겁니다.”

    “이게 대체……. 언제 생겼지?”

    “식재료에 뿌려 뒀을 거예요.”

    의아해하는 얼굴로 제 정수리를 매만지던 라샤드에게 세이나가 답해 주었다. 그러자 날아다니던 작은 요정이 키득키득 웃었다.

    정답인 모양이다.

    “원래…… 그러는 녀석이죠. 모험가들의 음식에 제 포자를 뿌리고, 그 몸속에 기생하게 만들어요.”

    그 역시 엘리엇 라프만의 책에 있던 내용이었다. 세이나는 한숨을 뱉으며 제 이마 양쪽을 눌렀다.

    하필이면, 걸려도 이런 놈에게 걸리다니.

    “단순히 함께 놀기 위해서 모험가들에게 포자를 뿌리는 녀석입니다. 그래서 악질이죠. 이 녀석이 없애 주지 않으면 죽여도 계속 남아 있을 겁니다.”

    “놀아 주는 것도 신중해야 하죠. 남은 기회를 다 쓰는 순간, 가사 상태에 빠질 테니.”

    “그리고 식사를 시작할 겁니다. 제일 좋아하는 부위가 어디였지?”

    “……눈이었을 거예요.”

    짝짝짝. 알레데이아가 손뼉을 쳤다.

    하지만 네 사람 중 그녀를 따라 웃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들을 약 올리듯, 알레데이아가 다시 공중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날갯짓이었다.

    “없애는 법은?”

    “알레데이아가 원하는 대로.”

    세이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쉰 후에 답했다.

    “진실 게임을…… 시작해야겠네요.”

    짝짝. 알레데이아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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