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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91화 (91/179)
  • #91

    모든 공작에게는 없지만 이 공작에게는 있는 인내심을 속으로 찬양하며, 세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용서해 준 것…… 맞지?’

    아무래도 그간 상대에 대한 신뢰를 쌓은 건 자신만이 아닌 모양이다.

    세이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를 따라 걸어갔다.

    입가에는 어느새 그와 비슷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조금 뒤, 두 사람은 꽃집 앞에 이를 수 있었다. 문 앞에 선 라샤드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 여기로 오는 거였지.”

    그럼 어딜 가는 거로 생각했담?

    이상한 말을 뒤로하고 세이나는 힘껏 문을 밀었다.

    딸랑딸랑. 맑은 종소리가 들리자 막 화분을 정리하고 있던 엘렌이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세……. 헉!”

    그리고 경악했다. 그대로 굳어 버린 엘렌을 보자마자, 세이나도 정지했다.

    그녀는 급히 라샤드를 곁눈질했지만, 자비롭고 인정 많은 공작 각하께서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에 안도하는 사이 엘렌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가 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고, 고, 고, 고, 공작……!”

    “안녕하세요. 엘렌. 네, 공작님이세요.”

    그리고 세이나는 전진했다. 엘렌을 보는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오해가 있었어요.”

    느닷없이 시작된 대화는 꽤 오래 이어졌다.

    세이나는 언젠가 저를 찾아왔던 디온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하나씩 차근차근히 이야기를 꺼내 갔다.

    엘렌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중간중간 힐끔 공작을 살피는 눈이 무척 조심스럽다.

    하지만 공작과 눈이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계속 세이나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렌은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서 눈길을 돌리기 어려웠다. 세이나를 바라보는 그의 옆얼굴은 무척 온화했다.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와 다르게.

    “……그렇게 공작님께서는 저를 감옥에서 꺼내 주셨답니다.”

    세이나의 이야기가 거의 끝에 이를 무렵이었다. 엘렌은 배경 음악처럼 들리던 목소리가 멈추자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다, 다치진 않았어요?”

    “네. 물론이죠. 모두 공작님 덕분이랍니다.”

    “세이나를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공작님.”

    그녀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자 세이나는 다소 얼떨떨해졌다.

    ‘네가 왜 감사 인사를 하니?’

    부모님과 면담시키러 선생님을 끌고 온 문제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선생님께서 마주 인사하지 않은 것 정도. 라샤드는 그녀의 인사에 일말의 감흥도 없어 보였다.

    대화가 중단되어 불안해진 세이나가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정원사는 채용하셨나요?”

    “그래.”

    세이나의 손이 다시 의자 뒤에서 움직였다. 제 팔뚝을 쿡쿡 찌르는 뾰족한 손톱에 라샤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의미를 알아차린 건 그녀가 눈짓을 준 다음이었다.

    “아, 네가 원한다면 자리를 만들 수도…….”

    “아, 아니에요! 그저 걱정돼서 물었어요. 아주 급한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엘렌이 손사래까지 쳐 가며 부정하자 작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엘렌을 공작저에서 보호한다는 작전은 이번에도 실패인 듯했다.

    자신이 만든 상황이지만 아주 조금,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엘렌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이곳이 좋은걸요.”

    예쁜 꽃집 소녀는 문밖까지 나와서 두 사람을 배웅했다.

    세이나는 거의 뒤로 걸어가며 엘렌에게 어서 들어가라고 몇 번이나 손짓했다. 그러나 엘렌에게는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고, 세이나도 그랬다.

    들어가세요. 가시는 것 보고 갈게요. 들어가도 된다니까…….

    이상한 작별 인사는 꽃집의 손님이 온 후에야 중단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엘렌을 보며, 세이나가 픽 웃었다.

    ‘역시 여주인공. 너무 착하단 말이야.’

    이쯤 되면 위기의 상황에 나타나 구해 준 공작님을 보고도, 엘렌이 무서워 달아날 일은 없을 듯했다.

    몸을 앞으로 돌렸을 땐 라샤드가 세이나의 집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엘렌을 봤을 때, 어땠어요?”

    “어떠냐니?”

    반쯤 열린 문을 앞에 두고, 그가 세이나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는 사이, 라샤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청혼은 그냥 명분이었어.”

    아니, 그 기사도 반한 것 같다고 말했는걸.

    그게 원작이기도 하고.

    설마 아무 조짐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나 싶기도 하고.

    보통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만날 때는 어떤 쨍! 한 게 있단 말이죠. 파직!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세이나는 그 어느 것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공작님의 눈에 짜증이 가득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화를 얌전히 받아 주는 날이었다. 라샤드가 완전히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말했지만 나와 엘렌은 아무 사이도…….”

    “무슨 사이요?”

    그 사이를, 돌연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라샤드는 찡그린 얼굴 그대로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선 남자는 붉은 머리칼을 기울이며 짓궂게 웃었다.

    “이 집에는 재미있는 일이 많네요.”

    “오웬? 언제 왔어요?”

    “방금 왔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대화를…….”

    그러나 답변도 듣기 전에, 라샤드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던 오웬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사나운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누군가 제 팔을 붙잡는 감각에 오웬의 회색 눈이 커졌다. 그 주인공은 당연히, 세이나였다.

    바로 불같은 추진력을 가진 여자.

    “뭐 해요? 다음은 그쪽이에요.”

    * * *

    라샤드와 달리, 오웬의 경우엔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일단 오웬과 엘렌은 아직 만난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첫 만남.

    그리고 여러 경험으로, 세이나는 첫 만남이 이후의 인상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턱대고 함께 찾아가 ‘제 친구입니다!’라고 알려 주는 것은 너무 갑작스러워 제외했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는 쪽으로 하죠. 때로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좋으니까요.”

    여주인공과의 첫 만남을 앞둔 오웬은 정말 느긋해 보였다.

    세이나가 ‘어떻게 할까요?’ 하고 몇 번 물었을 때도 썩 관심 없는 태도였다. 아, 물어보긴 했다. ‘정말 해야 하나요?’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으면 그냥 초대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날은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안 돼요. 다 있어야 해요. 꼭.”

    오웬은 제법 예리하게 그녀의 속내를 읽어 내었으나 세이나는 단호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 엉성한 연극이 시작되었다.

    세이나는 조금 긴장하여 엘렌에게 다가갔다.

    작은 소녀는 이제 문 앞에 있는 화분들을 안으로 옮기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이걸 오웬과 함께 안으로 옮겨 주면서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마침, 타이밍 좋게 엘렌이 세이나를 발견했다.

    “세이나! 또 보네요.”

    “아, 정리 중인가요? 도와줄게요.”

    분위기도 몹시 자연스러웠다.

    두 번째 화분을 안으로 들이고 밖으로 나올 무렵, 세이나는 멀리서 오고 있는 오웬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급히 손을 들었다.

    “어, 오, 오웬!”

    이 저주받은 연기력 같으니.

    호기롭게 뻗은 손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뚝, 뚝 끊겨 나왔다. 동시에 오웬의 걸음도 뚝, 멈춰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오웬이 제 입을 틀어막고 끅끅대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바쁘게 손을 저었다.

    야! 그만 웃고 빨리 와!

    오웬은 거의 비틀대면서도 다가오긴 했다. 그게 너무 느려서 성큼성큼 다가가 맞이하자, 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세이나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좋은 첫인상 조성’의 그 ‘첫 단계’부터 삐걱대고 있었다.

    “인사하세요. 엘렌. 이쪽은 오웬이에요. 같은 헌터 협회 동료분이시죠. 여,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하하!”

    다행히도 엘렌은 딱히 그녀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맑은 하늘색 눈동자는 오로지 오웬에게 박혀 있었다. 신중한 시선을 받으며 오웬이 정중하게 인사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웬 라프만입니다.”

    “아, 엘렌……이에요.”

    “엘렌, 그…… 어……. 오웬은 제가…….”

    여기서는 칭찬을 하기로 계획했었다.

    그런데 제 저질스러운 연기력이 스스로도 기가 막혔던 탓인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세이나는 어렵게 다음을 떠올렸다.

    칭찬. 칭찬해야 한다. 칭찬!

    “존경하는 분이에요.”

    “아, 절 존경하고 있었나요?”

    계획한 것과 다른 말에 오웬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의 눈에 서린 장난기를 보고 세이나는 후회했다.

    아, 잘못 골랐네.

    그리고 엘렌에게로 시선을 옮겼을 때, 그녀의 후회는 더욱더 깊어졌다.

    엘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동료……분이라고요?”

    누가 봐도 불쾌감이 가득한 눈이었다.

    얘가 왜 이러지?

    세이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 않은가. 그런데 저렇게 싫어해? 왜?

    존경? 그게 혹시 문제야?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오웬은 재빠르게 자신이 할 일을 알아차렸다.

    세이나는 멍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오웬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너무나 평범한 소개였을 텐데. 어째서?

    “저 남자.”

    그때, 엘렌이 말했다.

    “본 적 있어요.”

    “보, 본 적 있어요?”

    “네. 얼마 전 밤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밤이라면 아마도, 세이나의 집을 떠날 때였을 것이다. 혹시 그때 이상한 일이라도 저지른 걸까.

    세이나가 걱정하던 그때, 엘렌이 홱 몸을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옅은 색채의 눈동자가 맹렬하게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번쩍번쩍 빛났어요.”

    세이나는 조금 쉬었다가 물었다.

    “……그래서요?”

    “야광 머리잖아요! 변태가 확실해요!”

    엘렌은 힘껏 소리치며 제 머리 위로 손짓했다.

    “번쩍번쩍이요!”

    너희 도대체 원작에서는 어떻게 친해진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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