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90화 (90/179)
  • #90

    소녀와 3명의 남자.

    그들을 떠올리자 다시 우울해졌다.

    세이나는 단지 엘렌이 안전하기를 바랐을 뿐, 그녀의 예정된 행복마저 엉망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지금 저기 있는 둘 중 엘렌의 운명의 남자가 있으면 어떡하지?

    ……그런 의미에서,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엘렌과 관계 개선이 필요해요.”

    식탁 앞에 다시 모여든 남자들은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도 대답이 없었다.

    덕분에 세이나가 조금 머쓱해졌다. 나름대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는데, 반응들이 영 시원치 않다.

    뒤늦게 오웬이 손을 들었다.

    “오늘 신간 사러 갈 건데, 갈 사람?”

    “아, 제가 어제 샀습니다. 다 읽었으니까 빌려 드릴게요.”

    “안 빌려. 또 첫 페이지에 범인 이름 써 놨을 거잖아.”

    “쳇.”

    “아, 그러고 보니! 거실에 있는 그 책에도!”

    아아, 평화로운 일상이여.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짜게 식는 걸까.

    문득 전생에서 봤던 그 소설의 작가를 만나고 싶었다. 남주인공 후보들보다 원작에 진심인 엑스트라를 보면 감동해 주지 않을까.

    딱히 원작 지킴이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할 수만도 없었다.

    무엇보다 엘렌의 안전이 걸려 있지 않은가.

    이 남주인공 후보들은 엘렌을 잘 지켜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오웬이 엘렌을 지키러 등장해도, “그쪽은 또 누구세요!” 하고 소리치며 더 당황할 수도 있다. 안면 정도는 터놓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저녁 식사에 초대할 수도 있고.’

    역시, 혼자 식사하게 두는 부분이 가장 찝찝하다.

    “후작을 막는 데 엘렌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엘렌은 무엇보다 당사자니까.”

    “글쎄요.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해서요.”

    “뭐, 마물을 잡긴 했지.”

    디온의 말에 오웬이 덧붙였다.

    일주일간 붙잡은 마물만 벌써 3마리. 모두 민간인에게 피해가 가기 전에 붙잡을 수 있었다.

    운이 좀 좋긴 했다. 세 종류 모두 제대로 활동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리는 마물들이었으니. 라샤드의 인맥으로 치안대에 피해자가 없는지 확인도 마쳤다.

    ‘수입도 제법 짭짤했고.’

    마물 3마리는 모두 제법 괜찮은 마정석을 품고 있었다.

    무거워진 주머니를 생각하며 미소를 그리던 세이나는 떨치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마물은 나쁜 거야. 그렇고말고.

    “공작님은요?”

    두 남자에게서 긍정적인 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자연스레 세이나의 눈길이 라샤드에게로 향했다.

    마침 그가 말할 차례이기도 했다. 세이나가 사뭇 심각해졌기에 다른 두 남자는 입을 다물었고 식당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라샤드가 그 분위기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왜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지?

    뒤이어 그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엘렌도 이 일을 알고 있긴 해야겠지.”

    그리고 세이나는 미친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요, 공작님부터 합시다.”

    * * *

    ‘그 녀석들. 순서를 미루려고 입 다물고 있었던 거군.’

    한때 냉혈한이라 불렸던 사내는 이 집 안에서의 서열을 곱씹고 있었다.

    가장 위는 세이나가 당연하고, 그 아래는 이 집인 것 같다.

    그럼 그 아래는?

    확실한 건, 라샤드 자신은 아니다.

    세이나가 저를 끌고 나오자 그 두 놈은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게 어찌나 얄미워 보이는지. 하마터면 체통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들과 있을 땐 그러고 싶을 순간이 너무 많았다.

    라샤드는 자신이 꽃집을 방문하는 사이 둘 중 1명은 도망친다는 쪽에 어제 잃은 돈과 같은 금액을 걸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떠밀린 셈이다.

    ‘결국 만만한 건 나지.’

    어떻게 된 건지. 그 두 녀석은 조금도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어려워한다면 그것대로 그도 불편하긴 했겠지만, 너무 편하게 대하니 이것대로 단점이 있기도 했다.

    아직도 저를 미끼로 쓰던 디온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왔다.

    집사가 알면 목을 매달자고 하지 않을까.

    “저, 공작님. 가기 전에 먼저 말할 게 있어요.”

    하릴없이 끌려오던 발은 어느새 꽃집 근처까지 와 있었다.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던 초반과 달리, 밖에 나온 후 세이나의 걸음은 점차 느려져 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이유가 궁금했던 차였다.

    그가 물어보려던 찰나, 세이나가 몸을 돌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흔들거리고, 이윽고 금색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주 선 대치는 라샤드로 하여금 그 꿈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염려와 달리 선명히 남아 있는 바로 그 꿈 말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 엘렌이 공작님을 안 따라간 거요. 사실 저 때문이에요.”

    하지만 세이나는 그때와 달리 몹시 침울했다.

    그녀의 표정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못 들었기에 라샤드는 다시 물어야 했다.

    “뭐?”

    “제가 그, 공작님한테 복수하려고 그랬어요.”

    “복수?”

    “지, 지금은 아니에요. 공작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평소라면 기껍게 들렸을 말은 제대로 귀에 꽂히지 않았다. 세이나가 눈을 내리깔고 초조한 듯 제 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이나가. 그 세이나 로힐이,

    충격적이라고 해야 할지.

    신선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라샤드는 말없이 세이나를 주시했다. 작고 도톰한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모양이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꽤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왔으나, 역시 제대로 귀에 박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요약해 보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내 험담을 했다는 거군?”

    목소리가 멎었다. 동시에 정신없던 손끝도 멈췄다.

    라샤드는 재판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금색 시선이 조심스레 올라오더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네 번째쯤 올라왔을 땐 라샤드는 미소를 참기 어려워졌다.

    분명 기분 나빠야 할 상황이 맞는데, 영문 모를 웃음만 자꾸 새어 나왔다.

    세이나는 이제 애꿎은 돌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입술이 움직였고, 듣기 좋은 음색이 나왔다.

    내가 많이 경솔했다. 그런 복잡한 사정인지 몰랐다.

    길고 긴말이 흘러나왔지만, 이번에도 요약은 단순했다.

    “……정말 미안해요.”

    다시 꿈이 떠올랐다.

    자신이 고른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순간 할 말을 잃었을 정도였다. 얼간이처럼 안 보이려고 애써 침착하게 굴었으나, 평소보다 긴장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연회장에 들어간 후부터 차분하기 어려웠다. 고작 꿈일 뿐인데. 세이나는 어떻게든 잘 맞춰 보려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 반. 좀처럼 보이지 않는 부끄러운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또 반.

    당사자가 들으면 ‘날 놀렸군요!’라고 소리칠 걸 알면서도, 계속 곤란한 상황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 팔을 꽉 잡는 손길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춤을 출 땐…….

    “공작님?”

    세이나가 조심스레 라샤드를 불렀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라샤드는 그날을 회상했다.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명랑하게 물었다.

    - 한 번 더 돌아볼까요?

    한 번 더 함께 춤추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라샤드는 그리 생각했다.

    * * *

    “정말 화난 거 아니죠?”

    이미 몇 번이나 답을 얻었음에도, 세이나는 불안하여 또 물었다.

    “안 났어.”

    그리고 이미 몇 번이나 똑같은 대답을 했음에도, 라샤드에게 짜증은 없었다.

    몹시 다행스러운 상황이긴 하나 세이나는 의심이 좀 많은 편이었다.

    “그…… 많이 놀라서…….”

    어떻게 되어 버린 건 아니지?

    어떻게 남이 자신의 험담을 했다는데도 편안할 수 있는 걸까. 게다가 두 사람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아니던가.

    ……비록 그들 스스로는 아직 모르고 있긴 하지만.

    세이나는 이 건으로 라샤드가 크게 화를 내도 고스란히 받아야겠다는 각오까지 마친 후였다.

    그런데 별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겠지?

    “화…… 화내도 괜찮아요. 내가 아니었다면 이야기가 훨씬 더 잘 풀렸을 거잖아요. 쓸데없는 지출을 할 필요도 없었고.”

    “쓸데없는 지출?”

    “계약금이랑, 마르셀이랑…….”

    그가 자신 때문에 쓴 돈을 생각하던 세이나는 점점 더 입 안이 말라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간의 일도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샤드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날,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더는 이 거리에 올 이유가 없었겠군.”

    “음……. 네, 그렇죠.”

    “지하실에서 마물을 만나지도 않았을 거고.”

    “……네.”

    “너와 함께 공작저에 가지도 않았을 테고.”

    “그, 그렇죠.”

    “어려지지도……. 않았으려나.”

    “……아마도?”

    “고저택에는 함께 못 갔지만.”

    “…….”

    “꿈속으로 들어갈 일도 없었겠지.”

    저렇게 하나하나 꼬집다니.

    역시 화가 난 게 틀림없다.

    세이나는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해 고개를 푹 수그리고만 있었다. 마치 그곳에 아주 흥미로운 문양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공작의 부츠는 관찰하기 썩 좋은 소재는 아니었고, 덕분에 민망함이 한층 더 짙어졌다.

    살짝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라샤드는 곧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럼 이제 갈까?”

    라샤드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자 세이나가 일순 멍해졌다. 그녀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그의 옆에 바짝 붙었다.

    “……공작들은 다 그렇게 마음이 넓어요?”

    “그건 아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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