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물음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오웬이 눈을 떴다.
“으윽…….”
“오웬, 정신이 들어요?”
“죽겠습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상태를 대변했다. 그가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대체 꿈속에서 뭘 한 겁니까?”
글쎄, 어디 보자.
성안의 하인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고.
동네 양아치들에게서 금품을 빼앗고.
그 돈으로 쇼핑을 한 후에 공작 부인이 되고.
당당하게 연회장에 들어서고 춤을 춘 후에 셀론 프라벨을…….
“다음엔 좀 더 자중할게요.”
“다음은 없습니다. 한 번만 더 하면 정말 골이 쪼개질지도 모르겠어요.”
오웬은 짜증스레 말하며 손등으로 제 미간을 꾹 눌렀다. 살짝 보이는 회색 눈에는 피로함이 가득했다.
몇 시간 새 몇 년을 늙어 버린 것 같다. 눈의 초점이 흐린 모습이,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헤매는 듯했다.
“조금만 더 자도 될까요?”
“그, 그래요.”
세이나는 작게 대답하고 최대한 조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가에는 이미 라샤드와 디온이 있었다. 그들을 따라 나가기 전, 세이나가 몸을 돌렸다.
“고마워요, 오웬.”
그러고 그녀는 앞에 가던 남자를 확 잡아당겼다. 그녀가 눈길을 보내자 디온이 살짝 고개를 방 안으로 넣은 후 말했다.
“꽤 쓸 만한 능력이었어.”
하지만 세이나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디온은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구해 줘서 고맙습니다.”
오웬은 실소를 터트렸다.
* * *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낯선 천장을 바라본 기분은 참 묘했다. 술을 진탕 먹어도 잘 취하지 않는 그였다.
서늘한 공기 속, 오웬은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려 양옆을 확인했다. 작은 창문 속. 보랏빛 꽃이 든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옆집이군.’
추측은 문을 열고 나가자 현실이 되었다.
큰 소파, 낡은 벽난로, 위태롭게 쌓여 있는 책이 보인다. ‘레디앙 부인의 은밀한 살인’, 이상한 제목이었다.
그 바로 옆에는 입을 쩍 벌린 드래곤. 깜짝이야. 놀라 소리칠 뻔했네.
식당에서 본 광경은 더욱 기묘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접시를 옮기고 있는 여자는 집주인 세이나였다. 검은 바지에 흰 셔츠만 입은 그녀는 평소보다 더 생기 넘쳐 보였다.
이어서 따라 들어온 이는 도련님. 식기를 닦는 손길이 퍽 정성스럽다. 그가 식탁을 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또 당근이네요.”
“주는 대로 먹어.”
마지막 접시를 들고 온 이는 칼만 공작이었다.
젖은 손. 걷어 올린 소매. 허리에 감은 검은 앞치마가 믿기지 않아, 오웬은 요란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 일어났네요.”
세이나가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이어서 두 남자의 시선까지 받자, 오웬은 멋쩍음을 느끼며 괜히 헛기침했다.
세이나는 말없이 그에게 자리를 권했고, 오웬은 머뭇거리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 앞에 펼쳐져 있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보며,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과 식사하는 건 정말 오랜만입니다.”
*
그 시각. 엘렌도 방문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노크도 없이 들어선 사내는 몹시 키가 컸다. 늘 들리는 방울 소리도 없었기에, 화분을 정리하던 엘렌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어느새 카운터 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엘렌.”
후드 아래 머리카락은 보랏빛이었다.
11. 진실과 거짓은 한 끗 차이
새 아침이 시작되었다.
익숙하게 아침을 준비하던 세이나는 문득 들리는 노크에 현관으로 다가갔다.
“저 왔습니다.”
디온은 오늘도 깔끔한 모습이었다. 살짝 눈매를 접으며 보이는 웃음은 천진난만한 빛을 띠었다.
그러나 세이나의 눈에는 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좀 졸려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기상 시간에 딱 맞춘 11시에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 네. 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졸려서…….”
“어제 늦게 잤나요?”
“공작님이 알아봐 준 것 있잖아요. 유클레스 후작의 어머니에 대한 자료. 꽤 많은 양이기도 하고. 귀족들은 왜 이렇게 복잡한지…….”
“도와 드릴까요?”
“아, 그래 줄래요? 잠깐만요. 자료를…….”
10분 후에는 그가 왔다.
“오늘도 실례 좀 할게.”
오웬은 갓 구운 빵을 한가득 안아 들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감시를 서며 먹을 양이라고 덧붙이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은 양이었다.
그건 그들의 아침 식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뒷문에서는.
“공사가 더 늦어질 것 같아.”
라샤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서는 아론이 열심히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미 한 소리를 들은 모양이지.
“돈을 너무 많이 준 게 문제였던 것 같군. 인부들이 열을 올리며 너무 작업에 푹 빠져 버렸어. 그 탓에 2층까지 모두 뜯어내려고 했는데, 사다리에서 떨어져 버렸다더군. 그 바람에 하던 공사까지 망가져서…….”
“안 팔아요.”
“……계약을 갱신할 거야.”
다음 날의 광경도 비슷했다. 디온이 왔고, 오웬이 왔고, 라샤드도 왔다.
다음 날 아침에는 식탁에서 책을 보던 오웬이 세이나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뭐…… 은밀한 살인? 어쨌든 이상한 제목이었다.
다음 날에는 유난히 눈이 일찍 떠졌다.
습관적으로 아침을 준비하던 세이나는 접시를 꺼내기 직전 잠시 멈칫했다.
오늘도 오려나? 다소 늦은 고민이었다. 이미 4인분의 빵을 사 온 뒤였으니.
머뭇거리는 사이, 노크가 들렸고 또 문이 열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을 보낸 세이나는 돌연 중얼거렸다.
“신경 쓰여요.”
그러자 디온이 말했다.
“네, 세이나. 그거 도둑 맞죠?”
“도둑이 아니라……. 잠깐! 빼 가지 말아 봐요! 카드 한 번만 섞고!”
“아니지. 이미 손이 닿았으니 그걸 뽑아야 해. 봐주는 건 없어.”
“시간 좀 달라니까! 잠깐만!”
그리고 설거지 담당이 되어 버린 뒤에도, 세이나는 그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릇을 다 닦을 때쯤엔 그에 집중하느라 마무리 작업이 느려졌을 정도로, 그녀는 매우 진지했다.
“뭐가 그렇게 신경 쓰여요?”
더 덧붙이자면 디온이 어느새 옆에 다가온 것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엘렌이요.”
“엘렌?”
“보라색 머리가 계속 안 나타나고 있잖아요.”
“네.”
“정말, 안 나타난 게 맞을까요? 그때부터 시간이 너무 지났는데, 혹시 우리가 놓친 게 아닐까요?”
“바쁜가 보죠.”
세상 가벼운 어조에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세이나는 어이가 없어서 디온을 빤히 보았다.
‘보고 싶다고 찾아온 녀석 맞아?’
그녀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디온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곧 하품까지 할 것 같다.
‘너무 잘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찔리는데.’
어제만 해도 그랬다.
세이나가 정리를 하다 찾아낸 낡은 카드는 오웬의 제안으로 게임으로 이어졌다.
아마, 디온이 할 줄 모른다고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의욕이 치솟았던 게 틀림없다. 라샤드까지 서재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자 판이 벌어졌다.
돈까지 걸린 나름대로 진지한 도박이었다.
디온은 오웬을 비웃어 주며 모든 돈을 독식했다.
울상이 되어 테이블을 내리친 오웬은 어떤 그림의 한 장면 같았다. 그때 그가 외친 말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 너 포커 모른다며!
- 아, 그걸 믿었습니까?
바로 그 얄미운 미소의 사내는 지금, 순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방금 내려놓은 접시를 가리켰다.
“덜 닦였네요.”
“…그럴 땐 말없이 해 주면 멋있는 건데.”
“그건 안 되죠. 세이나가 졌잖아요.”
그가 손을 거두며 미소 지었다.
“대신 지켜봐 드릴게요. 외롭지 않게.”
어쨌든 외롭지 않은 설거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세이나는 찝찝함을 떨치지 못했다.
라샤드의 요리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한 탓도 있었다.
‘엘렌은 혼자 밥 먹을 텐데.’
이 광경. 이 시간. 이 식사.
적어도 저기 서 있는 검은 머리와 주황 머리는 엘렌의 집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녀가 외로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세이나는 조금 양심의 가책도 느껴졌다.
세르본 부인의 말도 아직 잊지 않았다.
- 이 사람 때문에 당신은 운명처럼 다가올 인연들을 모두 만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녀는 결코 점술가가 아니지만.
굳이 이름 붙이자면 범법자가 맞았다.
라샤드는 세르본 부인을 바로 황실로 넘겼다. 결계와 관련된 사안은 모두 비밀리에 다뤄진다고 했다. 마물도, 황실 기사들이 처리할 것이다.
당연한 절차였지만, 조금 아쉽기도 했다. 아직 그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다.
왜 거기서, 그런 말을 한 건지.
‘우연인가?’
왜 하필 그 카드가 나왔는지도.
‘그레타가 엘렌의 일상을 전해 준 건 맞는 것 같은데.’
라샤드는 조사가 다 끝나면 세이나에게도 전해 주겠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기다릴 수밖에.
‘그 꿈도. 결국 특별하지 않다고 결론이 나 버렸지.’
오웬은 꿈은 현실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지지만, 현실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해, 현실의 내용이 꿈에서는 왜곡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설명이었다. 당장 뛰어 내려간 거리에는 사계절이 다 섞여 있었으니.
고양이가 한 말도, 그녀의 과거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디온은 과거 그대로 꿈에 나왔는걸.’
소설이 검색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세이나는 분명 전생에서 엘렌이 있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작의 엘렌은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