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88화 (88/179)
  • #88

    난간 뒤로 넘어가 있는 디온을 보며 세이나는 경악에 차 소리쳤다.

    세이나가 멋진 업어치기로 날려 버린 남자는 어느새 한쪽 옆구리에는 엘렌을, 다른 쪽 손에는 디온을 매단 채 난간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손만 놓으면, 디온은 정원 아래로 추락해 버릴 게 틀림없었다. 그가 소리쳤다.

    “거기 너! 도련님에게서 떨어져!”

    “이거 놔! 놓으라고!”

    “꺄아아아악!”

    “그만!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다니!”

    셀론은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주인의 비난에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충성심이 너무 강고한 탓이다.

    “도련님, 저 여자. 보,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이 틈에 어서 붙잡…….”

    “꺄아악! 꺄악! 살려 줘요!!”

    “이 녀석, 가만히 있지 못해?!”

    세이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여기서 저 남자에게 달려든다면 엘렌은 구할 수 있을지 모르나 디온이 위험했다.

    ‘공작님도 옆에 온 놈 때문에 발이 묶여 버리고……. 어쩌지?’

    그러나 대치 상황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도련님! 어서요! 저 여자를 제압해 버리……! 으악!”

    디온이 남자의 몸을 걷어차 버린 것이다.

    덩달아 엘렌도 움직이자 남자의 몸이 크게 앞으로 기울었다.

    “크윽!”

    세이나는 바로 그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앞으로 쓰러지면 엘렌도 디온도 무사할 수 있다.

    그녀는 남자가 몸을 일으킬 틈도 주지 않고 그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에게 도달하기 직전 어떻게 저놈을 효과적으로 팰지도 계산도 완료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가 디온을 놓아 버리자, 세이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디온!”

    * * *

    이따금 꿈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날이 있었다.

    - 아 참. 이거 꿈이었지.

    세이나도 그랬다.

    테라스 너머로 떨어지는 그를 보며 그녀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뱉었다. 급히 뻗은 손끝은 그에게 닿기엔 너무 멀었다. 그리고 찰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디온은 빠르게 추락했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끔찍한 상상에 눈을 질끈 감았을 무렵.

    그 생각이 떠올랐다.

    ‘참. 이거 꿈이었지.’

    다시 눈을 떴을 땐 집 안이었다.

    “아, 으으. 머리 아파…….”

    지끈대는 머리를 짚고 세이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물에 젖은 솜처럼 온몸이 무겁고 팔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몸살을 앓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물론, 한 번도 겪은 바 없으니 그저 추측.

    무심코 고개를 돌린 옆에는 라샤드가 있었다. 꿈속에서처럼 자신의 팔을 꽉 붙잡은 채.

    아, 이러다 따라온 거였군.

    “괜찮습니까?”

    오웬은 눈을 감기 전보다 훨씬 지친 기색이었다. 어둡게 염색된 곱슬머리 아래,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아직 밖이 어두운 걸 보면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아주 오랜만에 그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 기이한 감각의 원인에는 두통도 있었다. 세이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머리를 꾹 눌렀다.

    “머리가……. 머리가 엄청 아파요.”

    “그 외에는?”

    “음, 다 괜찮은 것 같은데…….”

    그 무렵, 라샤드도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저는 괜찮아요. 공작님은요?”

    “나도, 이만하면 참을 만한…….”

    “앞으로는.”

    살벌한 음성이 라샤드의 말허리를 끊고 들어왔다. 살뜰하게 세이나를 살피던 라샤드가 고장 난 것처럼 멈춰 버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팽팽한 긴장감 속,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아주 잠시.

    곧 오웬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뭘 하기 전에 미리 말씀하십시오. 각하.”

    “……주의하지.”

    “그럼 디온은?”

    그제야 세 사람의 관심이 쭉 누워 있던 청년에게로 향했다.

    속눈썹을 곱게 내린 디온은 이제 파리하다 못해 종잇장 같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얕게 이어지는 숨은 귀를 가까이 대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고, 몸은 얼음장 같다.

    문득 떨어지던 그가 떠올랐기에, 세이나는 입술을 말아 물 수밖에 없었다.

    혹시 꿈이 악영향을 미친 걸까. ‘너무 심한’ 충격은 그의 몸에 이상을 만드는 게 아닐까.

    역시 그때, 붙잡았어야 했는데.

    “아, 신발…….”

    디온의 눈이 서서히 열린 건 세이나가 본격적으로 자책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죄책감으로 눈을 내리깔던 세이나의 어깨를, 오웬이 툭툭 건드렸다.

    저만의 생각에 갇혀서인지 세이나는 디온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내가 잡았어야 했어. 다시금 작게 속삭이던 그제야.

    “신발, 있네요.”

    그의 목소리가 닿았다.

    “디온!”

    디온은 그런 그녀를 보며 살짝 미소 지으면서도,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초점이 흐린 파란 눈에 차차 빛이 스며들었을 땐 얼굴이 구겨졌다.

    예의 그 두통 때문이었다.

    “깨어났군요!”

    “괜찮아? 몸은?”

    “괜찮……. 아니네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다른 곳은? 아픈 곳은 없어요?”

    극적으로 깨어난 시체, 아니, 디온은 라샤드와 세이나의 염려를 한 몸에 받았다.

    눈은 다 잘 보이는지, 가슴은 갑갑하지 않은지, 사지는 다 잘 움직이는지. 막 깨어난 사람에게 하는 것치곤 지나치게 많은 질문이 폭포수같이 쏟아졌다.

    그러나 디온은 인상도 찌푸리지 않고 착실히 대답했다. 네, 네. 네. 마지막 질문에는 이러했다.

    “물이라도 맞게 해 드릴까요?”

    “정신도 멀쩡하군.”

    드디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 다행이에요. 정말…….”

    “네, 다행이군요.”

    고작 한나절, 현실에서는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음에도. 급한 마음에 시작했던 꿈속 여행은 꽤 깊은 피로감을 남겼다.

    며칠 동안 잠을 안 자고 버틴 기분이다.

    ‘잠깐, 그럼 오웬은 괜찮은가?’

    그때 마침,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제…….”

    그녀를 보는 눈이 사뭇 진지해졌다.

    겨우 찾아온 안도감이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세이나는 조금 겁을 먹고 그를 보았다.

    또?

    또 할 게 있나?

    “저도, 기절 좀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오웬은 쓰러졌다.

    *

    현실의 세이나는 꿈속보다 훨씬 민첩했다.

    잡아야 했어, 그렇게 되뇌던 효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세이나는 오웬이 바닥과 입 맞추기 전에 그를 붙들 수 있었다.

    오웬! 크게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한번 의식을 잃은 이는 쉽게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세이나는 그를 무릎 위에 올리고 열심히 흔들었다. 오웬! 오웬!

    그의 대답은 쌍코피였다.

    사태가 심각함을 짐작한 라샤드가 나서서 그를 침대로 옮겼다. 당도한 방은 그의 옆 옆방. 한때 디온이 잠시 머물렀던 조부모의 방이었다.

    오웬은 의사가 다녀간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열도 없고 딱히 아파 보이는 곳도 없으니 피로가 누적된 거라고.

    의사는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발언은 라샤드와 세이나의 자책감을 가중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세 사람은 오웬의 침대 옆에 옹기종기 모이게 되었다.

    세이나가 조심스럽게 아직 붉은 흔적이 남아 있는 그의 인중을 닦아 낼 때, 디온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날, 테라스에서 셀론에게 대든 사람은 원래 엘렌이었습니다.”

    깨어난 디온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본래의 그로 돌아왔다. 그에 염려가 좀 덜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신기해 괜히 더 빤히 보게 되었다.

    “세이나보단 조금 늦은 타이밍이었죠.”

    “……큰 소동이 있었겠네요.”

    “네. 거의 모든 어른이 테라스로 몰려왔습니다. 그중에는 아버지도, 유클레스 후작도 있었습니다.”

    테라스. 셀론. 꿈에서 겪은 일이 빠르게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그 무도한 말을 누군가 막아 줬다고 하니 퍽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디온이 말을 이었다.

    “후작은 그곳에서 엘렌의 뺨을 때렸습니다.”

    “……네?”

    “셀론이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죠.”

    “정말요?”

    디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나는 눈썹을 구겼다. 하, 망할. 정말 신발로 먼지 나게 맞아야 할 놈은 따로 있었군.

    ‘디온은……. 엘렌을 신경 쓸 수밖에 없겠어.’

    그녀는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맞은 여자였다. 그것도 그녀의 아버지에게.

    상상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정작 앞에서 본 디온은 얼마나 놀랐을까.

    “다행히 다음 연회에서도 엘렌을 만날 수 있었죠. 그 작자, 딸에게 모질게 대하는 것치곤 연회에는 꼬박꼬박 데리고 다녔어요. 남들에게 소개도 제대로 안 하면서.”

    “…….”

    “하지만 열다섯 이후로는 저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군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방은 침묵에 잠겼다.

    이어지는 오웬의 숨소리마저 없었다면 혹시 시간이 멈추었나 착각이 들 만큼 조용한 정적이었다. 세이나와 라샤드는 디온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디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할 때까지.

    “물어보시질 않으셔서요.”

    세이나는 그러고도 조금 후에야 답했다. 아, 드디어 이야기가 끝났구나.

    “그야, 말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라샤드가 옆에서 동조하며 끄덕였다.

    역시 그렇죠? 그렇지. 공을 주고받듯이 호흡 좋게 마주 끄덕이는 남녀를 보는 디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샤드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임을 알게 되자, 세이나는 퍽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혹시 그도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을지.

    아직 디온이 말하지 못한.

    그리고 세이나도 라샤드도 차마 묻지 못한 예민한 부분.

    ‘혹시, 디온은 회장의 친아들이 아닌가 하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