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86화 (86/179)
  • #86

    음악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세이나는 학교에서도 궁금해하지 않던 악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디서 들어보긴 했는데.

    이렇게 긴 음악이었던가. 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이제 출 만큼 췄다고 생각했는데, 도통 주변 사람들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라샤드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손을 꼭 잡고 있는 듯하다.

    ‘언제까지 추려고?’

    차마 물어보기도 좀 그랬다. 이상한 질문 이후, 그의 표정이 계속 좋지 않았던 탓이다. 세이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오랜만에 라샤드와의 분위기가 어색해진 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금발의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엘렌?’

    세이나의 발이 라샤드의 구두를 꾹 밟았다.

    그녀의 몸이 또다시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라샤드는 깜짝 놀라 그녀를 끌어안았다.

    “세이나?”

    “엘렌이에요!”

    그러나 라샤드가 돌아봤을 때 이미 금발의 여아는 사라진 이후였다.

    사람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잘 넘어갔으나, 방금 세이나가 보인 행동은 누가 봐도 춤동작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표정.

    그녀의 얼빠진 얼굴이 공작 부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음악이 멈췄고, 춤을 추던 이들도 당황하며 그들을 보았다. 라샤드는 세이나를 부축하며 회장 한 편으로 물러났다.

    “괘, 괜찮으십니까?”

    후작과 후작 부인이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라샤드는 세이나를 의자 위에 앉힌 후 그들에게 말했다.

    “아내가 발을 접질린 것 같군. 흐름을 끊어서 미안하네.”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니. 괜찮아. 심하진 않아. 그렇지?”

    세이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은 “정말 괜찮습니까?”라고 연거푸 물어봤으나 라샤드는 단호하게 그들을 물렸다.

    후작 부인이 회장의 중앙으로 돌아와 악사들에게 손짓했다. 짝짝. 짧은 손뼉 소리가 더운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음악이 재개되었다.

    “확실해?”

    “확실해요.”

    발목이 아픈 척 눈살을 찌푸리던 세이나는 후작이 사라지자마자 싹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이라는 것 말고 확인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직감은 그 아이를 엘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디온의 꿈이지 않은가.

    ‘설마, 오늘이 디온과 엘렌이 처음으로 만난 그때?’

    “정말이군.”

    “어디요? 어디에 있어요?”

    “저쪽 구석에.”

    그가 가리킨 방향은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는 방향이었다. 모두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세이나는 어떤 신사와 여인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러 떠난 직후에야 엘렌을 찾을 수 있었다.

    어깨를 조금 넘는 짧은 금색 머리칼. 작은 몸. 어린 얼굴. 벽에 등을 기댄 그녀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면 찾지 못했을 것이다.

    “엘렌.”

    어린 엘렌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이윽고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춤을 추러 나간 후에도, 그녀는 계속 혼자였다.

    레이스 하나 달리지 않은 흰 원피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애꿎은 땅만 툭툭 차고 있다.

    평민 아이라도 옷장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흔하디흔한 복장이었다.

    “안 돼.”

    세이나는 라샤드에게 붙잡힌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내버려 둘 수는…….’

    홀로 있는 엘렌은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 곧 사라질 것처럼 흐릿하고, 존재감도 옅었다.

    창백한 뺨에 초점 없는 두 눈.

    이대로 쓰러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세이나는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디온은…… 엘렌과 여기서 만날 거예요. 아마도.”

    “그럼 더 엘렌에게 말을 걸면 안 돼. 일이 꼬일지도 몰라.”

    “네, 알아요. 알고 있어…….”

    엘렌과 디온은 여기서 외톨이라는 공통점을 찾게 된다. 그러니 엘렌은 계속, 혼자 두어야만 했다.

    세이나는 그 사실에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

    저렇게 불쌍하게 보이는 아이를 왜 아무도 알아차려 주지 않는 걸까?

    차마 보기 힘들어 시선을 돌리니 엘렌을 주시하고 있는 라샤드가 보였다. 세이나는 그가 잡은 자신의 손목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참으면…….

    “움직인다.”

    세이나와 라샤드는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엘렌은 더는 그 자리에 없었다. 바로 옆은 막다른 벽이니 갈 만한 방향은 오른쪽밖에.

    세이나는 달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막거나 말을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엘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있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 위. 적막만이 가득한 곳에서 그녀는 어느 한 점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긴 건 세이나와 라샤드가 급히 몸을 숨긴 직후였다.

    엘렌이 향한 곳은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였다. 그리고 그 테라스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너도 혼자구나?”

    은은한 달빛 아래. 작은 몸이 엘렌을 돌아보았다.

    그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방문자에도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푸른색 눈은 놀랍도록 차분했고, 꾹 다문 입은 고집스러운 인상이 있었다.

    이제 열 살쯤 되었을까. 수정처럼 빛나는 은발을 가진 소년은 묵묵히 엘렌을 바라보기만 했다.

    “옆으로 가도 돼?”

    “아니.”

    소년은 냉담하게 말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우물쭈물, 엘렌이 제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볼록 튀어나온 여린 볼이 뭐라 말할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혼자 있는 소년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단호했다.

    “왜……?”

    “혼자 있고 싶으니까.”

    “하, 하지만 혼자는 너무 외로운걸…….”

    소년은 더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엘렌은 테라스에 반쯤 기대 있는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나랑 같이 있자. 응?”

    그리고 이윽고 그의 바로 뒤까지 이르렀을 때.

    “야.”

    “으, 응……?”

    디온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꺼져.”

    * * *

    디온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 엘렌은 혼자 있던 저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지요.

    젖은 은발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치 그것이 눈물 같아, 세이나는 큰 안쓰러움을 느꼈다. 졸지만 않았다면 손수건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 저는……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 슬픈 눈동자. 디온 프라벨의 옛사랑 이야기는 매우 구구절절하고 슬펐다.

    오죽하면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었겠는가.

    그러나 이제 세이나는 과거의 그에게 묻고 싶었다.

    ‘가슴 절절한 옛사랑 이야기.’

    “내 말 안 들려? 꺼지라고.”

    ‘어, 어디 갔지……?’

    디온은 난간에 기댄 채 엘렌을 살벌하게 째려보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저런 눈빛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하지만 엘렌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겁을 먹어 버린 걸까. 아니면 맞서고 있는 걸까.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세이나와 라샤드는 엘렌의 심사를 좀처럼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도 하나,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엘렌도 보통이 아니네요…….”

    “그……렇군.”

    ‘역시 여주인공감이라는 건가.’

    이런 냉대와 시련에 맞설 줄 알아야 여주인공의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걸지도.

    달빛 속의 소년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호의적이라 할 수 없었다.

    만약 소년 대 소년이었다면, 세이나는 디온이 엘렌의 발목을 걷어차 버릴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눈길은 그토록 냉랭하기만 했다.

    “빨리 꺼져. 귀찮게 하지 말고.”

    “나, 나는…… 그냥 친구가 되고 싶어서…….”

    “하, 어이가 없네.”

    기가 막힌다는 듯, 한차례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은 세이나도 아는 디온이었다. 양아치 스위치가 여기서도 켜져 버렸나.

    ‘정말 엘렌이랑 싸우는 건 아니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디온의 표정이 바뀌었다.

    “잠깐만. 너…….”

    디온은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그리고 그제야, 엘렌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확 변해서 놀란 것이다.

    디온이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너. 이름이 뭐야?”

    “에, 엘렌…….”

    엘렌? 디온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엘렌은 두 손을 꽉 모은 채 그를 빤히 보았다.

    “너는?”

    그 대답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여기 있었군, 디온!”

    세이나와 라샤드는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들이 있는 복도 끝, 3명의 남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친 이는 그중 리더로 보이는 갈색 머리.

    그는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테라스에서 디온을 발견한 듯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세이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셀론 프라벨…….”

    꿈에서라도 만나기 싫은 작자가 꿈속에서 걸어오는 중이었다.

    현실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걸음걸이.

    10년 전의 그에게는 어려 보이는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셀론 프라벨은 선한 인상인 쪽이었다.

    짙은 눈썹과 둥근 눈매는 그를 다소 어리숙하게 보이도록 했고, 두툼한 손을 내밀며 하는 인사는 누구에게나 다정했다.

    방금의 목소리도 꾸짖는 듯한 사나운 외침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이나는 그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라샤드가 물었다.

    “셀론?”

    “네. 회장의 남동생이고…….”

    그때, 그가 그들의 앞을 지나쳤다. 기둥 뒤의 인기척은 전혀 못 느낀 듯했다. 다행스러운 상황에도 세이나의 화는 더욱더 짙어졌다.

    “재수 없는 놈이죠.”

    “한참 찾았잖아, 내 옆에 붙어 있으라고 분명히 내가 말했……. 그 애는 또 뭐야?”

    디온은 어느새 엘렌을 제 등 뒤로 숨긴 채 셀론을 쏘아보고 있었다.

    적개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하녀인가?”

    “너희랑은 상관없는 애야.”

    그것을 끝으로 한동안 대치가 이어졌다. 셀론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입술을 삐쭉대며 한참 어린 조카를 내려다봤다.

    시선은 뒤에 있는 소녀에게도 어김없이 닿았다. 곧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디온. 또 사고 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이번에는 나도…….”

    “너도 뭐?”

    “나도, 형님도 널 더는 후원해 줄 수 없어.”

    미묘한 단어에 세이나는 눈썹을 구겼다.

    형님이란, 분명 회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회장이 디온을 후원하고 있다? 그 말도 좀 이상하다. 그는 회장의 아들이지 않은가.

    왜 저렇게 남처럼 말하지?

    그 위화감을, 디온도 놓치지 않았다.

    “후원……이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멀찍이서 본 셀론은 세이나에게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여전히 좀 맹해 보이고, 순진하게도 보인다.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려다보는 자세는 아이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친절한 선생님 같다.

    그러나 그의 말은 ‘친절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너는, 그냥 자선 사업 같은 거라고.”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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