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러웠던 탓일까.
급조한 공작 부인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샤드가 너무 잘 대응한 건지, 아니면 ‘칼만 공작’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무거운 건지는 세이나도 알지 못했다.
웃는 낯으로 다가오니 이쪽도 웃으며 환영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차라리 의심하고 다가온다면 확 째려봐 주고 도망치듯 빠져나가 버리면 될 텐데.
그리고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고 싶었는데.
조금이라도 말을 붙이려고 다가오니 벗어나기도 여의치 않다.
흘러들어 오는 귀족들의 이름은 외계어처럼 들렸다.
이거, 제국에 평민보다 귀족이 더 많은 거 아니야?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아직 디온이 안 나타났잖아.”
일리 있는 대답에 세이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들은 많은 사람을 만났으나, 어디에도 은색 머리칼을 한 예쁘장한 소년은 없었다.
“조금만 참아. 춤이 시작되면 관심도 달아날 테니까.”
“사이가 좋으시군요. 보기 좋습니다.”
라샤드가 낮은 목소리로 세이나를 달랬을 때, 앞에 서 있던 귀족이 말했다.
곧 옆에서 동의한다는 듯 끄덕이기 시작했고, 세이나는 또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야 했다.
“호호호호호.”
그러자 옆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고, 세이나는 라샤드를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야 했다.
잠시 후, 그의 말대로 사람들이 물러나는 타이밍이 찾아왔다.
후작과 후작 부인을 시작으로 귀족 남녀가 한 쌍씩 손을 잡고 연회장의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세이나는 라샤드가 내민 손을 보고 어이가 없어 물었다.
“나도?”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를 보는 시선이 하나, 둘, 셋, 넷……. 그래도 믿기지 않아 묻게 된다.
“생일 주인공도 아닌데?”
“갑자기 나타난 와중에, 참여하지 않으면 연회에 불만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진짜 미치겠네.”
“자연스럽게. 세이나.”
자연스러움, 세 번만 더하면 쓰러지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며 세이나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연회장의 가운데에 서자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은발 머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저……. 춤 못 춰요.”
학교에서 배우긴 했지만, 딱 한 번밖에 없었다. 그때의 평가는 최악.
교사는 지금껏 가르친 학생 중 우아함과 가장 멀다는 혹평을 남겼다. 세이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뭐, 다 잘할 수는 없지, 라고 하며.
“하아…… 꿈이라서 정말 다행이네.”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면 돼. 옆에서 하는 걸 참고해도 되고.”
세이나는 굳은 표정으로 끄덕인 후 고개를 들었다.
마주 본 라샤드는…… 마찬가지로 조금 긴장한 듯했다. 목소리가 너무 평소와 같아 괜찮을 줄 알았더니, 내려다보는 표정이 굳어 있다.
‘공작이라고 해도 초보자를 끌고 가긴 어려운 거겠지.’
그를 보니 더 긴장되는 것 같아 세이나는 시선을 내렸다.
제 양손이 어쩔 줄 몰라 치맛자락을 쥐고 있는 게 보인다. 안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것도 아주 잘 느껴졌다.
“이, 이제 뭐 하면 되죠?”
“……잠깐 실례하지.”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손이 허리에 닿았다.
아주 미세한 손길이었으나 세이나는 그곳이 찔리기라도 한 양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하는 사이, 라샤드의 다른 쪽 손이 움직였다.
그가 세이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조금 더 가까이.”
어쩐지 공기가 더 더워진 것 같았다.
* * *
세이나는 묻고 싶었다.
‘오웬, 아직 미치지 않았죠?’
잔잔한 음악으로 시작된 춤은 어느새 중반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세이나는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열심히 눈치를 살폈다.
첫 중간 이탈자가 되는 용기는 차마 내지 못했다. 라샤드의 어깨 너머에 있는 귀족 영애들이 저를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그나마 드레스가 풍성해서 다행이었다.
세이나는 첫 스텝부터 라샤드의 발을 꾹 밟아 버렸다. 다음에는 멀어지는 동작이라 괜찮았지만, 그다음, 다음에도 꾹꾹 아주 잘 밟았다.
그럴 때마다 당황해서 고개를 푹 숙이다가, 그건 또 자연스럽지 않은가 싶어서 눈알을 굴리게 된다.
힘들게 얼굴을 들었을 땐 라샤드가 웃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나 놀리는 거 아니죠?”
“그냥, 재미있어서.”
그다음 스텝은 일부러 밟은 게 맞았다.
라샤드가 확 눈살을 찌푸렸고, 세이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다시 그에게서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그래도 하다 보니 재밌는걸?’
오늘 이 자리에 그 댄스 선생이 있었다면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그녀는 스스로 생각해도 꽤 잘 추고 있었다.
가장 큰 공로를 따지자면 자신의 눈썰미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옆에 있는 후작과 후작 부인은 참고하기에 아주 좋은 본보기였고, 세이나는 후작 부인의 동작을 뒤이어 따라 하며 분위기에 맞춰 가고 있었다.
라샤드의 리드도 매우 훌륭했다.
거기다 ‘어차피 꿈속’이라는 확신에서 피어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세이나의 몸에 활력을 심어 주고 있었다.
틀린 동작이라도 당당하면 티가 나지 않는 법이다.
그리하여 세이나는 후작 부인이 하듯 느린 턴까지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라샤드가 그녀의 손을 이끌며 미소 지었다.
“잘하고 있어.”
“배운 적은 있으니까요. 한 번 더 해 볼까요?”
그가 끄덕였고, 세이나는 후작 부인을 한 번 더 참고했다.
저렇게 느리게 돌면서 멀어지고, 똑같은 스텝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겠지.
그녀는 후작 부인이 하는 그대로 따라 했다.
먼저 왼발을 앞으로 떼고, 오른발을 멀리 가져가며 몸을 돌렸다.
드레스 자락이 확 들뜨면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 번 더 돈 후에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면…….
라샤드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제멋대로 발을 옮기던 세이나는 어느새 한껏 멀어진 라샤드를 보며 크게 당황했다.
자신감은 때론 독이 되기도 했다. 저에게서 적어도 다섯 걸음은 더 떨어진 라샤드를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몸도 뻣뻣해졌다. 그냥 이대로 자연스럽게 돌아서 가면 될 것을. 세이나는 그마저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빠른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가 버렸다.
총총 걸어가면서도 세이나는 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명백하게 이상한, 춤동작과는 거리가 먼 걸음이었다.
겨우 그의 앞에 다가섰을 때, 라샤드는…….
“푸흡.”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 우, 웃지 말아요.”
“풉. 미안. 그런데……. 큭…….”
라샤드는 다가온 세이나의 손을 감싸면서도 끅끅대었다. 그게 못마땅해서 어깨를 툭 때려 봤지만 그의 몸은 앞으로 더 쏠리기만 했다.
춤을 추는 중이 아니었다면 배를 잡고 웃고 있지 않을까.
‘미쳤어, 세이나 로힐. 왜 그랬어.’
세이나의 상태도 썩 좋진 못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쿵쿵쿵.
이러다가 터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 지경이다. 너무 창피해서 죽은 사람 혹시 있을까. 아니면 내가 그 첫 번째 스타트를 끊게 될까.
다행히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봤지만 이상하게 보는 눈빛도 없었다.
꿈이라서 그런 걸까. 꿈이라서 그런 것 같다. 이건 꿈이다. 다 꿈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민망한 거지.
“그만 웃어요……!”
그는 이제 어깨까지 떨고 있었다. 와중에도 발을 움직이며, 어떻게든 춤을 이어 가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세이나는 잔뜩 심통이 나서 그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이제 거의 그녀의 어깨에 닿을 듯한, 바로 그 얼굴 말이다.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세이나가 투덜거렸다.
“못됐어.”
“미안해.”
“잘못한다고…… 했잖아요.”
“미안해. 화내지 마.”
어느새 라샤드는 세이나를 거의 달래고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세이나는 차마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피식 웃는 소리에 다시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렸다.
‘하, 망할. 왜 설쳐서는.’
아무래도 이 꿈은 이상한 게 틀림없다.
평소라면 춤 따위, 즐기지도 않았을 텐데. 왜 신이 난 건지.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오웬이 미쳤다는 징조인 걸까.
그래서 세상이 뒤틀리고 나도 이상해지나? 아니면 오웬이 아니라 내가 미쳐 가는 건가?
너무 혼란스러워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라샤드는 계속 미소만 흘렸다.
그게 또, 꽤 잘나 보여 세이나는 급히 시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다 또, 그의 발을 밟아 버렸다.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라샤드가 앞에서 잡아 주지 않았다면 아마, 바로 확 앞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세이나는 거의 그에게 안겨 있었다.
“이건.”
그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눈에 너무 띄는데.”
오웬이 미쳤구나.
세이나는 결론지었다.
점점 두근거림이 거세지고 있었다.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야. 고작 몇 걸음 내딛고 있을 뿐인데, 세이나는 힘껏 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춤은 또 언제까지 춰야 하지?
생각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맞잡은 손은 너무 뜨겁게만 느껴졌고, 허리의 손이 지나치게 의식되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도 모르겠다. 위는 너무 부끄럽고, 아래도 이상하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이건 다 꿈이야.’
세이나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이건 꿈이야.”
그리고 한 번 더.
“이건 꿈이지.”
돌연 낮은 음성이 들렸다.
세이나는 조금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가 라샤드와 다시 마주쳤다. 어느새 완전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럼 깨어나면 전부 잊게 되는 걸까.”
이상한 질문이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