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럴 만하다고도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입는 옷이 더 비싸 보이고-일단 옷이 크다!-, 장식도 많이 달려 있다.
공작 각하께서는 연회장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하긴, 귀족들은 다들 그렇지.’
그래도 그럭저럭 연회 시간에는 맞출 수 있었다.
세이나는 의상실 앞으로 온 근사한 마차를 바라보며 라샤드에게 물었다.
“……제가 이렇게나 많이 뜯어냈던가요.”
“응.”
꿈속의 불량배들에게 사과를 속삭이며, 세이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 역시 처음으로 겪는 것이라 얼떨떨하기만 했다. 마차는 덜컹대지도 않고 매끄럽게 출발했다.
잠시 후, 그녀는 도망쳐 나왔던 으리으리한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앳된 얼굴의 시종은 그들이 오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공손히 인사해왔다.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때, 세이나는 제 처지를 잊고 흠칫 몸을 떨었다.
라샤드가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바로 “아!”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가 반대쪽 손으로 세이나의 손등을 감싸며, 시종에게 말했다.
“내가 급하게 떠나와서 미처 챙기지 못했군.”
“아. 그럼 죄송하지만, 신분을 증명하실 물건이 있으실까요?”
라샤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세이나의 눈에 그것은…… 옷에 거는 장신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는데, 옷에 달기에는 너무 컸던 까닭이다.
그것은 라샤드의 손바닥을 가득 채우는 크기였다.
교차된 3개의 검은 각자 모양이 달랐고, 그들이 모이는 점에는 쇠사슬이 감겨 있다. 양쪽에는 역시 생김새가 다른 용이, 뒤에는 금색 줄도 달려 있다.
신기하여 유심히 들여다보는 세이나와 달리, 시종은 바로 그걸 알아본 듯했다. 그의 눈이 대번에 튀어나올 듯 커져 버렸다.
“이거면 되나?”
시종은 바로 몸을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공작 각하.”
라샤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세이나를 곁눈질했다.
‘봤지?’라는 의미였다.
‘아, 감옥 이후로 뭘 가지고 다니기로 하셨군.’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으로 꿈속에 들어왔다. 그러니 늘 가지고 다니던 물건들도 그대로 꿈으로 함께 들어온 셈이다.
세이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다시금 시종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종이 벌벌 떨며 그녀에게도 공손히 인사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말하면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칼만 공작 부인.”
세이나는 무심코 물어 버리고 말았다.
“……저요?”
* * *
칼만 공작의 방문은 연회장에 큰 파문을 가져왔다.
가장 놀란 이는 당연히, 트라본 후작이었다.
후작의 영지는 제국에서도 최남단.
후작은 딱 1년에 한 번 신년에 인사차 수도에 들를 뿐이었다.
제국의 세 공작가 중, 따지고 보면 그는 칼스타드 공작과 더 인연이 있었다. 부탁이 있어도 그쪽을 통했지 칼만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
아니, 이렇듯 만나니 얼굴을 알고 있다고 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트라본 후작은 미끄러지듯 연회장 입구까지 달려 나와 라샤드와 세이나를 맞이했다.
“가, 각하께서 허억, 여기까지, 헉, 헉, 어쩐 일로…….”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의 후작은 불쌍하게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급하게 달리느라 헉헉대는 숨소리가 참 애달프게 들렸다.
반면 라샤드는 몹시 태연했다.
“내가 오면 안 될 곳을 왔는가?”
“아, 아닙니다! 너무 예상치 못했던 터라. 트라본에, 허억, 트라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각하.”
“그래.”
“그런데…… 정말 이 먼 곳까지는 어쩐 일로?”
“여행이네.”
후작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여행이요?”
칼만 공작 각하께서는 매우 뻔뻔스러웠다. 눈썹 하나도 꿈쩍하지 않고 냉엄한 시선으로 계속 그를 째려보기만 했다.
세이나의 식으로 해석하자면, ‘내가 여행이라면 여행이지 웬 잔말이 많아?’ 눈빛 되겠다.
그리고 후작은 ‘여행 중에 연회에 들르신다고요? 그것도 제 딸 생일 파티에?’이었다.
치열한 눈싸움의 공방 끝에 먼저 꼬리를 내린 이는 후작이었다.
그는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
“미, 미력한 힘이지만 성심껏 돕겠습니다.”
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공작쯤 되는 사람이 딸 생일 파티에 관심을 가질 리 없고. 용무가 있는 사람은 자신인데 미리 언질도 없었으니.
후작은 공작이 거부하지 못할 부탁을 하리라고 예상한 것이다.
제법 명석한 추리였으나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정말 축하를 위해서 왔네.”
“아, 네. 네? 아…… 예, 예에…….”
후작은 계속 의아해하는 얼굴이었으나 더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공작이 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의심이 가득한 시선이 라샤드를, 그리고 세이나를 번갈아 옮겨 다녔다. 뻔뻔스러운 공작 내외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결국, 할 말이 떨어진 그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자리를 떴다. 멀어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는 게,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이다.
어디 후작뿐일까.
좌중의 모든 집중을 싹쓸이하며, 세이나는 숨을 참고 있었다.
위엄 있는 귀족 따위, 꿈에서도 해 본 적 없다.
마물을 보듯 무섭게 노려보려 했으나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모두 못 본 척하자니 얼굴이 너무 따갑다.
눈 부신 불빛. 화려한 차림새의 귀족들. 수군대는 목소리들까지 모두 너무 선명했다. 갑갑한 공기도 마찬가지였다.
연회장 안은 밖보다 훨씬 덥게 느껴졌다.
꿈 주제에 왜 이렇게 생생한 건지!
“괜찮아?”
정신이 들었을 땐 어느새 창가 옆이었다. 세이나는 라샤드가 내민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혀가 마비된 것 같다. 뭔가 스쳤을 뿐, 달콤함도 차가움도 없었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거 이상해요.”
“꿈이라 그런 거겠지.”
그러나 라샤드는 세이나와 달리 몹시 침착했다. 이토록 많은 시선을 받는데도, 불편한 기색도 없고 당황도 없다.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혹시 이 성이 그의 집이라고 착각하지 않을까.
단언컨대, 그는 이 화려한 연회장에 가장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리고 가장 돋보이기도 했다.
“이거, 오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진 않겠죠?”
“귀족이 연회장을 방문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없지.”
“그건 그렇긴 하네요.”
그러고 세이나는 창틀에 살짝 걸터앉았다.
어쩐지 다리에 힘이 없고 피곤했다.
‘연회장은 다 이런가? 어쩐지 기가 빨리는 느낌이야.’
지쳐 한숨을 뱉으려던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방향에는 한 무리의 귀족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들의 대화는 너무나도 잘 들렸다.
“칼만 공작이 왜 여기까지 온 걸까요?”
“칼스타드 공작을 견제하기 위함이겠죠. 욕심도 많지! 그 넓은 영토를 갖고 있으면서!”
“뭐 어때요, 저렇게 잘생겼는데! 어쩜 저렇게 완벽하시지! 너무 멋있으시지 않아요?”
“네. 듣던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네요.”
“부인께서도요. 마흔이 다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저런 인상이셨던가요?”
“제가 방금 후작께 묻고 왔어요. 여행길이라고 하시던데?”
“네? 여행이요?”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칼만 공작께서 독살당할 뻔했다고 들은 적이…….”
세이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와, 진짜 책에서나 보던 거네.’
사람 빤히 보고 있는 자리에서 독살 운운하다니. 영애들의 뒷담 스킬이 보통이 아니다.
세이나는 맛도 없는 음료를 마시며 라샤드를 살폈다. 그는 다행히도 영애들이 아닌, 다른 지점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중얼거렸다.
“온다.”
“네?”
그가 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웬 청년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달려오는 듯 빠른 속도였다.
그녀가 창틀에서 일어섰을 무렵엔 이미 주변이 귀족들로 가득했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저는 세자르 오스룬이라고 합니다. 와인 백작이라고 하면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제 영지 오스룬은 질 좋은 와인이…….”
“각하, 혹시 다음 여행지는 고르셨습니까? 제 조부께서 계시는 라스벤카는 어디서도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멋진 휴양지로…….”
“알레한드라는 삼국의 상인들이 모여드는 요충지지요. 바다 건너 대륙은 물론, 흰색 산맥 너머의 물건들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알레한드라에 한번…….”
“혹시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앨든 남작성? 사비에르 백작가? 아, 두 분 모두 안 보이시네요. 같이 오지 않으셨습니까?”
오, 세상에. 말의 파도가 지나가네.
세이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말 빨리하기 대회라도 하는지. 1명이 끝나면 다른 1명이 바로 받아쳐서 질문 공세를 시작한다.
그중 가장 놀라운 사람은 라샤드였다.
“두 사람 모두 급한 일이 있어 오지 못했네. 백작의 노모가 병상에 있는 건 자네도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
“저런, 아직도 그 병으로 고생하고 계시는군요. 그럼 공작께서는 대신…….”
라샤드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귀족들의 공세(?)를 받아쳐 냈다.
세이나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여기며 갸웃거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 보아 그가 잘 해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칼만 공작님께서는 이런 상황에 너무 익숙한 듯했다.
그가 잘 해내고 있었기에, 세이나가 할 일은 그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이제 점점 힘들어진다.
입꼬리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영지에 방문해 주시면 가문의 영광일 겁니다. 공작 부인.”
“호호호. 생각해 볼게요.”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공작에게 집중하느라 공작 부인은 잊어버리는, 그런 무례함은 벌이지 않았다.
덕분에 세이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부채로 입을 가리며 기품 있는 척해야 했는데, 이게 참 맞지도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제 처지도 잊고 결국 속으로 이렇게 외치게 된 것이다.
‘왜 아무도 내가 공작 부인이 아니라는 걸 못 알아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