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83화 (83/179)
  • #83

    “현실이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않았군. 디온이 모르는 곳은 저렇게 되어 있는 모양이야.”

    “네. 기억이라는 게 왜곡될 수도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조금씩 섞인 풍경이군요.”

    그사이 검은 안개 속에서 사람들이 몇 명 더 튀어나왔다.

    세이나는 그중 어깨 보호대를 한 청년에게 주목했다. 뿔이 잔뜩 달린 디자인.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형식이었다.

    “영주 성으로 돌아가야겠어.”

    “네, 거기에 디온이 오는 게 확실해요.”

    결론이 나왔으나 쉽게 걸음이 떼어지진 않았다.

    눈썰미 좋은 하녀장은 그들이 바로 외부인임을 알아보았다. 이대로 돌아가도, 침입자라고 여기며 기사들에게 잡힐지도 모른다.

    “돈이 필요해.”

    “네?”

    “연회장에 들어가는 것 말이야. 손님처럼 위장해 들어가는 거지. 다행히 저기, 제대로 남아 있는 의상실이 있어. 저기서 옷을 사면 될 거야.”

    라샤드의 제안은 썩 그럴듯했다. 세이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음, 그렇지만, 우린 초대장이 없는걸요?”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확신에 차 있는 어조였다. 세이나는 다시 고민에 잠겼다.

    돈. 돈이라.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

    하나 있긴, 하다.

    “여기는 꿈이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그리고 구현되지 않은 곳도 많을 거고.”

    “그, 렇지?”

    그녀는 그러고 도로를 점거한 검은 안개를 노려보았다. 사람들이 또 나오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들 중에는 세이나 쪽이 아닌, 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주 좁고, 어두운 곳이었다.

    세이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를테면, 치안대 같은 곳 말이죠.”

    잠시 후.

    세이나가 주시하던 골목길 위. 한 쌍의 커플이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좁은 골목은 낮임에도 어두웠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그들은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저기서 누군가 튀어나올지도 몰라!”, “꺄악 무서워!” 하는 장난스러운 대화도 이어 갔다.

    정말 누군가 튀어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가진 것 다 내놔!”

    돌연 튀어나온 불량배가 그들에게 나이프를 들이밀었다. 그 뒤에 덩치 큰 사내가 둘이 붙자, 남녀의 안색이 동시에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등장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불량배들의 뒤, 또 다른 그림자가 다가서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에 금색 눈동자. 민첩하게 달려든 여자는 불량배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그리고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억! 윽! 커흑!

    한 불량배의 목에 단검이 닿았을 때, 남녀는 이미 줄행랑을 친 이후였다. 여자가 외쳤다.

    “가진 것 다 내놔!”

    “드, 드리겠습니다!”

    세이나는 복면 아래에서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불량배들을 두들겨 패는 일은 현실에서처럼, 아주 즐거웠다.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완전히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기합을 지르며 달려드는 사내를 볼 때는 희열도 느꼈다. 오, 미친. 나 변태인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가 쓰러졌을 땐, 세이나는 내숭(?)도 잃고 잔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꿈 짜릿해! 완전 최고다!

    결국. 라샤드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지.”

    “아, 조금만. 조금만 더…….”

    “옷을 맞춰 보고 장신구도 사려면 시간이 꽤 걸려. 빨리 따라와.”

    “저놈! 저놈만!”

    “하, 내가 없었으면 오웬이 정말 미칠 때까지 이러고 있었겠군.”

    덕분에 마지막 남은 불량배는 제 안면을 지킬 수 있었다.

    무릎을 꿇은 그가 라샤드를 영웅처럼 칭송하는 것을 보며 세이나가 입맛을 다셨다.

    “아, 저 녀석. 마르셀 닮았는데.”

    “그만.”

    “응? 저 녀석만 마무리하고! 네?”

    “아아안 돼.”

    그러나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끌고 가는 부모처럼 라샤드는 매우 단호했다. 세이나는 그에게 반쯤 끌려 골목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의상실에 도착한 후에도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 그 녀석. 진짜 마르셀 닮았는데.’

    직원들이 옷을 입혀 주는 와중에도 세이나는 골목길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땐 잘 몰랐는데, 계속 고민해 보니 정말 마르셀을 닮았다. 아니, 마르셀인가? 마르셀이다!

    이 개애자식! 딱 기다려라! 내가 당장 100만 루펜 만큼의 주먹을……!

    “다 되었습니다.”

    “……네?”

    “한번 걸어 보시겠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옷을 다 입은 상태였다. 세이나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끌어 올리고 어기적어기적 직원의 앞까지 걸어갔다.

    커다란 거울 속. 짙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목선부터 쇄골까지 드러나는 디자인. 하지만 가슴까지 파여 있지 않아 불편함은 없었다. 네크라인부터 명치를 지나 아래까지 금색 자수가 화려하다.

    ‘군데군데 달린 건 보석인가?’

    팔을 움직이니 치렁치렁한 소매가 따라온다. 치마 아래까지 장식된 금실과 보석들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색해.’

    태어나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종류의 옷이었다.

    거울 속 자신이 너무 낯설다.

    “어머, 맞춘 듯이 딱 맞네! 샘플로 만들어 둔 거라 걱정했는데 잘됐네요!”

    그러나 직원들은 제 옷을 찾은 사람들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여기, 여기까지도 걸어와 보세요!”라는 말에 뒤뚱뒤뚱 걸어가자, 또 박수가 나왔다.

    “잘 어울려요! 너무 예뻐!”

    장사꾼들이 팔아넘기기 위한 입에 발린 말인 걸 알면서도, 괜히 부끄러워진다. 세이나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여기저기 뜯어보았다.

    ‘……입구에서 쫓겨나진 않겠지.’

    직원들은 곧 드레스에 어울리는 화려한 구두도 내왔다. 굽이 그리 높지 않고 발에도 딱 맞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가격이었다.

    ‘꽤 비싸 보이는데.’

    얼마를 뜯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얼마나 통쾌하게 때렸는지만 각인했을 뿐. 돈은 아마도, 공작님께서 챙기셨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차례차례 사람들을 쓰러트리는 그녀의 뒤를, 라샤드가 졸졸 따라다니는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마치 어느 명화의 이삭줍기 같지 않았을까.

    ‘그것도 못 봐서 아쉽네.’

    쿡쿡 소리 죽여 웃는 그녀를 직원이 조심스레 이끌었다. 두꺼운 천이 걷혔고,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거울과 거울, 그리고 화려한 의상들이 벽을 따라 세워져 있다.

    어느 평화로운 풍경화 옆에서, 세이나는 근사한 미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이제 막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옷이 불편한지 미간을 좁히고 소매를 잡아당기며 걸어오고 있었다. 눈빛은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어머!”

    세이나를 따라 나온 직원이 감탄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발걸음들이 멈추었다. 뚝. 뚝. 뚝. 뚝.

    마지막은 세이나의 것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물었다.

    “공작……님?”

    그러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짧은 동작은 세이나에게 아주 길게만 느껴졌다.

    냉담해 보이는 붉은 눈이 자신을 향하고,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이 움직였다. 그가 말했다.

    “세이나.”

    ‘누가 남주인공 아니랄까 봐.’

    그저 어두운색 정장일 뿐이다. 이것저것 많이 붙어 있는 세이나에 비하면 그의 차림은 다소 평범한 축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쉽게 눈을 떼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눈썹에서 높은 콧대까지 이어지는 선은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기에는 아주 우아한 분위기다.

    거기다 날카로운 눈매나 매끈한 턱선. 어쨌든 얼굴이나. 얼굴. 그리고 얼굴과 또 얼굴이.

    완벽하다.

    “어…… 음. 잘 어울리네요.”

    “너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세이나는 다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공작님, 맞지?’

    우리 요리사가 저렇게 근사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그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다가서는 얼굴을 세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시했다.

    분명 아는 얼굴인데. 공작이 맞는데.

    ‘왜, 왜 이렇게 낯설지.’

    그가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머리도 부탁하고 싶은데.”

    “저희가 해 드릴게요!”

    직원들은 라샤드의 말에 앞뒤를 다투며 세이나에게 달려왔다. 익숙지 않은 사람들의 사이에서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한 직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

    “머리는 올리시는 편이 더 어울릴 거예요. 이렇게 올려서…… 여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고정하고, 보석도 얹는 거죠!”

    “그건 그만두지.”

    꽤 단호한 거절에 바로 머리를 잡은 손이 풀려 버렸다.

    세이나는 큰 아쉬움을 느꼈다. 머리를 올린 거울 속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던 탓이다.

    “아, 빨리 가야 하긴 하죠. 올린 머리는 오래 걸릴 거고…….”

    “아니.”

    다시 단호한 말이 튀어나왔다. 세이나가 의아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라샤드는 바로 그녀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가 입을 가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무 눈에 띌 거야.”

    결국, 머리는 반묶음으로 타협되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꽤 시간이 걸렸다. 모두 라샤드 때문이었다.

    그는 직원들이 화장하는 동안에도 내내 간섭했다. “눈에 띌 거야.”, “눈에 띄어.”라는 식으로 태클을 걸어서 진행하기가 퍽 힘들었다.

    대체 무슨 의미냐고 홱 쏘아보면, 시선을 피해 버리니 대화하기도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직원들이 울상으로 “정말 예쁜데…….”라고 투덜거렸고, 그들을 달래는 건 세이나의 몫이었다.

    어떤 직원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동행분이 질투가 심하시네요.”

    세이나는 이렇게 알아들었다.

    ‘아, 자기보다 더 예뻐 보일까 견제하는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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