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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82화 (82/179)
  • #82

    자리에서 일어나니 주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뒤덮을 듯 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날씨는 쾌청. 시간은 정오 정도.

    ‘분명 밤이었는데?’

    무심코 디딘 손끝에 물기에 젖은 잔디가 스쳤다. 그럼 장소는 숲인 걸까. 혹은 정원?

    그 감각이 어쩐지 생경하여 다른 손을 움직이려던 그때,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가 만든 그림자 속. 흐트러진 미남이 쓰러져 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 아래 들어간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다. 깎은 듯 곧은 콧날과 인중, 얇은 입술은 살짝 열려 있었다.

    세이나는 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공작님?”

    그러자 스르륵 눈꺼풀이 열렸다. 그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를, 세이나는 더욱 고개를 숙여 유심히 관찰했다.

    봐도 봐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작님…… 맞네?”

    “세……이나?”

    “네, 저 맞는데요. 그게, 흐음…….”

    왜 내가 공작님이 여기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까?

    아직 머리가 어지러웠다.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세이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아프면, 꿈은 아니라는 건데.

    ‘꿈?’

    그 단어가 방아쇠가 되어 가라앉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이나는 황망하게 좌우로 고개를 움직였다.

    ‘이건 꿈이야! 디온의 꿈!’

    그러나 꿈이라고 하기엔 주변이 너무 현실감 있었다.

    오웬과 함께 들어갔던 전생의 꿈과는 확연히 달랐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 따뜻하다. 멍한 얼굴로 또다시 팔을 뻗어 보자, 거친 나무 질감이 만져졌다.

    선명한 감각에 왠지 소름이 끼쳤다.

    “으윽, 머리가 너무 아파. 여기가 어디…….”

    마찬가지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라샤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세이나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지금까지보다 더 빠르고 날렵하고.

    아픈 손길이었다.

    라샤드는 제 볼을 꼬집고 있는 세이나를 보며 표정도 없이 물었다.

    “……뭐 해?”

    “아파요?”

    그가 끄덕이며 말했다.

    “아파.”

    “어, 그, 그럼 이게 대체…….”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네가 힘들어 보여서 널 잡았는데.”

    “따라 들어온 거예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세이나의 눈이 커졌다. 라샤드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제 입가를 매만졌다.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런 것 같아.”

    서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세이나는 라샤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라샤드는 난감함을 느꼈다.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 속에서, 겨우 나온 말은 그의 최선이었다.

    “들어가는 대상을 잡으면 함께 들어가는군.”

    “오웬!”

    느닷없이 벌떡 일어난 세이나에, 이번에는 라샤드가 크게 놀라 버렸다. 그녀는 라샤드가 당황하는지, 놀라는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오웬!?”

    허공에다 대고 외친 부름은 메아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세이나는 한 번 더 고함을 질렀다. “오오오웨에에엔!?”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하늘에서 울리는 계시도 없고,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도 없다.

    그러고 보니, 이쪽과 저쪽의 의사소통 방법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다.

    오웬은 자신을 ‘통로’에 비유했다. 그를 통해, 디온의 정신 안으로 자신은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1명이 더 끼어 버렸다.

    그럼 통로가 세 갈래가 되는 건가? 부담이 심해지는 건 아냐? 그래도 괜찮나?

    ‘뭐야, 어떻게 되는 거냐고.’

    “들어오게 될 줄 몰랐어. 네가, 힘들어 보여서 나도 모르게…….”

    “괘, 괜찮겠죠?”

    라샤드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세이나도 덩달아 침울해졌다. 그러나 잠시였다.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라샤드를 보며 말했다.

    “이 세계는 디온의 꿈이에요.”

    너무 현실감이 짙지만.

    “일단…… 디온을 깨우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디온을 깨워야 우리가 나갈 수 있는 건 변함없어요.”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세이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웬이 제대로 설명 안 한 것도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런데, 여긴 대체 누구 집일까요? 수도에 이런 건물이 있었나?”

    그때였다.

    “빨리! 빨리 움직여!”

    엄격한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머리를 빼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생일 선물들은 이쪽으로! 조심히 다루도록 해! 선물들을 열어 보는 건 이 연회의 하이라이트라고! 어디 부서지거나 찌그러트려서 괜히 아가씨 심기 거스르지 말고!”

    목소리의 주인은 늠름한 풍채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제각기 다양한 물건을 든 하인들이 일개미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꽃이 든 커다란 화병, 수레, 상자, 테이블, 의자, 흰 천, 식기…….

    “생일 연회 준비 중인 것 같군.”

    라샤드가 그렇게 말했을 때,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준비는 잘되고 있나?”

    중년 부인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맞이했다.

    위태롭게 높이 쌓은 머리 스타일을 한, 거기에 번쩍거리는 보석까지 박고 있는 귀족 여인이었다.

    드레스는 멀리서 봐도 아주 비싸 보였다. 뒤에는 어린 하녀들이 둘이나 따르고 있었다.

    “트라본 후작 부인?”

    그녀의 정체는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세이나가 라샤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확실해요?”

    “그래. 아주 젊지만 확실해.”

    “그럼 이 꿈은 옛날의, 트라본 후작 영애의 생일 파티로군요.”

    어쩐지 저택이 어마어마하더라니. 트라본 후작의 성안이었던 모양이다. 세이나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국의 개국 공신 가문의 저택으로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남부에 그들의 손이 뻗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던가.

    트라본 후작 부인과 하녀장-세이나는 중년 여인의 정체를 이렇게 추리했다-은 꽤 오랫동안 서성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모두 생일 연회에 관한 내용이었다. 많은 손님이 이곳을 방문할 것이며, 딸아이도 무척 기대하고 있다는 이야기.

    더하여 딸아이 또래의 귀족들도 모두 초대해 부른다는 말도 있었다. 아이들이 술 가까이에 가지 못하도록 잘 관리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아이들이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하인들을 잘 준비시켜.”

    “예, 물론입니다. 마님.”

    트라본 후작 부인의 뒷모습을 보고 세이나가 중얼거렸다.

    “일단 저기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여기에 떨어졌다는 건, 꿈의 주무대가 이 저택이라는 뜻이었다. 사건은 저녁, 파티에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하인으로 위장해서 침투할까?’

    고민하던 세이나의 눈에 다시 하녀장이 들어왔다.

    마님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그녀의 얼굴에는 비장함까지 감돌고 있었다.

    곧, 그녀가 아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메리! 더 조심하라고 했지?! 부서지면 매질을 당할 줄 알아!”

    “제롬! 좀 더 팔을 높이 들으란 말이야!”

    “애런! 천이 바닥에 끌리고 있잖아! 제대로 하지 못해!?”

    “샘슨!”

    “사뮤엘!”

    놀랍게도 하녀장은 이 집안의 하인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마님의 등장으로 책임감이 더욱 강해진 하녀장은 제 앞을 지나는 하인들의 이름을 모두 불렀다.

    “로안나!”, “나탈리!”, “해든!”,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하인들은 움찔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주 엄격한 감독관이 따로 없었다.

    “응? 거긴 또 뭐야?”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세이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험악하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침입자다!”

    그러자 하인들의 시선이 바로 쏠렸다.

    “침입자?”, “저것들 잡아!” 하는 우렁찬 외침이 그들의 뒤를 따랐으나, 하인들의 손에는 무거운 물건들이 한가득하였다.

    세이나는 라샤드를 끌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어디로 갈까? 고민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들킨 거! 당당하게 정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하아, 하아, 무슨…… 하녀장이……. 헌터보다 더 빠르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괴롭게 내쉬며, 세이나는 허리를 굽혀 무릎을 짚었다. 옆에 선 라샤드도 지쳤는지 헐떡이고 있다.

    그들은 이제, 도심 속의 거리에 있었다.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 건물들이 잔뜩 들어서 있다. 카페, 옷가게, 도구점, 책방……. 오가는 이들의 수도 꽤 많은 걸 보니, 아주 번화한 도시인 듯했다.

    사람들의 의복도 얇고 가벼운 소재였다.

    무더운 여름. 세이나는 이곳이 자신이 있던 세계와 다른 곳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등에서 땀이 흐른다.

    “너무 현실적이라 불쾌할 정도네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

    “네?”

    “저기.”

    마찬가지로 땀을 훔치던 라샤드가 한쪽을 가리켰다.

    방금 세이나의 곁을 지난 마차가 향한 방향이었다. 4마리의 말에 제법 잘 차려입은 마부까지 있는, 확실하게 귀족이 탄 마차였다.

    그러나 한 번 눈을 깜빡하자마자 그 마차는 사라져 버렸다.

    세이나는 도로 끝에 있는 검은 안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는 절대 안 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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