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세이나는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일어났어요?”
주변은 삭막한 창살들이 가득했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 오렌지색 빛을 든 사내를 보며, 세이나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디온?”
“네. 몸은 어때요?”
그녀는 급히 제 몸을 살폈다. 팔도 이상 없고, 다리도 괜찮다. 숨이 헐떡이거나 차오르지도 않았다. 모두 멀쩡했다. 머리를 제외하고.
“그냥, 좀…… 어지럽네요. 내가, 그러니까.”
기억을 되짚던 세이나는 소름 끼치는 기분을 맛보았다.
“트럭!”
그녀가 다시 제 몸을 짚어 보기 시작했다.
깨진 곳 없고, 부서진 곳 없고, 손이 닿아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아서 계속 들여다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만진 곳은 목이었다. 펄떡펄떡 뛰는 맥박이 손끝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 살아 있네요?”
“물론이죠.”
돌아왔다.
그걸 깨닫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집이었다면 바로 드러눕지 않았을까.
“오웬은……?”
마침 그때, 그도 깨어났다.
“허억!”
오웬은 세이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크게 어깨를 떨었다. 크게 확장된 눈에는 아직 충격이 가득 남아 있었다.
“세이나, 그, 어, 괜찮아요?”
“네! 돌아왔어요!”
“돌아……?”
“현실이에요! 그건 꿈이었고!”
“하,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오웬은 그리 중얼거리며 제 입가를 쓸어내렸다. 그러고도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는지, 이마를 짚고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세이나는 걱정스러웠다.
우는 건가?
“책상에 방범 마법이 걸려 있었던 듯합니다. 물건을 건드리는 순간, 수면을 부르는 연기를 뿜는 마법입니다.”
디온은 그의 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라서 금방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이 방을 방문하지 않았더군요. 증거품이 될 만한 자료는 여기. 마물도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그대로 공작님께 넘기죠.”
“……그 여자는요?”
그때, 느닷없이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악!”
계단에 나타난 세르본 부인은 당장 혼절할 것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일까. 그녀는 공격할 생각조차 못 한 듯했다.
“너, 너희는 뭐야……! 어떻게 여기에!”
반면, 오웬은 달랐다.
갑자기 제 팔이 뒤틀리자 세르본 부인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몸이 계단 위로 쓰러지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거 놔!”
“세르본 남작 부인.”
그런 부인에게, 디온이 다가갔다. 그는 무릎을 접어 시선을 맞춘 후에 건조하게 말했다.
“마물을 수도로 들여와서, 금지된 실험을 이어 갔습니까?”
“그, 그걸……! 아니야! 난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없습니다. 여기 증거가 다 남아 있으니. 필기를 꽤 꼼꼼하게 하시는 편이시네요.”
“그건……!”
“마물의 마력으로 만든 마도구를 사람들에게 나눠 줘서 그 효과를 실험하고자 했겠죠. 급속 치유. 매혹. 수면. 환각. 종류도 다양하군요.”
“내가 아니야! 나, 나도 시켜서 한 거라고!”
“그리고 마물들에게 채워져 있는 구속구는 직접 만드신 것이더군요. 여기 설계도도 찾았습니다.”
부인은 더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사실상 인정이었다.
“그럼 그, 계약은 뭐죠?”
세이나가 그렇게 물었을 땐 이미 세르본 부인이 정신을 잃은 후였다. 불을 켠 듯 이글대던 눈이 스르륵 감기더니, 곧 그녀의 몸이 맥없이 쓰러졌다.
“어?”
“잠시 재웠습니다. 발버둥이라도 치면 골치 아파 지니까요.”
디온은 무심한 얼굴로 부인의 머리에서 손을 거두고 있었다. 오웬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직 물어볼 게 많은데.’
계약은 무엇인지. 추방당한 이후 마법을 못 쓰게 된 그녀가, 어떻게 마도구를 만든 건지. 그 뱀의 정체는 또 무엇이며…….
‘왜 라미아를 조사했지?’
세이나도 그 마물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까. 디온과 도서관에 갔을 때, 열자마자 보였던 바로 그 야설이 라미아와 관련된 연구였다.
사람을 유혹하여 생명력을 갈취하고, 제 노예로 부르는 마물.
‘……나중에 일어나면 물어봐야겠다.’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며칠을 새운 것 같은 피로함이 몰려왔다.
세이나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적당한 밧줄로 그녀를 묶은 후 움직이자고 제안할 참이었다.
그런데 디온의 옆에 서자마자 돌연 스산한 한기가 엄습했다.
놀라 옆을 돌아본 그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뱀이 그녀를 공격했다.
콰득!
그러나 날카로운 이빨이 물어뜯은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것이 달려들기 직전, 강한 힘이 그녀를 떠밀었다. 덕분에 세이나는 늦지 않게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디온은 신경질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거칠게 손을 떨치자, 검은 뱀은 맥없이 홱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상처는 깊이 남아 있었다. 세이나는 놀란 눈으로 제 앞에 떨어지는 검붉은 피를 바라보았다.
“아, 젠장.”
그렇게 중얼거리고 디온은 쓰러졌다.
* * *
사건은 예상보다 빠르게 일단락되었다.
오웬이 사람을 보냈고, 늦지 않게 라샤드가 저택으로 당도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아론과, 엄숙한 표정의 기사들이 따랐다.
라샤드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신음을 흘렸다.
“끔찍하군.”
“마물을 숨겨 운반하기 위해서 큰 짐마차들이 필요합니다. 세르본 부인은 기사들에게 넘겼습니다.”
“음, 그래. 잘했어.”
“꼼꼼한 여자라 고객 명단도 만들어 뒀더군요. 이걸로 마도구들을 회수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다. 사람들을 보내도록 하지.”
“인상이 험악한 사람들로 부탁드립니다. 헬트레일의 향에 취해서, 세르본 부인에게 충성하고 있으니까요.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마도구를 빼앗아서…….”
‘싫어할 땐 언제고 막상 하니 죽이 척척 맞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오웬이 말을 멈추고 세이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수도에 마물이 들어온 건 중요한 문제니까요.”
‘아, 그러셔.’
아직 칼만 공작을 의심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말씀하시던 게 누구시더라.
오웬은 그 생각도 읽은 모양이다. 그가 연거푸 헛기침하면서 세이나의 눈치를 살폈다.
비난이 아니라 그냥 놀리려는 의미였기에, 세이나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거두었다.
“결계는 언제부터 약해진 거죠?”
라샤드는 세이나를 보다가 오웬을 보고, 또 세이나를 보다가 다시 오웬을 봤다. 그러다 곧 하아, 한숨이 나왔다.
포기한 듯한 모습이다.
“벌써 2년이 넘었어.”
“……어째서?”
“말했듯이, 원인 불명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었다.
세이나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썹을 매만지는 사이 라샤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엔 아주 작은 마물 1마리가 시작이었어. 토벌에 다녀온 황실 기사단의 짐 안에서 발견되었지. 굶주림을 달래러 수레 안에 들어갔다가 잠들어 버린, 겁 없는 녀석이었지.”
덜컹거리는 수레 안에서 태평하게 자다니.
지능이 모자라는 걸 보아 상위종은 아닐 것이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처음엔 희귀종인 줄 알았으나, 분석한 결과 다른 마물과 차이점이 없더군. 일부 헌터들의 협조를 통해, 황실 마법사들은 결계의 변화를 관찰했어. 그렇게 1마리, 2마리…….”
“여기 있는 마물은 총 35마리입니다.”
용케 그걸 다 확인했구나.
역시 S급 헌터는 다르다 싶었다.
“이 일은 황실에서도 일부만 알고 있다. 부디 비밀을 지켜 줬으면 좋겠군.”
“혹시 이것도 유클레스 후작 때문입니까?”
“확실하지 않아. 폐하께 보고하기 위해선 그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세르본 부인을 처벌하기에는 충분하죠?”
“물론.”
“그럼 마물 문제는 공작님께 맡기고. 이제…….”
세이나는 잠시 쉬었다가 말했다.
“저는 디온을 보러 갈게요.”
라샤드는 사람들만 끌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세이나는 바로 디온을 마차에 실었다. 독이 퍼지고 있다면 한시라도 급한 상황. 마차는 바로 공작저로 향했다.
그곳에 상시 대기하고 있는 의사가 그를 살피고 있으리라.
“가도 되죠?”
잠시 후, 또 다른 마차가 고저택에 찾아왔다.
세 사람은 아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바로 공작저로 향했다. 가는 길이 얼마나 초조한지. 다리를 너무 덜덜 떨어서 감각조차 희미해질 정도였다.
도착한 후에는 바로 그가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제발, 제발 무사하길. 아무 일 없이 웃어주기를.
하지만.
“독은 해독했지만 좀처럼 눈을 뜨지 않고 있습니다.”
청천벽력과 다름없는 의사의 말에 세이나는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디온은 치료를 받은 이후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만이 오로지 그의 움직임.
다른 곳은 미동조차 없다. 원체 하얀 피부까지 더해지니 멀리서 보면 마치 죽은 것만 같다.
“제가 깨울 수 있습니다.”
세이나가 홱 오웬을 돌아보았다. 오웬은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눈썹을 매만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길만 뚫는 거지만.”
그의 고뇌가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순 없었다.
“길이요?”
“네. 그 뱀은 아마도 마물이었을 겁니다. 마물의 마력을 흐트려 놓는 건 제 장기라서. 그리고 나머지는 세이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꿈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저를 통해 세이나가 꿈으로 들어가서 이 도련님을 깨우는 거죠.”
오, 외국어를 듣는 느낌인걸. 세이나는 속으로 평했다.
말은 하고 있지만, 이해하지 못하니 한쪽 귀에서 한쪽 귀로 음성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라샤드도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오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이나, 제가 꿈을 꾸지 못한다고 했던 것. 기억하나요?”
“네. 안 그래도 그게 참 신기해서…….”
“저는 반쪽짜리 마물입니다.”
다시 외국어가 찾아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힌트가 좀 있다. 세이나는 오웬을 아래위로 훑었다.
어딜 봐도 사람이다. 세이나는 그에게서 ‘마물’이 가진 특징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제 이름은 오웬 라프만.”
오웬의 음성은 매우 침착했으나, 세이나는 점점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자위가 점점 더 커지고, 입술이 벌어진다.
라프만. 지인 중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그 이름은, 기이하게도 그녀에게는 몹시 친숙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라프만’이라는 이름에 얽힌 비밀이 있지요. 제가 성국을 돕고 있는 이유 역시 제 이름에 얽힌 일 때문입니다.”
당장 몇 시간 전에도 회상하지 않았던가!
“라프만. 그 이름에 얽힌 비밀은 바로…….”
세이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변태!”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