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79화 (79/179)
  • #79

    ‘혹시 꿈인가?’

    바닥에 뒤통수가 닿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그 새끼를 죽이면서 깨어났던 게 아니었나?’

    그러나 지금 눈앞의 상황은 꿈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꿈에서도 이런 건, 감히 상상조차 하지도 못했다.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세이나가 점점 몸을 앞으로 기울었다.

    다른 한쪽 손으로는 그의 목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턱선에 닿고, 이윽고 입술을 매만졌다.

    소름이 쫙 끼쳤다.

    “세이나?”

    여러 번 부른 이름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금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디온은 마른 침을 삼켰다. 손길은 천천히 올라와, 그의 뺨을 쓸고 있었다. 그의 목울대가 한 번 더 꿈틀거렸고.

    세이나는 미소 지었다.

    ‘진짜 현실인가?’

    차라리 꼬집어 주면 깨달을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세이나의 손길은 부드럽기만 했다.

    꿈일 수도 있다. 그리 되뇌면서도 디온은 그녀에게 손을 가져갔다. 꿈이면 저항해야 하는데.

    저항하고 싶지 않았다.

    차근차근 다가온 그녀는 이제 코가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디온의 가슴이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고, 세이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제 입술에 닿는 것을 느끼며, 디온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꿈이 아니면 좋을 텐데. 현실이라기엔 너무 다르다. 마치 다른 사람 같은…….

    ‘잠깐만.’

    다른 사람?

    “미안합니다.”

    그러고 디온은 세이나의 머리를 확 뒤로 잡아당겼다.

    “악!”

    세이나가 얼굴을 험하게 구기며 그를 노려보았다. 똑같은 생김새. 그러나 미묘하게 평소와 표정이 달랐다. 뱀처럼 세로로 길게 찢긴 동공도.

    “이게 무슨 짓이야?!”

    “라미아.”

    그 이름에 놀라 크게 뜬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곧 세이나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이야. 루드.”

    아니지. 세이나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불쾌한 존재의 등장에 디온이 눈살을 구겼다. 반면 그녀는 계속 실실 웃고만 있었다.

    “아, 이제 디온이라고 했나?”

    “왜 여기에 있지?”

    묻자마자, 바로 해답이 떠올랐다. 디온의 미간이 더욱 더 좁아졌다.

    “세르본 부인.”

    “맞아. 그 여자, 내게 이상한 팔찌를 채우더니 이제 내가 네 주인이라는 것 있지? 효과는 하나도 없었지만 재미있어 보여서 따라왔어.”

    “저 마물들은?”

    “내가 도와준 거야. 재미있잖아?”

    그러고 그녀는 눈을 휘며 웃었다.

    “수도 안에 마물이라니.”

    오랜만에 봐도 불쾌한 표정이었다. 아니, 세이나의 몸으로 보니 더 짜증이 치밀었다.

    세이나의 몸. 그걸 떠올린 디온은 하는 수 없이 손에 힘을 풀었다. 뒤이어 진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꿈도 아닌, 전혀 다른 사람.

    ‘젠장.’

    뭘 기대했던 건지.

    디온은 몸을 일으킨 뒤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침 배도 고팠고. 래이시 세르본의 실험들도 재미있어 보였거든. 그 반지 봤어? 내가 만든 건데!”

    그녀는 아직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다시 마주한 세이나는…… 평소와 확연하게 달랐다.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에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전부 저 녀석 짓이었군.’

    왜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결과를 알고 보니 너무 뻔한 내용이었다.

    마물들 안에 있는 마법진. 저택 전체에 깔린 기묘한 마력.

    세이나가 차고 있던 팔찌에는 저 여자의 마법이 있었을 것이다. 손님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생명력을 대가로 저 여자의 마법을 빌린 셈이다.

    헬트레일을 부린 것도 그녀. 기분 나쁜 기억을 보여 주는 마법도. 계약도.

    라미아, 저 여자는 재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마물’이었으니.

    “……그럼 엘렌은?”

    “엘렌?”

    그녀가 갸웃했다. 하지만 곧 알아차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 그런 이름이었어?”

    디온은 혀를 찼다. 내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이다. 그 이름을 직접 물어보다니.

    “래이시 세르본이 파장이 유난히 잘 맞는 여자애가 하나 있다고 하긴 했지. 실험 대상으로 삼고 싶어 하던데. ‘그것’이었나 보네?”

    우연이었나.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디온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세르본 부인을 향한 신랄한 비난도 하나 삼켰다. 잘도 저런 걸 길들이겠다. 착각도 저 정도면 지능을 의심해 봐야 한다.

    ……하지만 하나, 그에게 도움 될 만한 깨달음은 있었다.

    “너까지 들어왔다는 건 결계가 곧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겠군.”

    “맞아.”

    라미아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녀가 올 거야.”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디온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예상보다 빨라.”

    “뭐, 어쩔 수 없지.”

    그러고 라미아는 그의 무릎을 베고 바닥에 누웠다.

    “이건 그 누구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어. 진짜 루드가 와도 불가능하지. 아, 신이라면 돌이킬 수 있을지도?”

    디온은 눈을 가늘게 떴으나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속은 라미아지만, 겉은 여전히 세이나였다. 그녀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면서 발끝을 까딱거렸다.

    “그런데, 정말 너는 피를 취할 생각은 없어? 네 권속이 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럼 왜 찾아다니는 거야? 흐음, 정말 알 수 없네.”

    무릎을 누르고 있는 무게감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귀여운 입술이 끊임없이 재잘대는 모양이 보기 좋았다.

    “그 여자도 얼마나 답답할까. 거의 잡아먹었는데 도로 갇혀 버렸네. 딱하기도 하지. 아, 나로서는 당연히 좋긴 하지만…….”

    그러다 돌연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다. 왜 아직 화를 안 낼까?”

    디온은 그제야 제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그녀가 상체를 일으켜 성큼 다가왔다. 저건 라미아다. 겉만 세이나야.

    “디온, 너.”

    겉은 세이나. 그 사실 때문에 디온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금색 눈을 예쁘게 접으며 세이나가 웃었다.

    “나를 좋아하는구나?”

    “…….”

    “꼬시려고 해도 그렇게 안 넘어오더니. 이런 취향이었어?”

    그녀의 손이 올라왔다. 디온은 제 가슴을 더듬는 손길을 매섭게 뿌리쳤다.

    “꺼져.”

    “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하, 떨어지라고.”

    “너 혹시 고장 났어? 응?”

    “……혀 뽑아 버리기 전에 닥쳐.”

    “그러지도 못하면서.”

    다시 얄미운 표정이 떠올랐고, 디온은 다시금 자신을 일깨웠다. 저건 라미아가 확실하다. 그때, 그녀가 손톱을 세워서 제 목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디온은 놀라 황급히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빠르게 움직였다 생각했는데도, 어느새 세이나의 목에는 긴 손톱자국이 생겨나 있었다.

    “아, 너무 재밌다.”

    스스로 목을 잡아 뜯어 죽으려던 속셈이었나.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디온이 경고하듯 노려보는 와중에도 그녀는 실실 웃고만 있었다.

    “왜 안 막는 거야? 어떻게 하면 날 빼낼 수 있는지 알고 있잖아. 그것도 두 가지나.”

    “…….”

    “그리고 넌 항상, 첫 번째를 골랐지.”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종착지는 그녀의 목. 직접 졸라 죽이라는 의미다.

    디온은 거칠게 그녀를 뿌리쳤다.

    “역시 못 하겠어? 그래, 난 두 번째도 좋아.”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다시 무릎 위에 앉았다. 세이나의 얼굴로, 라미아가 유혹적으로 속삭였다.

    “날 만족시켜 주면 기꺼이 이 몸에서 나가 줄게.”

    더운 숨이 살갗에 부딪히자 몸 전체에 긴장이 퍼졌다.

    젠장. 다시금 속삭이며, 디온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라미아는 그걸 승낙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그녀의 고개가 기울던 찰나.

    “세 번째도 있지.”

    “뭐?”

    돌연 디온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변했다.

    “꺼져.”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이나의 등에서 새까만 뱀이 튀어 올랐다. 디온은 힘없이 쓰러지는 세이나의 몸을 그대로 받아 안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뱀은 고개를 몇 번 가로젓더니 그를 노려보았다.

    너무해. 그리 말하는 눈빛이었다.

    ‘꺼져.’

    다시금 그 의미를 바로 전달한 후, 디온은 세이나를 끌어안았다.

    무심코 시선을 던진 구석에는 오웬이 쓰러져 있었다. 디온은 찌푸리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후우.”

    수습할 일이 아직 많았다.

    * * *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대리님! 어디 가세요!”

    “대리님?!”

    의아한 얼굴들을 뒤로하며, 세이나는 힘껏 달려갔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로비를 지나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저쪽입니다!」

    그리고 오웬도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경사진 인도 끝에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스무 걸음도 더 되는 거리임에도, 그의 목소리는 똑똑히 닿았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두 사람은 다시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고양이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세이나는 이를 악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뭘?’

    「바보 같은 짓이야. 누가 알아줘?」

    ‘내가 뭘 했는데!’

    「내가 아는 꼬맹이 중 네가 제일 멍청한 것 같아. 아, 참고로 욕이야! 칭찬 아니라고! 그만 웃어!」

    도시는 이상하게도 사람이 1명도 없었다.

    벚꽃으로 물든 길 위에는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떤 가로수는 앙상했지만, 어떤 가로수는 푸른 잎사귀를 자랑했다.

    고양이는 도로 가운데에 있었다.

    「세이나.」

    세이나는 바로 그 앞에 멈춰 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고통스러웠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팔다리가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그녀는 끝까지 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고양이가 말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허억……. 헉……. 뭐? 지금, 헉, 뭐라고.”

    「언제?」

    틀림없이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도, 고양이는 그녀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 같았다.

    세이나는 너무 지쳐서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고양이는 미소 지었다.

    「……그래.」

    “젠장, 헉, 대체……. 허억, 대체 뭐라는 건지.”

    「다시 만나자.」

    “하, 빌어먹을 고양이.”

    고개를 숙이자 헝클어진 머리가 마구 쏟아졌다. 세이나는 떨리는 손으로 거의 헤집듯 제 머리를 뒤로 넘겼다. 다시금 앞을 봤을 땐.

    “그래도 드디어 따라 잡았…….”

    고양이는 사라진 후였다.

    “어?”

    도로는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믿기지 않아 손을 뻗어 바닥을 매만져도 고양이 따위, 아니, 낙엽 한 줌도 잡히지 않았다.

    세이나는 다시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달렸는데. 결과가 너무 허망했다. 꿈이라면서 왜 몸은 현실과 똑같은지. 아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대체 뭐였지?”

    그 고양이는 레블로테가 확실했다. 그러나 그 대화는, 그런 눈빛은, 기억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만나자니.

    ‘난 그딴 약속한 적 없어!’

    그런데 왜 마음이 이렇게 갑갑한 걸까. 자신의 몸이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세이나!」

    불현듯 들린 외침에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자 한창 경사를 달려오는 오웬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이나!」

    거대한 덤프트럭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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