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디자인 팀에서 이번에는 일정 빨리 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번에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많이 힘들었대요. 우리가 3팀이랑만 일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얼마나 화를 내던지.”
“우리도 컨펌을 받아야 일정을 줄 수 있는데, 윗분들 다 같이 워크숍 가셨잖아. 실장님 톡도 잘 안 보셔.”
“실장님도 가셨어요?”
“그 양반이 술 먹는 데 빠지는 것 봤어?”
“아니, 그런데 실장님 진짜 술 어쩜 그렇게 잘 마셔요? 저번에 회식에 끌려갔다가…….”
삭막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회의는 순조롭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술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회식, 그리고 곧 개인사로 퍼졌고, 잠시 후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 세이나를 제외하고.
‘와, 이게 대체 뭐지?’
큰 테이블. 벽에 붙은 마찬가지로 큰 TV. 시선을 올리자 작은 불빛들이 방을 따라서 빽빽하게 붙어 있다.
유리 벽과 유리문. 그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다. 짧은 소매를 보아 여름인 듯했다. 어떤 이의 목에서 흔들리는 사원증을 보고 있을 때.
“대리님.”
웬 여자가 옆에서 속삭였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조퇴하시는 게 어때요?”
조퇴.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어차피 실장님 컨펌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좋죠. 웹 쪽 작업 들어가면 디자인 팀이 또 대리님만 들쑤실걸요?”
컨펌. 웹. 디자인.
낯설면서도 익숙한 단어들의 향연에 세이나의 고개가 느리게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회의실이라니. 나는 분명 지하실에 있었는데?’
설마.
‘전부 꿈?’
지하실에 들어갔던 것. 옆집의 여자. 불쑥 찾아온 남자들. 내 소중한 집.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 헌터 생활.
처절했던 25년의 세월 전부 다.
‘꿈이라고?’
그렇게 회의 시간을 전부 흘려보냈다.
습관적으로 향한 곳은 휴게실. 정수기 앞에서, 세이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물건이다. 컵을 두자 쪼르르륵, 내리는 물의 소리도 선명했다. 세이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꿈이라니. 말도 안 돼. 진짜 황당해서…….
「놀랍네요.」
“그렇죠. 놀랍죠. 전부 꿈이라니…….”
「놀랍도록 생생한 꿈이군요. 마법의 영향일까요?」
“세상에 마법이 어디 있어요? 나 참. 꿈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 걸 그랬어.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등바등……. 아, 그건 여기도 똑같나?”
「여기?」
“직장이요. 얼마나 박봉인지. 반드시 이직할…….”
울분을 씹으며 중얼거리던 그때, 세이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정수기 앞에는 그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
「응?」
주홍빛 머리, 살짝 처진 눈의 사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조각처럼 높고 멋지게 뻗은 콧날이 인상적이다. 예쁜 회색 눈과 눈썹의 간격은 거의 붙을 정도로 좁았다.
외국인인가. 아니면 연기자?
그의 복식은 연극 무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정수기와 냉장고, 그리고 모던한 디자인의 나무 의자 사이, 남자는 몹시 이질적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는 사이 남자가 컵으로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은 컵에 닿자마자 곧바로 흐려졌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음, 안 잡히네.」
그리고 그제야.
세이나는 깨달았다.
“으악!”
그녀의 몸이 크게 뒤로 쏠렸다. 바로 뒤에 탁자가 없었다면 바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을 테다.
모서리와 부딪힌 충격, 그리고 여러 번 눈을 깜빡인 후에도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왜, 왜……!”
「오, 이제 제가 보이나요?」
유령이나 할법한 말에 세이나의 눈이 더욱 커졌다. 싱긋 웃는 얼굴이 매우 낯익었다. 세이나는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뱉었다.
“오웬?”
「네, 접니다.」
“여긴 어떻게, 아니, 왜 여기에 있죠?”
「여긴 꿈이니까요.」
“……꿈?”
오웬이 끄덕였다.
「네, 세이나의 꿈속입니다.」
그리고 세이나는 완전히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한숨이 쏟아졌다.
아, 지금이 꿈이구나. 그렇지. 꿈은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이건, 전생의 기억을 반영한 꿈이다.
‘그래, 그 세월이 다 현실이 아니라니. 너무 억울하잖아.’
그러고 보니 복장은 바뀌었지만, 긴 검은 머리칼은 그대로였다. 옆에 있는 유리에 비친 얼굴 속 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는 ‘세이나 로힐’이었다.
다행히도.
「그럼 이제 제가 질문해도 될까요?」
안도와 함께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오웬이 무릎을 접어 시선을 맞춰 왔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냉장고가 우웅 소리를 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웬이 진중하게 물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죠, 세이나?」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
오웬은 모든 것을 들은 후에도 매우 침착했다.
“……결론은! 제가 환생자라는 거예요. 여기는 전생에 제가 다녔던 직장이고.”
「전생이라. 그런 게 정말 있을 줄은 몰랐네요.」
너무 침착해서 이쪽이 더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원래 탐험가라 그런가. 흥미롭다는 듯 눈만 반짝일 뿐, 딱히 혼란스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런 세계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거, 이건 어디로 이어지는 문이에요?」
“냉장고예요. 음식들을 신선하게 보관하는 곳이죠. 문을 열면……. 자! 이제 알겠죠?”
「오! 불빛도 들어오는군요!」
낯선 물건들에 대한 거부감도 전혀 없었다.
여기저기를 살피는 모습이 마치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웬이 본격적으로 냉장고 관찰을 시작하자, 세이나는 뒤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우리, 지하실에 있었던 것 맞죠?”
「네.」
“쓰러진 이유는 마법 때문인 것 같고. 꿈이 이어진 것도 마법 탓일까요?”
「아니요. 그건 제 체질 때문일 겁니다.」
그는 여전히 냉장고 안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들렸다.
「저는 꿈을 꾸지 못하거든요.」
“‘못’한다?”
「특이 체질이라.」
이전에 한번 언급되었던 주제였다.
「아마 그 마법은 대상을 꿈속에 가두는 것이었을 겁니다. 저는 꿈을 꾸지 못하니, 바로 옆에 있던 세이나의 꿈에 함께 갇힌 거죠.」
“으윽, 이런 곳에서 들어서 그런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려요.”
「이 체질을 좋아한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고마워해야겠네요. 이런 곳을 볼 줄이야.」
오웬은 이제 냉동실을 살피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이렇듯 냉장고를 활짝 열어 두지 않았겠지만. 어차피 꿈이니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냉장고나, 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제가 있었다.
예상대로, 바지 주머니를 뒤지자 핸드폰이 잡혔다. 새로운 물건이 등장하자 오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건 뭔가요?」
“아주 중요한 거죠.”
핸드폰을 두들기자 바로 전원이 들어왔다. 습관적으로 손을 움직이니 바로 패턴도 풀렸다. 세이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고마워해야겠다.
그건 그녀에게도 꼭 맞는 말이었다. 잠시 후, 웹소설을 모아 둔 플랫폼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드디어 알 수 있어!’
소설 내용을 몰라서 좌절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쳤다.
왜 앞만 읽었던 건지. 원작은 대체 정체가 뭔지, 고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알 수 있다!
계속 입꼬리가 올라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이나는 플랫폼 상단을 클릭하고 거침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꽃집.
그러나.
“어?”
새하얀 창이 나타나자 세이나는 일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검색 결과는 없었다. 오타를 친 것도 아니고, 페이지가 멈춘 것도, 핸드폰이 고장 난 것도 아니었다.
세이나는 급히 다른 인터넷 창을 열고 기억하고 있던 소설의 제목을 썼다.
그러나 이번에도.
“왜…….”
단 1개의 소설도 나타나지 않았다.
「세이나.」
오웬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세이나.」
“잠깐만요! 이게 왜 이러지? 이럴 리가 없는데!”
「저것…… 좀 보세요.」
“미안한데 집중 좀 할게요! 왜 안 나오지? 고장 났나? 꿈이라서? 꿈이라서 그래?”
「아니, 그보다.」
세이나는 팍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좀 조용히 합시다! 그리 외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웬의 옆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그녀도 덩달아 멍해지고 말았다.
「저기.」
그가 가리킨 곳은 휴게실의 입구였다. 유리벽과 유리문. 누군가가 잠시 쓰다가 만 걸레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고양이?”
「이곳은 직장에서 고양이도 키우나요?」
“아니요. 절대로 불가능해요. 그런데 왜…….”
하얀 털에 작은 몸. 고양이라기엔 너무 얄미운 표정이 꽤 낯이 익었다. 설마, 저건.
‘레블로테?’
「꼬맹아, 안 따라오고 뭐 해?」
“뭐?”
「뭐? 이름? 하! 그런 건 오래 볼 사이에나 부르는 거야. 곧 헤어질 건데 네 이름 따위 알아서 뭐 해?」
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세이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꿈은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내 기억?’
그사이 몸을 일으킨 고양이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니 빨리 따라와. 건방진 꼬맹이.」
“이게 무슨…….”
「더 늦어지면 놔두고 간다?」
그리고 홱 바로 몸을 돌렸다. 세이나는 멍한 눈으로 유령처럼 유리문을 뚫고 가 버리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꿈은 기억을 토대로. 그 문장이 계속 반복해서 뇌리를 울렸다. 잠시 후,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 나갔다.
“기다려!”
* * *
제일 먼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이었다.
‘젠장.’
디온은 두통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마법이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고약한 것이었을 테다. 자신조차도 깨트리고 나오기까지 꽤 걸렸으니 아마 보통 사람들은 더 힘들지 않을까.
‘아, 세이나.’
그리고 저 멀리 쓰러진 여자는 바로 그 ‘보통 사람’이었다. 디온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세이나?”
조심스레 흔들어 봤지만, 눈꺼풀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디온은 지끈대는 이마를 매만지면서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아직 마정석의 빛이 남아 있어 분간하기 어렵진 않았다. 마물들은 조용했고, 계단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커다란 마정석이 그 위에서 빛을 품고 있었다.
‘마정석?’
디온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럼 그 여자는 어디 있지?’
그 순간, 거친 손길이 그를 끌어안았다.
디온은 깜짝 놀라 저에게 매달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까만 머리칼. 작은 얼굴. 그녀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디온은 제 눈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세이나가. 그 세이나 로힐이.
직접 자신을 품에 안고 있었다. 매혹적인 눈빛을 보내며, 살짝 나온 혀로 천천히 제 아랫입술을 쓸었다.
“왜, 왜 그래요?”
그리 말하면서도 디온은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몸이 천천히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녀가 제 위에 올라타 있었다.
“세이나?”
디온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