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그리고 부끄럽기도 했다. 얼마나 답답하면 직접 나서서 움직인 걸까. 세이나는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만 내린 채 다리를 움직였다.
‘이러니 엄청 쉽네.’
왜 바보처럼 머뭇거리고 있었던 건지.
뒤이어 디온이 훌쩍 창문을 넘어오자 더 창피해졌다. 나도 저래야 했는데. 저럴 수 있었는데.
“왜 그래요?”
“아, 아니에요.”
괜히 치맛자락이 원망스러워 툭툭 털자 오웬이 의아한지 물어왔다. 세이나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없네요.”
“네. 어서 움직이죠.”
세사람은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은 복도를 빠르게 걸어 나갔다. 모퉁이를 돌자 또 다른 복도. 그러나 전과 달리 방문들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을 맞아 아슬아슬하게 달린 것. 거의 반파되어 모양만 남아 있는 것. 이상하리만큼 깨끗한 것. 오웬이 가장 먼저 연 곳은 새로운 문이었다. 세르본 부인이 최근 이용하는 곳들이 틀림없었다.
첫 번째 방은 침실이었다.
사람 다섯은 누워도 될 만큼 큰 침대. 그리고 고급스러운 서랍장들이 보였다. 오웬은 정원에서 주워온 돌멩이를 안쪽으로 던졌다.
툭. 툭. 또르르…….
“방범 마법은 없네요. 들어가죠.”
세이나가 침실 입구에 있는 디온을 발견한 건 옷장을 다 살피고 난 이후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위치를 보아 들어선 이후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듯했다.
‘내가 너무 밀어붙였나?’
하긴, 이 치마가 불편하긴 하다. 어딘가를 염탐하고 숨어들기에는 적절치 않은 복장이다.
그러나 지금이 저택 안을 살피기에 적절한 시기임은 분명했다. 세이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요?”
“네.”
그는 아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다. 불만도 많고, 짜증도 보였다. 끌려오게 돼서 불쾌한 걸까. 돌아가도 된다고 하긴 했는데.
불안해서 가만히 바라보자, 싸늘한 음성이 귀에 꽂혔다.
“그리고 또 뭐 했어요?”
“……네?”
“이 옷도 같이 산 겁니까?”
역시 이 옷이 문제인가.
“어, 이런 건 저랑 좀 안 맞긴 하죠.”
“아니, 그게 아니라…….”
디온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얼굴을 쓸어내렸다. 깊은 한숨 뒤에 올라온 눈빛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그의 생각을 도통 따라갈 수 없어, 세이나는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후 디온이 입을 내밀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저랑 같이 왔어도…… 아니, 하다못해 공작님과 함께 움직여도 되지 않았습니까. 왜 하필 저자예요?”
“어, 어쩌다 보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제야 세이나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혹시 질투해요?”
“네.”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단호하고, 빠르게 나왔다. 디온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안 돼요?”
자신이 물었으면서도 세이나는 말문이 막혔다. 농담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디온은 조금 화가 난 듯 보였으니까.
언젠가 길에서 만났을 때처럼. 그는 세이나의 손을 보자마자 바로 눈빛부터 매서워졌다.
늘 웃음을 보이는 남자의 태도 변화는 세이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가져왔다.
그러니까.
이건. 아마도.
‘하나 있는 친구를 빼앗길까 봐 불안한 거구나?’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 정황으로 세이나는 이미 디온에게 친구가 많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 후였다. 겨우 친구가 되었는데, 새로운 사람의 등장이 거슬릴 수도 있다. 충분히.
‘귀여워라.’
그리 이해하자 곧 웃음이 찾아왔다.
10대들이 할 법한 유치한 발상이지만 어쩐지 밉지는 않았다. 지금 미간을 좁히고 있어도. 나는 심각한데, 왜 웃어? 그런 생각도 보여도.
질투. 그 단어에는 친구 외에 다른 의미도 있음을 세이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디온은 엘렌을 좋아하니까.’
세이나는 웃으며 그의 팔을 살짝 두들겼다.
“걱정하지 말아요. 전 아직 디온이랑 훨씬 더 친하니까.”
“…….”
“그리고 앞으로도 친할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죠.”
“하, 그게 아니라, 저 새…….”
그리 말하기 전에, 세이나는 급히 디온의 입을 틀어막았다. 디온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세이나는 눈으로 경고했다.
‘욕하면 안 돼!’
오웬이 얼마나 귀가 밝은데!
몰래 숨어든 이 시점에서 싸움은 정말 좋지 않았다.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웬이 막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들었나?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 아니에요! 하하!”
다행히 못 들은 듯했다. 세이나는 디온에게서 손을 거두며 속삭였다.
“나중에 얘기해요.”
“이 방에는 중요한 물건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방을 살피죠.”
“네! 그러죠!”
세 사람은 바로 다음 방을 향했다. 이곳저곳 살피면서도 세이나는 디온에게 잊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어때요?”
“……별건 없네요.”
디온은 계속 삐친 눈치였지만 대답은 꼬박꼬박했다.
‘풀린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네 번째 방문을 닫고 나올 무렵엔 어떤 대화도 나오지 않았다.
열심히 살피고, 또 뒤졌으나 성과는 하나도 없었다. 기분이 상해 버린 세이나는 괜히 애꿎은 복도만 노려보았다.
‘이제 곧 돌아올 텐데.’
벌써 네 번째 방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지만 이쯤 되면 세르본 부인이 돌아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냥 돌아가야 할까, 고민하던 순간 오웬이 말했다.
“여기도 사용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낡은 문이었다. 잡아당기자 예상과 달리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너머에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문득 스산한 한기가 느껴졌다. 세이나는 제 팔을 끌어안으며 어둠을 노려보았다.
‘있다.’
세르본 부인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불길함이 저곳에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문 후에 입을 열었다.
“가 보죠.”
오웬은 어둠 속에서도 거침없이 발을 움직였다. 귀가 좋다더니 눈도 좋은 걸까. 마치 평지를 밟듯 자연스러웠다.
반면 점점 다가오는 서늘한 공기에 세이나는 계속 몸을 떨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오웬과 세이나, 그리고 디온이 차례차례 평지를 밟았다. 빛은 한 점도 없었으나 세이나는 이 지하실이 꽤 넓은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누군가’ 있는 것도.
세 사람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세이나는 곧 각진 모양을 찾아내었다.
아래로 뻗어 있는 긴 기둥들. 그게 몹시 눈에 익어 무심코 앞으로 발을 내딛던 그때,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웬이 품 안에서 새로운 마정석을 꺼내 든 것이다.
그가 밝힌 형형한 빛이 주변을 선명하게 밝혔다.
오웬의 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철창이었다.
그것도 아주 촘촘한 간격으로 창살이 박힌,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기까지 한. 순간 노예를 떠올렸지만, 그러기엔 너무 거대했다.
사람을 넣는다면 30명도 더 넣을 수 있을 듯하다. 안에서 꿈틀거리는 모양은 여러 개가 아닌, 단 하나였다.
“이건…….”
무엇보다 저 크기.
저 어마어마한 크기는.
“마물이군요.”
디온의 목소리와 동시에, 어둠 속 늑대의 이빨이 희게 번뜩였다.
* * *
세이나는 오웬을 잡아당겼다.
“위험해요!”
그러나 다급히 외친 것이 무안할 정도로 직후 정적이 내려앉았다. 철창 안의 늑대가 겹쳐진 앞발 위로 제 고개를 내렸다. 번뜩이는 노란 눈도 곧 스르륵 감겼다.
“안 달려드네?”
“여기 마법진이 있습니다.”
디온이 가리킨 곳은 늑대의 앞발 바로 앞이었다.
“구속…… 실명에, 마비 효과도 있군요. 지금 우리의 기척도 제대로 못 느끼고 있을 겁니다.”
“마정석도 박혀 있어. 여기서 마력을 끌어다 쓰는 모양이야.”
“어떻게 이런 곳에…….”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세이나는 그 옆에 있는 수많은 철창 달린 감옥들을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었다.
“전부 상급 종, 그리고 정신계 마물들이에요. 환각. 최면. 현혹, 저주에……. 열심히도 긁어모았네.”
오웬이 멈춘 곳은 철창 안에 갇힌 오색찬란한 깃털의 새 앞이었다.
“이 마물. 알아보겠나요?”
“로스픽시아. A급. 대체로 산악 지대에서 발견되고, 추운 곳에서 주로 생활하죠. 특징은…….”
잠시 쉬었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고속 재생.”
“마탑의 아주 오래된 실험 목록에 로스픽시아의 피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회복 물약으로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중독성이 심해서 금지되었습니다.”
새는 횃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마 그 반지에 로스픽시아의 마력이 담겼을 겁니다. 다른 마물들도 대부분 실험이 금지된 것들이네요.”
로스픽시아의 철창 옆에는 큰 책상이 있었다. 디온은 어지럽게 펼쳐진 종이 중 하나를 들었고, 세이나는 유리병을 살폈다.
어떤 마물의 것인지 모를 안구가 액체 속에 들어 있었다. 옆의 유리병에도 뭔가 보였으나, 세이나는 감히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더 둘러보기가 힘들어 시선을 돌린 곳이 또 종이였다. 무심코 들어 올린 종이에는 검은 뱀과 그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검은 머리. 찢어진 동공. 여자들의 몸을 옮겨 다니며 기생한다. S급. 이름은…….
‘라미아.’
돌연 주변이 환해졌다.
세이나는 오웬이 새로운 마정석을 켰으리라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 고마워요. 훨씬 밝아진…….”
하지만 오웬의 손에 잡힌 빛은 단 하나였다. 당황한 시선들이 교차되었고, 마침내 세 사람은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환한 빛은 그들이 내려온 계단 위에서 나타났다.
정확히는 누군가, 계단 위에서 마정석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검은 머리칼. 얇게 찢어진 눈초리.
창백한 안색의 여자가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너는……!”
그때부터, 갑자기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세이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이어 쿵, 옆에서 쓰러지는 기척도 느껴졌다.
‘대체 언제부터!’
발소리 따위 전혀 듣지 못했다. 마정석이 켜지는 소음도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혼란스러운 물음들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가운데, 그녀의 몸이 서서히 기울었다.
팔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기침을 쏟던 목은 이제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세이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아주 급한, 그리고 간절한 외침이다. 착각인가? 싶을 때 한 번 더.
“대리님!”
급습하듯 내리쬐는 강렬한 빛에 세이나는 급히 눈을 가렸다. 거친 손길이 그녀를 잡아 흔든 것은 그 다음이었다.
“대리님!”
생소한, 그러나 묘하게 익숙한 명칭이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든 세이나는 제 어깨를 흔드는 젊은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휴, 대리님! 여기서 졸고 계시면 어떡해요!”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연녹색의 칸막이도. 다음에는 탁상 달력. 연필꽂이. 옆에는 시꺼먼 모니터와 본체가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삭막한 사무실.
“대리님! 회의 가셔야죠!”
세이나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