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더 쳐다보고 있으면 멱살을 잡을 것 같아, 세이나는 그를 뿌리치고 멀어졌다.
‘S급 맞아?!’
코를 막거나, 미리 보호 마법을 하는 등등. 당연히 세이나는 오웬이 후자의 조치를 했으리라 생각했다.
일단 S급 헌터니까. 헬트레일은 희귀종도 아니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이라든가. 뭔가를 했기에, 당당하게 들어가자고 제안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꼴이라니.
“전 원래 이런 식의 마법이 잘 안 먹혀요. 워낙 특이 체질이라.”
모든 헌터들이 제각각 강점이 있다고 한다면, 세이나는 바로 이 체질이었다. 그래서 지하실에서도 공작과 달리, 환영에 속지 않은 것이다.
마물의 마력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예민했고, 그들의 공격에도 쉽게 당하지 않는다. 불사신이라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알면서도.
“나도 홀렸는데. 어떻게요?”
오웬은 몹시 놀라고 있었다.
“특이 체질이라니까.”
“저 역시 그렇습니다.”
세이나는 코웃음을 쳤다. 할 수만 있다면 그때 홀려서 제 발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그대로 다시 보여 주고 싶었다.
대놓고 비웃는 태도에도 오웬에게 부끄러움은 없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더니.
“그런데도 그 마력에 홀렸어요. 그 여자가 반지를 끼는 것까진 기억나는데……. 눈을 떠보니 무대 위에 있었고, 세이나가 저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뭐예요?”
“세이나가 저를 잡아 줬을 때, 정신이 들었습니다.”
“보통 충격을 가하면 깨어나긴 해요.”
그때도 지금처럼 정말 확 발을 걸어 버리고 싶은 걸 참았다. 고객이 아니라는 걸 알면, 세르본 부인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막말로 다른 손님들에게 ‘저 여자를 잡아!’라고 할 수도 있다. 혼자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오웬은 제정신이 아니어서 마지막까지 연기해야 했다.
‘연기가 통한 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뭐라 하기도 전에 보내 준 거겠지만.’
그리고 그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았다. 그가 돌연 세이나의 손목을 붙들었다.
“뭐예요?”
“손이요.”
“네?”
세이나는 황당한 와중에도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팔찌를 보려는 건가, 싶었으나 오웬은 그녀의 손을 제 볼에 가져가기만 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다른 손도 주세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단호하여 일단 손을 내주게 되었다. 그는 그 손도 제 얼굴에 가져갔다. 어쩌다 보니 그의 양 볼을 감싸는 형국이 되었다.
“뭔가…….”
오웬이 눈을 감았다.
“상쾌하네요.”
“상쾌?”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네?”
“……비유하자면, 찬물을 머리끝에서부터 맞은 기분이에요.”
‘어쩌라는 거야.’
의도를 알기 어려운 행동에 짜증이 나 빼내려는데, 그가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조금만 더요.”
다시 양 손바닥 가득 따뜻한 체온이 들어찼다. 눈을 가만히 감고 있는 것이 몹시 평안해 보여, 세이나는 뿌리치지 못했다.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원한 걸 찾는 건가?
‘특이 체질이라더니?’
고작 헬트레일의 향기에, 찬 바람 좀 쐬었다고 감기 기운이 오르기라도 한 걸까. 어쩌면 향기에 현혹된 것이 창피해서 그냥 둘러댄 말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나 할 법한 발상이지만, 지금도 보라. 가만히 눈을 감고 온기를 느끼는 모습이 꼭 아이 같지 않은가.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긴 속눈썹이 떨리더니 이어 스르륵 눈꺼풀이 열렸다. 눈썹과 거의 닿듯 가까운 눈. 가까이서 본 그 색채는 머리 색만큼이나 오묘한 빛깔이었다.
그게 신기하여, 세이나는 한동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웬도 그녀만 응시했다.
묘한 분위기 속, 천천히 그의 입이 열렸다.
“세이나, 혹시…….”
누군가가 세이나의 팔을 붙잡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금 뭐 합니까?”
느닷없이 끼어든 목소리에 세이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그녀의 옆에는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디온!”
“네가 여긴 왜……?”
은발의 사내는 대답 대신 세이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소 거친 손길에 세이나는 다리를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겨우 균형을 잡았을 땐, 디온의 등 뒤에 서게 되었다. 그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자 오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시킨 겁니까?”
“그러는 너는? 여기서 뭐 해?”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두 사람이 너무 늦게까지 오지 않아서 찾아온 겁니다. 장소는 칼만 공작에게 들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공작님께 말을 안 했구나.
“우리는…… 저기 들어갔다가 막 나오는 길이에요.”
“그 차림으로?”
그리고 디온은 오웬을 돌아보았다.
“저자와?”
“내가 뭐.”
“커플만 초대받는 자리라고 들어서요.”
설명하면 할수록 디온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반면, 찌푸리고 있던 오웬은 어느덧 여유로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지. 아무도 못 알아챘을걸?”
“이제는 알아차렸겠죠. 제가 소리까지 질렀잖아요.”
“소리?”
“그거까진 굳이 말할…….”
“아, 오웬이 마물의 향기에 취해서요. 제가 끌고 나왔죠.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났을 거예요.”
“대비도 안 하고 들어갔습니까? 하, 형편없긴.”
“뭐?!”
“쉿! 쉬잇! 들리겠어요!”
그들은 아직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이나의 손짓에 오웬이 화를 삭히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짜증스레 제 머리카락을 헝클이는 사이, 세이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디온에게 설명했다.
“치유요?”
“네. 눈 깜짝할 사이에 나아 버렸어요.”
“환각은 아닙니까?”
“절대 아니에요. 제 생각엔 헬트레일만 처치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부인의 팔찌도 그렇고, 그 반지도 무슨 비밀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어요.”
“……왜요?”
“그 반지랑 팔찌가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모르잖아요. 이대로라면 사람들이 나눠 가질 거예요.”
각 테이블마다 전달된 상자를 회상하며, 세이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제 턱을 매만졌다.
“팔찌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상처가 있었어요. 그레타는 피곤하고, 나른하다고 자주 말했고. 혹시 그 팔찌가 생명력을 빼앗는 게 아닐까요?”
“그건 저주인데.”
오웬이 덧붙이자 세이나가 끄덕였다.
“네. 그리고 세르본 부인은 마법사였으니 충분히 가능하죠. 팔찌가 마도구, 저주가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돼요.”
“하지만 세르본 부인은 제명당하면서 마력에 제약이 생겼습니다. 저주는 물론, 하급 마법도 간신히 할 겁니다.”
“조력자가 있을 수도 있죠.”
“조력자?”
“마법은 원래, 마족의 것이잖아요?”
말할수록 세이나는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 그 검은 연기는 결코, 일반적인 마력이 아니었다. 불길함과 흉흉한 느낌은 물론, 묘하게 역겹기도 했다.
만약 마족의 마력이라면…….
“세르본 부인이 마족의 부하라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모든 것을 납득할 수 있다.
세르본 부인은 헬트레일의 향기로 일단, 제 추종자들을 만든 후 금발의 소녀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그레타까지 닿은 것이다.
“마물은 길들일 수 없어요. 그런데, 헬트레일은 부인을 전혀 공격하지 않더군요.”
그 역시 마족이 있다면 가능하다. 헬트레일은 마족의 명령으로 세르본 부인을 섬기는 것이다.
……명령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마물을 따르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으나.
“이러면 앞뒤가 맞지 않나요?”
“흐음, 그러네요. ‘계약’이라는 형식도 그렇고. 마족이랑 비슷하군요.”
“그렇죠? 맞죠?”
오웬의 호응에 세이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러나 디온은 내내 말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긴 했지만, 긍정도 부정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일단 물러나죠.”
이윽고 나온 말도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세이나의 추측이 맞다면 준비 없이 세르본 부인과 맞서는 건 위험합니다.”
“아니요. 지금 가야 해요.”
“……네?”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으니 모임은 계속 이어 가고 있을 테고. 세르본 부인의 부하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꽤 다수가 아직 그 방에 있을 거예요.”
세이나는 그러고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지나쳐나온 곳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유리창이 깜깜했다.
“저택에 몰래 숨어 들어갈 기회예요.”
“전 반대입니다. 저 저택 안에 뭐가 있을지 모릅니다. 돌아가서 공작님과 상의한 후에…….”
“찬성!”
디온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그러든 말든 오웬은 실실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이 제일 좋은 기회죠. 저도 동의합니다.”
“역시 그렇죠?”
“길 찾는 건 제 전문이니, 저만 따라오세요.”
“아, 그러네요! 유적을 많이 다녔을 테니!”
유적 전문가라는 그의 커리어가 든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 ‘진짜 S급 맞아?’라고 의심하긴 했지만 아주 잠깐이다. 아주 잠깐.
“디온은 어떻게 할래요?”
그리고 디온의 표정은 계속 좋지 않았다.
곧 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 * *
어둠에 잠긴 정원은 지독하리만큼 조용했다.
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저택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멈춘 곳은 어떤 큰 창문 아래였다. 그 아래에 몸을 숨기며, 오웬이 속삭였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창문은 예상외로 쉽게 열렸다. 유리창은 모두 복구했지만, 그 틀까지 모두 고치기는 어려웠으리라고 세이나는 추측했다.
이 저택은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고 꽤 오래 방치되었다. 고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테다.
오웬은 아주 가볍게 창문을 넘었다.
소리도 없고, 빠르기도 했다. 반면 세이나는 창틀을 짚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그녀는 오늘 모임을 위해 한껏 차려입은 상태였다. 발을 올리자 부푼 치맛자락이 같이 올라와 움직임을 저지했다.
“으으.”
평소 치마를 즐겨 입지 않아서일까.
세이나는 도통 어떻게 다리를 움직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불편해도 너무 불편했다. 곤혹스러워 마구 인상을 구기던 그때.
“실례하겠습니다.”
“네?”
낮은 목소리와 함께 느닷없이 몸이 들렸다. 세이나를 단숨에 들어 올리고도 디온은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불안정한 자세에 저절로 비명이 나오려던 찰나, 곧 세이나는 창틀에 앉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디온이 그녀에게서 손을 떼며 말했다.
“이러면 됐죠?”
그러나 두근대는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깜짝이야.’
아직도 그의 단단한 팔이 무릎 아래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와, 진짜 놀랐어.’
몸이 갑자기 기울었을 때의 긴장감도 남아 있었다. 거기서 갑자기 들어 올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게 바로 그.
‘공주님 안기인가?’
세이나는 얼굴에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울렸다.
‘너무 놀라서 그래, 너무 놀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