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74화 (74/179)
  • #74

    계속 어색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하지만 다행히, 여자는 그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가요?”

    그리 묻는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슬픈 얼굴로 제 팔목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이 팔찌를 차고 나서, 사고가 많이 일어서요. 서, 선생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그저…….”

    “부인께서 뭐라고 하면서 팔찌를 주셨나요?”

    오웬이 묻자 여자가 조심스레 상담 내용을 털어놓았다.

    “제게는 오래 만난 연인이 있어요. 당연히 그와 결혼할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결혼 말만 나오면 표정이 굳더군요. 그래서 선생님께 상담하고 팔찌를 받았어요.”

    “그분과는 지금?”

    “사, 사이가 좋아지긴 했어요. 그분의 조언대로 하니까 대화도 잘 풀리고.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제가 다치는 일이 많아져서…….”

    여자가 소매를 걷어 올리자 단단하게 묶인 붕대가 보였다. 세이나가 인상을 찌푸린 것도 그때였다.

    “그냥 운이 없는 거겠죠?”

    그레타와 같은 상황이었다.

    “선생님의 심기를 괜히 거스를까 봐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분명히 전과 달라요. 제,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저 꽤 꼼꼼한 편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자주 피곤하고, 힘도 없고…….”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여자는 순순히 오웬에게 팔을 보여 주었다.

    그의 말대로, 동질감이 꽤 큰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오웬과 세이나는 꼼꼼하게 팔찌를 살폈다. 그레타의 팔에서 흔들리는 건 봤지만, 이렇게 가깝게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냥 싸구려같이 생겼는데.’

    별다른 특징이 없는 흔한 팔찌였다.

    그보다는 얇은 여자의 팔에 더 시선이 갔다. 너무 마른 탓에 팔찌와 손목 사이에 공간이 많이 남았다.

    오웬은 바로 그 떠 있는 팔찌의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른 손으로는 손등 위 팔찌를 만지며 여자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몰래 이음새를 매만지다가…….

    탁.

    “아, 미안합니다.”

    오웬은 떨어진 팔찌를 바로 주웠다. 그가 가지라는 듯 내밀었으나, 여자는 쉽게 손을 뻗지 않았다.

    정확히는 굳어 있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는 홀린 듯 오웬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미모에 놀란 눈치다.

    “이 팔찌.”

    오웬은 그녀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제가 대신 물어봐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파, 팔찌를요?”

    여자는 그러면서도 오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이나는 그녀를 이해했다. 오웬은 여자를 꼬시기로 작정했는지 예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 저녁에 부인을 만날 예정이라서요. 만나는 김에 여쭤봐도 될 것 같네요.”

    “‘모임’에 가신다고요?”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정말 친한 분이시군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선생님은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서요.”

    “제가 잘 말해 보겠습니다.”

    “그, 선생님께서 화를 내시면…….”

    “세르본 부인과 오래 알고 지내서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자가 끄덕였다. 조금의 의심도 없는 낯이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도, 경계심도 없었다.

    그렇게 팔찌는 오웬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세이나는 감탄했다.

    와, 저게 바로 미인계구나.

    “확인 후에 바로 돌려 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리고 놀랍도록 완벽한 연기였다. 오웬이 세이나를 돌아보았다.

    “저녁 모임이 기대되네, 그렇지 달링?”

    저, 저 소리만 빼면 참 좋을 텐데.

    * * *

    의상실에서의 볼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의상실 주인은 2층에서 옷 여러 벌을 챙겨 내려왔다. 오웬은 그중 가장 크고 어두운색의 드레스를 골랐고, 세이나는 고분고분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모임에 가려면 차려입어야 하긴 하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팔찌가 아닌, 오늘 저녁의 그 ‘모임’이었다.

    몰래 들은 것들을 종합했을 때, 오웬은 그 모임이 공연과 비슷하리라 추측했다. 그리고 관람에는 그에 맞는 의상이 필요했다.

    드레스는 다행히 몸에 잘 맞았다.

    “잘 어울리네요.”

    그 ‘달링’ 소리를 듣지 않아 더 다행이었다.

    옷값을 계산하는 와중에도, 여자는 계속 오웬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볼일이 끝났기 때문인지 그는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의상실을 나온 후엔 이렇게 말했다.

    “몇 벌 더 살까요?”

    세이나는 뒤를 돌아 의상실 여자가 지켜보지 않는지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내일 와서 환불할 거죠?”

    “네? 아뇨. 다 받을 건데. 선물로 주는 거예요.”

    “그걸 왜 다 계산해요?”

    그러자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럼 더 환불해야 할 텐데. 저는 말 잘 듣는 사람 좋아해서요.”

    하지만 세이나의 반응은 의상실 직원과 달랐고, 오웬은 일순 멍해졌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부 다요?”

    “한 벌도 빠짐없이.”

    그러고도 허락을 구하는 듯 집요하게 쳐다보았으나. 세이나의 뜻이 워낙 강고했다.

    결국 모든 걸 내일 환불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후에야 두 사람은 전진할 수 있었다.

    다음에 들린 곳은 오웬이 자주 들르는 의상실이었다. 그곳에서 세이나도 옷에 맞게 머리도 정리할 수 있었다. ‘빌리는 것’을 조건으로 그럴듯한 목걸이도 하나 걸쳤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카페도 들렀다. 낯선 사내와 마주 보며 앉아 있다는 불편함은 달콤한 것이 입에 들어가자 싹 사라져 버렸다.

    저택에 들어갈 시간이 되자, 오웬이 손을 내밀었다. 세이나가 머뭇거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다정한 연인. 잊지 않았죠?”

    그래, 그랬었지. 부인의 저녁 ‘모임’ 참석자는 그녀의 단골들이다. 즉, 그녀의 조언이 통한 사람이라는 뜻.

    그리고 점술가의 점괘는 대부분 연애 상담이었다. 오늘의 모임은 순조로운 연애를 이어 가고 있는 남녀를 위한 자리였다.

    “대부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세이나는 옆에만 있어도 됩니다.”

    ‘그 알아서 하는 게 문제지.’

    달링이든. 내 사랑이든.

    적어도 그녀의 기준에서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긴 힘든 말들이었다.

    그러나 뾰족한 수도 없었기에, 결국 세이나는 오웬의 팔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다정한 연인 연기. 다정한 연인…….

    ‘딱히 친하지도 않은데.’

    저택에는 그들 외에도 벌써 꽤 많은 이들이 도착해 있었다. 현관을 지키는 이는 여자 1명. 검은 베일을 쓰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제 세이나가 만난 이는 아니었는지, 그녀는 세이나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딱히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확인한 것은 팔찌밖에 없었다.

    그들은 큰 무리 없이 저택에 들어올 수 있었다.

    “초대장은 없나 보네요.”

    “팔찌를 받은 이들은 모두 충성심이 높으니까요. 허락도 없이 모임에 끼어드는 이는 없으리라 확신하는 거겠죠.”

    오웬의 설명에 끄덕이며, 세이나는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는 이를 따라 복도를 걷고, 아치형 문을 몇 개 넘었다.

    조금 후 도착한 곳은 넓은 홀이었다.

    극장, 혹은 식당처럼 보이기도 했다. 각 테이블마다 2개의 의자가 짝지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이나와 오웬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앞에는 무대가 있었다.

    “무슨 공연일까요?”

    “글쎄요.”

    홀은 전체적으로 너무 어두웠다. 테이블마다 세워진 촛불들이 빛의 전부.

    희미하게 들어오던 달빛마저 여자들이 커튼을 쳐서 가로막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옆 테이블에 있는 커플을 보았다.

    ‘저 남자도 손에 붕대가 있어.’

    그리고 팔찌도 있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나 귀를 기울이려던 그때, 돌연 손등이 따뜻해졌다.

    “다정하게.”

    오웬이 그녀의 손을 감싸고 낮게 속삭였다.

    그러나 촛불에 비친 그의 눈빛은 다정함보다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가 당황하는 자신을 속으로 놀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세이나는 그를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

    “……네. 다정하게.”

    “들키면 안 되는 것 알죠?”

    “알긴 아는데……! 그럼 오웬도 좀 적당히 할 필요가 있어요. 안 그래도 어려운데, 당황하게 되잖아요.”

    “어떤 거요?”

    “그, 그, 말 있잖아요. 그거.”

    “제대로 말해 줘야 알겠는데.”

    재차 묻는 모습이 몹시 얄미웠다. 뭔지 다 알면서. 민망해서 제대로 입에 올리지 못하는 걸 알고 놀리는 것이었다.

    확 손을 빼내려고도 했지만, 이미 오웬에게 잡힌 후였다.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말 잘 듣고 싶은데, 정확하게 알려 줘야 듣지.”

    “그럼 일단 이것부터 놓죠?”

    “이건 완벽한 위장을 위해서죠. 쫓겨나면 다시는 못 들어올걸요?”

    그건 또, 맞는 말이긴 했다. 저번에도 불같이 화를 냈으니 이제는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손이 느슨해지자 오웬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오웬의 얼굴이 한 뼘 더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자주 눈을 맞추는 것도 필요하고.”

    그것 역시 필요하긴 했다. 다른 커플들은 모두 딱 옆에 붙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 그들만 뚝 떨어져 있으면 눈에 띌 것이 뻔했다.

    “표정도 부드럽게.”

    세이나는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향하려던 시선을 애써 그에게로 돌렸다.

    의식적으로 미간의 힘도 풀고, 눈도 여러 번 깜빡였다. 부드럽게. 부드러운 표정은 어떻게 하더라?

    “좀 더 웃어도 좋고.”

    그것도 따를 만한 말이었다.

    자신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화가 났냐고 물어올 정도로 사나운 인상이니까. 세상 어떤 여자도 연인을 이렇게 보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연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좀 어렵고. 다른 좋은 생각을 하면…….

    아, 아까 먹은 케이크가 참 맛있었지.

    “네, 그렇게요.”

    가만.

    내가 왜 이 녀석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지?

    “말 잘 듣네요. 세이나.”

    깨달았을 땐 이미 손등이 그의 입술에 닿은 후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세이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이 다시 열린 건 세이나가 퍼뜩 정신을 차린 그 순간이었다.

    “무슨……!”

    “뒤에.”

    세이나의 팔이 다시 굳었다. 오웬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때, 점술가 무대에 나타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