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그레타는 다음 날이 밝아도 의식을 찾지 못했다.
전해 듣기로는 추락 사고였다.
테라스 청소를 하다 잠시 쉬던 중, 난간이 기울어져서 그대로 추락했다. 높이는 3층. 집 근처에는 낮은 나무들이 꽤 많이 있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전날 저녁 그레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에도 엘렌은 내내 우울한 얼굴이었다. 방문할 때마다 활짝 웃으며 내놓던 쿠키도 오늘은 없었다.
세이나는 덩달아 심각해져 꽃집을 빠져나왔다.
“계속, 함께 있긴 하겠네요.”
“누가?”
“빵집 아들이요. 밤새 그레타의 옆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레타는 과연, 떨어지면서도 웃고 있었을까.
기분 이상해지는 상상은 접어 두고, 세이나는 어제를 다시 회상해 보았다. 검은 그림자는 마물이 틀림없다. 그 이빨에서 떨어진 것도 분명, 맹독이었을 테다.
“마물의 부산물은…… 실험 재료로 쓰이잖아요. 보통, 신전에서 제대로 정화를 한 후에 쓰는 것이 규칙이긴 하지만. 추방당했으니 신경 쓰지도 않을 것 같고.”
“그럼 마법이라는 건데.”
생각을 읽은 듯 라샤드가 물었으나, 그녀는 시원하게 답하지 못했다.
‘으으, 왜 하필 오늘 안 오는 건데!?’
그리고 오늘은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디온은 어제 집을 떠난 후부터 소식이 없었다. 집에도 오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역시…….
“점술가를 만나고 올게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남자가 일어났다. 그리고 둘 다 놀랐는지, 서로를 빤히 보았다. 묘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둘 다 가면 엘렌은 누가 지켜요.”
누가 먼저 나서는 쪽이 없었기에, 결국 세이나에게 결정권이 떨어졌다.
그녀는 짧은 고민 후 1명을 택했다.
“왜 그렇게 신났어요?”
“그냥 혼자 가겠다고 할 줄 알았거든요.”
오웬은 내내 싱글벙글하였다. 결정이 떨어지고, 집을 나설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그랬다. 반면에 라샤드는 좀 충격받은 듯했다.
“이제 좀 믿을 만한가요?”
‘그냥 잘 모르는 사람을 혼자 집에 두기 싫어서였는데.’
즐거워 보이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자. 세이나는 대답하는 대신 걸음을 옮겼다.
다시 찾은 고저택은 오늘도 음산한 분위기였다. 분명 햇살이 내리쬐는데, 저 자리만 짙은 그림자가 끼어 있는 듯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괴상한 곳을, 사람들은 아무 망설임 없이 드나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이나와 오웬은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오가는 이들을 주시했다.
남자와 여자. 대부분 젊은이였다. 그 외 공통점은 또 하나.
‘저 팔찌가 마도구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6명째 손님의 팔목에서도 검은 팔찌가 흔들리자, 세이나의 눈길이 더욱 매서워졌다. 단 1명의 예외도 없다.
“제가 다녀올게요.”
“안 돼요!”
세이나는 나가려는 오웬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헬트레일 외에 또 어떤 마물 있을지 몰라요! 위험해요!”
“그럼 같이?”
“저는 이미 쫓겨나서 안 받아 줄 거예요.”
계속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기세 좋게 집 앞까지 온 건 좋은데, 들이닥치지를 못한다. 불같이 화를 냈으니, 그 점술가가 이미 자신을 블랙리스트에 올렸을 것 같다.
뚜렷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잘근잘근 씹던 와중, 돌연 오웬이 말했다.
“오늘 저녁에 뵐게요.”
“네?”
“방금 저 여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거리가 이렇게 먼데 들려? 세이나는 믿기지 않아 저택과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번갈아 보았다.
그사이 손님이 떠나고, 오래지 않아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집을 들어가고 한참 후에야 나왔다. 그를 배웅하러 나온 이는 검은 머리의 키 큰 여자.
일전에 세이나가 현관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다.
“뭐래요?”
그러나 오웬은 저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집중하는 것 같았기에, 세이나도 고개를 돌렸다. 저택은 여전히 멀기만 했다.
‘저게 들려?’
과연 S급 헌터인가. 능력이 남다르다. 이 정도 거리면 집중한다고 들리는 수준이 아니다.
지금 세이나는 작은 말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시야에 집중했다. 관찰 끝에 그녀는 손님의 손가락 끝에 감긴 붕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아래에 있는 검은 팔찌도.
“그렇군.”
“뭐래요?”
잠시 후, 오웬이 씩 웃으며 말했다.
“들어갈 방법을 찾았습니다.”
* * *
세이나는 입구에 이르러서도 머뭇거렸다.
“이 방법이 제일 좋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웬은 지치지도 않고 재촉했다. 괜찮은 방법인 건, 그녀도 동의했다. 하지만 제일 좋은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곱씹고 곱씹어도 결국 못 하겠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돌아가야겠다, 결국 그리 말하려던 순간.
“어서 오세요!”
의상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오웬은 싱긋 웃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옷을 주문하러 왔는데, 지금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 어느 분을……?”
“제 약혼녀요.”
그리고 세이나는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러서려던 그때, 오웬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안 오고 뭐 해, 달링?”
‘오, 미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쫙 올랐다. 눈앞이 아득해지며, 동시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이한 경험을 세이나는 겪고 있었다.
‘저걸 진짜 하네.’
그러나 딱딱하게 굳은 그녀와 달리, 오웬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 웃는 낯이 얄미워 째려보자 그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자, 들어가자. 부끄러워하지 말고.”
다시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는 어깨 위. 잡힌 손목도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내가 못 하겠다고 했잖아! 라는 뜻을 담아 노려보았으나.
“빨리 해결하고 저녁 약속에 가야지.”
귓가를 스치는 숨결에 세이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잡고 있어서 그걸 눈치챘을 텐데도, 오웬은 뻔뻔스럽게 웃기만 했다.
세이나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저녁 약속.
그건, 오늘 밤 고저택에서 있을 행사였다.
무슨 행사인지는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입구의 여자와 매우 친근한 분위기인 이들이 하나 빠짐없이 모두 ‘저녁’을 언급했다는 사실까지가, 그들이 아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 역시 모두 팔찌를 하고 있었다. 지켜본 지 2시간이 지났을 무렵, 오웬은 손가락 끝에 붕대를 감은 여자의 뒤를 쫓자고 했다.
- 저 여자에게서 정보를 빼낼 수 있을 겁니다.
- 저 여자요?
- 네. 불안해하더군요. 괜찮을까요? 이걸로 좋을까요? 다른 손님들에 비해 점술가에 대한 신뢰가 낮으니, 조금만 물어도 털어놓을 겁니다.
- 그럼 어떻게?
그 무렵 여자는 어떤 의상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주변을 훑은 오웬은 씩 웃으며 말했다.
- 고객으로요.
그렇게 그들은 지금, 의상실 주인 옆에 서 있는 저 여자를 만나러 온 것이다.
“여러 벌이 필요한데.”
“어머, 그럼 치수부터 재야겠네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오웬이 자연스럽게 세이나의 외투를 벗겨 주었고, 세이나는 다시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의상실 주인이 가리킨 곳에 서자 검은 팔찌를 한 여자가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세이나는 무심결에 물었다.
“손을 다치셨나 봐요?”
“네? 아, 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돌아보니, 오웬은 의상실 주인과 의논이 한창이었다.
“외출복, 실내복, 겨울용 외투도 여러 벌 있으면 좋겠네요. 신혼여행을 갈 거라서요. 제일 좋은 원단으로. 가격은 상관없습니다.”
“호호호, 그럼요. 잘 찾아오셨어요.”
그러고 주인은 조금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며 책자를 펼쳤다.
“이런 잠옷은 어떠세요?”
“아, 좋네요.”
‘뭐가 좋냐?’
속으로 비꼬긴 했지만, 사실 그녀는 조금 놀라고 있었다.
오웬의 연기는 흠잡을 곳이 하나 없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서울 정도다.
‘그래도 꼭 닭살 커플이어야 했니?’
그 질문도 들어오기 전에 하긴 했었다. 오웬은 지금처럼 빙긋 웃으면서 답했다.
- 그게 가장 좋아서요.
이제 그 의미를 알게 될 시간이 온 것 같았다.
세이나가 팔을 들 무렵 의상실 주인이 2층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오웬이 어떤 부탁을 했으리라 그녀는 추측했다.
“세르본 부인의 손님이시군요?”
“네?”
한창 치수를 재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 오웬을 돌아보았다. 그가 웃으며 여자의 손목을 가리켰다.
“팔찌요.”
“아. 이걸 아세요?”
“네. 우리도 부인께 상담했었거든요.”
그러고 그는 웃으며 세이나를 보았다.
“그렇지, 달링?”
“어, 어……. 으응…….”
그냥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힘껏 뛴 사람처럼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시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부인의 조언 덕분에 우리도 이어질 수 있었죠.”
그가 손을 잡으며 바짝 다가왔다. 당황하여 흠칫하는 사이 다시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잡힌 손은 어느새 그와 깍지를 끼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행동에 세이나는 확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오웬은 꿋꿋이 할 일을 이었다.
“지금은 사이가 좋지만, 처음엔 정말 난관이 많았답니다. 달링이 경계심이 심해서요. 물론, 저는 첫눈에 반했지만요.”
“…….”
“사귀게 된 후에도 가족들의 반대가 심해서……. 그때의 고생만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이 나오는군요.”
“…….”
“부인의 조언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허락까지 받을 수 있게 됐죠. 지금 생각해 보면 하늘이 우리의 사랑을 질투한 게 아닐까 싶네요.”
“…….”
“응? 내 사랑, 얼굴빛이 안 좋은데.”
‘너 때문이잖아. 너.’
“아하, 부끄러워 그러는구나?”
오그라들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어떻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저런 소리를 줄줄 내뱉는 건지.
오웬은 말하는 동안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요즘엔 잘 다치지도 않고.”
그때, 여자의 눈이 커졌다.
“아, 안 다치세요? 이제?”
“한때는 사고가 너무 많이 일어서 걱정스러웠죠. 달링도 괜히 이상한 상담을 해서 부정을 타는 게 아니냐고. 후우, 그때 얼마나 싸웠는지.”
세이나도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오웬이 부드럽게 물었다.
“다 잘돼서 다행이야.”
“응! 맞아! 요즘은 행복한 일밖에 없지! 하하!”
“달링이 이렇게 웃을 때마다 정말 사랑스럽다니까.”
‘제발 좀 닥쳐.’
세이나는 속으로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