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그레타는 다음 날도 엘렌을 찾아왔다.
“오늘도 선생님께 갈 건데, 같이 가지 않을래?”
그리고 세이나는 다음 날도 창문을 통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엘렌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으응, 혼자 다녀와. 난 오늘도 바빠서.”
다음 날도.
“엘렌! 오늘도 바빠?! 오늘은 같이 가자! 응?”
다음 날.
“선생님께서 오늘도 맞히셨어!”
다음 날.
“내일은 꼭 같이 갔으면 좋겠어.”
“수상하죠?”
“수상하군요.”
그 건너편의 장면을 보며, 세이나와 오웬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은 디온의 것이었다.
그는 오늘도 소설책 하나를 끼고 뒤에 앉아 있었다. 팔랑. 책장이 넘어갔다.
“떨어질 수도 있죠.”
“그럼 왜 인상을 찌푸렸어요?”
“떨어질 것처럼 보여서요.”
“오웬은?”
“위의 화분이 흔들리는 걸 저도 보긴 했습니다.”
“바람이었겠죠.”
다시 책장이 넘어갔다. 그 힘없는 목소리에 세이나는 의욕이 팍팍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그저 착각이었을 뿐일까. 눈살을 찌푸리며 건너편을 살폈으나 지금도 검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확인해 봐야겠어요.”
다음 날.
“엘렌! 오늘은 갈 거…… 어, 세이나?”
씩씩하게 문을 연 그레타가 일순 멍해졌다.
세이나는 엘렌의 옆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물론, 속마음은 달랐다.
‘진짜 오늘도 왔잖아.’
이쯤 거절하면 포기할 법도 한데, 정말 꿋꿋한 소녀였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열심히 일까.
몸도 성치 않은데 말이다.
“그보다, 그레타. 몸은 괜찮아? 병원 다녀왔어?”
“멀쩡해! 아무 문제 없어!”
그렇게 답하며 그녀는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세이나는 기꺼이 그녀를 위해 의자를 꺼내 주었다. 그레타는 고맙다고 환하게 웃었으나, 세이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발목은 아직 아픈 것 같고, 손목 붕대도 못 풀었어. 그래도 자세가 저번보다 부자연스러운데. 어딜 더 다쳤을지도.’
매일 상처가 하나씩 늘어나는 소녀라. 더는 말괄량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그냥 환자다. 환자.
“선생님께서 널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너한테도 공짜로 해 주시겠대!”
“뭐? 나도? 음, 그럼 한 번만 가 볼까…….”
“저번에 만났던 공작님에 관해서 물어보자!”
그리고 엘렌은 정말 곤란하다는 낯이 되었다. 세이나는 엘렌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공작님 이미지 개선을 안 시켜 줬네.’
이런저런 일들에 채여서 미처 수습할 여유가 없었다. 엘렌에게 라샤드는 아직까지 ‘옆집 이웃을 괴롭힌 무도한 귀족’으로 각인된 듯했다.
세이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도 명색이 남주 후보인데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일단 제쳐두고.
“나도 같이 가도 돼요?”
갑자기 그레타가 웃음기를 지운 것은 그때였다. 그녀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더니 곧 다소 싸늘하게 말했다.
“왜요?”
‘이거 온도 차가 좀 극심한데.’
공작님의 이미지 개선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내가 그레타가 기분 상할 일을 했던가?
아니.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일 뿐이다.
세이나는 점점 더 그녀를 수상하게 느꼈다.
“아, 아주 큰 고민이 있지! 저도 연애 문제!”
“연애요?”
“세이나, 연애 문제가 있어요?”
“그럼!”
……따위 전혀 없지만. 일단 따라가려면 우기는 수밖에 없다.
동병상련을 느껴서일까. 그레타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엘렌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누구예요? 무슨 일? 짝사랑인가요? 지금 말하면 안 돼요?”
“흠, 많이…… 어려운 일인가 보죠?”
“아아, 어렵지. 너무 어려워요. 이 고민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네. 잠도 잘 안 와서 미치겠어요.”
“네에? 세이나? 지금 말해 줘요! 궁금해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퍽 보기 예쁘긴 했지만, 당장 거짓말을 꾸며내기도 어려웠기에 세이나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찔끔찔끔 창가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 건너편에는 아마, 사전에 말해 둔 대로 두 남자가 그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같이 가기로 했음.’
등 뒤로 사전에 합의해 둔 손짓을 보이자 희미하게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었다는 뜻.
세이나는 마음 편히 미소 지으며 그레타를 보았다.
“그 점술가. 어디에 있죠?”
* * *
첫인상은 이것이었다.
‘와, 여기에 사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레타가 안내한 곳은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이었다. 돌길은 번듯하게 깔렸으나 행인이 적고, 조용한, 땅값도 낮은 지역.
세이나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그녀도 몇 번 방문한 바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도착한 주택은, 명백히 그녀가 아는 곳이었다.
유령의 집.
한때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고저택이 눈앞에 나타나자 세이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검은 돌벽. 군데군데 부서져 있는 검은색 울타리. 이상하게도 휘어 있는 꼭대기의 뾰족한 지붕. 한낮인데도 제대로 햇살이 닿지 않아 어두침침한 분위기까지.
부서진 유리창들이 모두 보수되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기억 속 그곳과 일치했다.
담력 시험 차 들어갔던 어떤 아이는 기절한 채로 발견되었다지.
‘공작님은 절대로 못 오겠다.’
바로 그곳의 문을 그레타는 망설임 없이 열어젖혔다. 내부는 바깥처럼 어두웠다.
“어서 오세요. 어머, 그레타군요.”
맞이한 여자는 긴 흑발에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자였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요?”
“저번에 말했던 친구를 데려왔어요! 기억하시죠?”
“아, 친구.”
그러더니 여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레타의 뒤를 살폈다. 엘렌은 웃으며 인사했고, 세이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사나운 눈길과 마주치자 여자가 물었다.
“저분은?”
“친구의 친구요. 상담이 필요하다 하셨어요.”
“그렇군요.”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들어섰기 때문일까. 세이나는 그 여자조차 수상하게 보였다.
고작 방금 보았고, 한마디조차 주고받지 않았는데 느낌이 불길하다.
‘엘렌을 데리고 오라고 한 녀석이 저 녀석?’
그러나 안내받은 대로 방 안에 들어오자 또 새로운 여성이 나타났다. 그레타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달려갔다.
“저, 그 사람이랑 잘 되고 있어요.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좋은 소식이네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검은 옷에 검은 장갑. 모두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였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장식이 많이 꽂혀 있었다.
“오늘은 제 친구가 점을 보려고 왔어요. 기억하시죠? 제가 말했잖아요.”
“친구분은 성함이?”
“엘렌이에요.”
“반가워요. 저는 래이시라고 해요.”
복채도 안 받는다면서. 원래 돈이 많은 사람인가?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았으나 점술가는 세이나를 보지도 않고 카드부터 펼쳤다.
“엘렌의 연애운부터 볼게요.”
서툰 손놀림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법 잘하고 있다. 세이나는 카드에 조예가 깊진 않았으나 사기꾼인지는 지식 없이도 판별할 수 있었다.
손짓이나 말투. 눈빛. 자세.
사람은 입을 닫고도 많은 것을 말한다. 이윽고 그녀의 손길이 멈추고.
“해석하겠습니다.”
점괘가 나왔다.
“누군가 당신의 운을 막고 있군요.”
역시 여주인공의 삶은 고달픈 법인가. 세이나는 엘렌을 따라 유심히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딱히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흔한 점술가들의 카드와 달리, 이 카드들에는 번호나 이름도 없고 그림이 전부였다.
그리고 딱 봐도 안 좋은 것들이었다. 길을 막고 선 병사가 2개의 창을 교차시키고 있는 그림에서 시선이 멈췄다.
잠깐만, 혹시 이거…….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흐음. 흥미롭네요. 이 사람 때문에 당신은 운명처럼 다가올 인연들을 모두 만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레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인연들이요?”
“네. 적어도 3명.”
세이나의 눈도 커졌다. 3명의 남자. 누군가 막고 있다. 이거 설마.
‘난가?’
점술가가 다음 카드를 가리켰다.
“한 분은 최근에 만났네요.”
세이나는 더는 가만히 있기 어려워졌다.
테이블 아래의 다리가 저절로 초조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슬쩍 돌아본 엘렌은 딱히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난가?!’
당장 공작과 만남에 훼방을 놓은 것부터 시작해서. 오웬도 아직 엘렌과 못 만나고 있지 않은가.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웬의 저택에 초대받은 사람도 원작에선 엘렌이었을까? 세 번째가 안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원작이 꼬여서?
그럼 엘렌의 미래도…….
‘내가?’
보통의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혹시 엘렌의 장밋빛 미래를, 내가 망치고 있는 걸까.
“딱 맞아요! 얼마 전에 그분을 만났거든요! 아주 유명한 분이셔요!”
갑자기 그레타가 끼어들었다.
“점괘도 그렇네요. 멋진 신사분이셔요.”
“네! 맞아요. 잘생기시고, 키도 크시고…….”
그녀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보아하니 엘렌이 공작과 만난 일화를 그레타에게 공유한 듯했다.
반면, 세이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아니!
‘그걸 다 말하면 어떡해?’
진짜 점술가인지 더 알아봐야 하는데, 이건 뭐 그레타가 먼저 일러바치고 점술가가 맞장구쳐 주는 수준이다.
“혼자 사시는군요.”
“네! 맞아요! 어떻게 다 아세요!?”
‘네가 방금 엘렌이 가족이 없어서 외롭다고 했잖아!’
“인기도 아주 많으시고.”
“맞아요, 맞아요.”
‘저렇게 예쁜데 인기가 없는 것도 이상하지.’
당연해도 너무 당연한 말만 나온다.
“다행히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앞으로는…….”
“아니요.”
그때, 엘렌이 딱 잘라 말했다.
“도와주지 않으셔도 돼요.”
너무나도 단호한 태도에 점술가는 물론, 그레타와 세이나도 일순 멍해졌다.
엘렌은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쩐지 더 권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보다, 이분부터요!”
그리고 세이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드디어 점술가가 세이나를 발견했다.
“그……쪽은?”
“연애운요!”
세이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엘렌이 먼저 나섰다.
점술가는 다시 엘렌을 살피더니, 카드를 정리했다. 이전과 똑같은 손짓이 반복되고, 3개의 카드가 나왔다.
점술가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