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엘렌은 연이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 돈 안 줘도 돼!”
마찬가지로, 엘렌의 친구도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내 실수였어. 너무 미안해. 엘렌. 나, 난 그냥 화분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을 뿐인데…….”
실랑이를 하는 두 사람 곁에는 박살 난 화분이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 아마도 엘렌의 친구가 하나를 들었고, 그걸 놓쳐서 연이어 다른 것들도 쿵쿵쿵 무너졌으리라.
“옆집 분께도 사과드릴게요. 얼마나 놀라셨으면 이렇게 뛰어오시기까지……. 죄송합니다.”
그리고 세이나는 그 소리에 놀라서 뛰어온 옆집 사람이었다.
별일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친구의 안색을 살피던 세이나가 물었다.
“그보다 소리가 컸는데 다치진 않았어요? 그레타라고 하셨죠?”
“벼, 별것 아녜요. 안 다쳤어요.”
엘렌의 친구가 민망한 듯 시선을 내렸다.
“요즘 좀 피곤해서……. 이것저것 실수가 많아졌네요.”
그녀의 손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조금 전.
세이나는 쿵 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엘렌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때의 상황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쏟아진 화분들. 당황한 두 소녀.
엘렌의 친구는 급히 화분을 치우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놀란 탓인지 그만 부서진 모서리에 손이 크게 베여 버렸다.
덕분에 청소는 아직 시작도 못 하고 있었다. 엘렌이 붕대와 소독약을 상자에 넣으며 말했다.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
“으응, 이걸로도 충분해. 고마워.”
“좀 쉬고 있어요. 저랑 엘렌이 치울게요.”
엘렌까지 가세한 후에도, 정리는 꽤 오래 걸렸다.
꽤 많은 화분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몇 개째인지 모를 날카로운 조각을 들었을 때, 세이나는 그레타의 발목에 감긴 붕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발목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아, 실수로 계단에서 굴러 버렸어요.”
“또 그랬어? 의사는 뭐라고 해?”
“한 번 삐끗한 곳은 계속 그렇대. 뼈는 이상이 없나 봐.”
“또?”
“네. 요즘 그레타가 자주 피곤해하고, 다쳐서요. 큰 상처는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팔목에도 붕대가 있다.
“그래도 좋은 일도 많이 있어요!”
세이나가 눈을 가늘게 접자, 그레타가 대뜸 소리쳤다. 그녀가 밝게 웃으며 엘렌을 돌아보았다.
“나, 요즘 그분이랑 잘 되고 있어!”
“정말?!”
“잘 됐다! 축하해, 그레타!”
“곧, 곧……. 아마도.”
그레타의 양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귀는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소녀들의 수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들떠서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고, 엘렌은 제 일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저절로 미소가 나오는 흐뭇한 분위기 속 세이나는 좀처럼 미간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은 것 맞아?’
저렇게나 상처가 많지 않나. 혹시 질 나쁜 남자를 만나 맞는 건 아닐까?
“아픈 건 싫지만, 그 사람이 걱정해 주니 또 행복한 것 있지? 상처가 꼭 나쁘지만도 않아.”
나오는 말도 좀 이상했다.
엘렌도 그때만은 웃으며 끄덕여 주질 않았다. 세이나는 그레타의 등짝을 때리는 상상을 했다.
상처가 꼭 나쁘지 않다니! 정신 차려!
“엘렌 덕분이야!”
그러다 돌연 그레타가 엘렌의 손을 붙잡았다.
“그 사람, 쉽게 만나기 어려운걸. 그런데 엘렌이 같이 간 날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어! 엘렌이 너무 예뻐서 눈에 띄어 그랬나 봐!”
“그레타의 간절한 마음이 신께 닿은 거겠지! 기도도 열심히 했잖아.”
또 알 수 없는 소리가 나왔다. 엘렌이 친절하게 세이나를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얼마 전에, 유명한 점술가에게 연애 상담을 했어요. 둘이서.”
“선생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니까 다 잘 풀렸어요! 보자마자 제 상황을 알아맞히시는 것 있죠?”
“음, 나도 다 아는 건 신기하긴 했어.”
“요즘은 무슨 일 있으면 다 선생님께 물어보고 있어요. 번거로우실 텐데, 매번 웃으면서 받아 주시니 정말 감사한 분이죠. 얼마 전에는 무슨 색 옷을 살지도 물었다니까?”
“그건 좀 심했어!”
두 사람이 까르르 웃었다. 세이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녀도 저 나이 땐 이곳저곳 많이 다녀 보긴 했다. 전부 꽝이라 애석했지만. 돈도 왕창 날렸지.
“그런 것까지 물으면 지출이 심할 텐데, 괜찮아요?”
“네?”
그레타의 웃음이 멎은 것은 그때였다.
느닷없이 정적이 찾아왔다.
세이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내가 이상한 질문을 한 건가? 아니, 복채 정도는 물을 수 있잖아.
엘렌도 당황한 눈치였다. 그레타는 세이나를 가만히 보다가 뒤늦게 눈을 접어 웃었다.
“선생님께서는 돈은 안 받으세요.”
“안 받아요?”
“정말 좋은 분이죠?”
그레타가 홱 고개를 돌려 다시 엘렌의 손을 붙잡았다.
“또 같이 가 줄 거지, 엘렌?”
그리고 세이나는 점점 더 의아해졌다. 복채를 안 받는 점술가라.
이상한데?
“응? 같이 가자! 그분도 널 보고 싶다 하셨어!”
엘렌은 세이나를 힐끗 본 후 입을 열었다.
“그게…….”
* * *
“안 간다고 했어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세이나는 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수상하지 않아요?”
디온과 오웬은 뚝 떨어져서 앉아 있었다. 덕분에 세이나는 한쪽을 보다가 크게 몸을 돌려 반대편을 봐야 했다. 윽, 목 아파라.
“수상하죠?”
오웬이 턱을 괴고 물었다.
“친구가? 아니면 점술가?”
“둘 다요!”
복채를 안 받는 점술가와 상처가 생겨도 행복하다는 소녀. 둘 다 일반적이진 않다.
특히나 친구가 떠나기 직전까지도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거의 엘렌을 끌고 갈 기세였어요. 떠나기 전에도 몇 번이나 정말 같이 갈 생각이 없냐고 묻더라고요.”
“음, 점술가가 후작 쪽 사람이라면 직접 찾아오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렇긴 한데…….”
“엘렌은 뭐라고 하던가요?”
“할 일이 많아서 못 간다고 했죠.”
“친구가 떠난 후에는?”
무심코 대답하려던 세이나는 곧 입을 닫았다. 그레타가 떠난 후 내가 다시 물었을 것도 간파하고 있었군. 꽤 예리한 남자였다.
“……말이 너무 많아서 좀 피곤했대요. 꿰뚫어 보는 듯 쳐다보는 게 아주 기분 나빴고.”
“보통 점술가들은 그렇죠.”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데.”
그러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디온은 어떻게 생각해요?”
“안 가겠다고 했으면 됐죠.”
그는 책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말했다. 내내 입을 닫고 있다가 겨우 한 말이 저거라니.
좋아하는 여자보다 막장 소설이 더 중요하다는 건가. 저번에 애절하게 엘렌을 지키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랑 동일 인물인가 싶다.
그는 마치 첫 만남 때의 자신 같았다. 옆집 여자의 로맨스 따위,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심함을 고수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때의 디온과 비슷했다. 그처럼 엘렌을 사랑하는 쪽은 아니다만, 걱정스러운 마음은 커졌다.
후작의 음모를 막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후작이 엘렌을 손에 넣는다면, 세르벤스 숲에서 일어난 참사가 반복될지도 몰랐다.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네.’
빤히 바라보니 드디어 시선이 올라오긴 했다.
디온이 책을 접고 허리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배고파요?”
쟤는 왜 내가 쳐다보면 밥 얘기부터 할까.
어쩐지 식충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세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니라고 반박하려 했으나.
‘배가, 고프긴…… 한데.’
엘렌의 집에 가느라 아직 점심을 못 먹었다. 어느덧 점심시간도 훌쩍 넘어 있었다. 그래도 바로 그렇다고 하긴 싫었다.
왠지 굴욕적이다.
“제가 살게요. 나가죠.”
디온은 싱긋 웃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외투를 챙겨 입고, 이어 세이나의 것도 가져왔다.
세이나는 결국 순순히 외출 준비를 하게 됐다. 그가 목도리를 직접 해 줘서 얼결에 그것도 하게 되었다. 오웬도 쪼르르 그들을 따라 현관으로 왔다.
“그쪽은 살 생각 없는데.”
“왜 그래. 우리 화해했잖아, 도련님?”
“화해는 무슨.”
디온은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로로 향했다.
이런저런 메뉴가 나왔고,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적당한 식당 하나로 의견이 모아질 무렵, 세이나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레타?’
손에 감겨 있는 붕대. 틀림없었다.
그녀는 빵집 앞에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도 그녀의 눈에 익었다.
‘허? 빵집 아들이 그분이야?’
발그레 달아오른 양 볼이 그 증거였다.
“왜요?”
“아, 저기 저 여자가 엘렌 친구였어요.”
“정말 붕대가 있네.”
오웬과 디온도 덩달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발걸음도 멈춰, 세 사람은 멈춰서 그들을 지켜보게 되었다.
‘남의 연애사가 재밌긴 하지.’
대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도 했다.
화분을 엎질렀다는 이야기에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손을 살폈다. 그레타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손을 맡겼다.
훈훈한 분위기. 멀리서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으나 이렇게 오래 지켜보는 건 실례긴 하다.
세이나는 디온을 먼저 돌아보았다.
“이제 갈까요?”
하지만 그녀와 달리, 디온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세이나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는 더 심하게 인상을 썼다.
“왜…….”
그때였다.
쾅!
느닷없이 들린 소리에 그녀가 몸을 움츠렸다. 동시에 주변 행인들의 움직임도 뚝 멎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산발적으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 뭐예요? 방금?”
“화분이요.”
디온은 그러고 손을 뻗었다.
“저기. 위에.”
빵집의 2층에서 중년 여성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녀는 지금 거리에 있는 사람들만큼 경악하고 있었다.
“괜찮아요오?!”
세이나는 그녀가 몸을 내밀고 있는 창가에서 화분이 떨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의 창문 바로 아래에는 그레타가 있었다.
아니, 있었었다. 빵집 아들이 그레타를 끌어안은 채 위를 쏘아보았다.
“조심하셔야죠!”
“아니, 손도 안 댔는데 화분이 갑자기……. 어쨌든 미안해요! 다쳤나요!?”
화분? 또?
거기까지 파악하자 세이나도 디온처럼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그레타는 빵집 아들의 품에 안긴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팔을 풀었을 때.
‘저게 뭐지?’
세이나는 그레타의 어깨 위에서 검은 흔적을 발견했다. 아주 지독한 연기 같기도 했다. 2층 창문에서부터 내려와, 어깨를 넘어 그녀의 품 안으로…….
연기가 사라졌다. 사내가 물었다.
“괜찮아?”
그때, 그레타는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