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설명이 끝나자, 디온 프라벨이 말했다.
- 거짓말입니다.
알려 줘도 지랄이군.
오웬은 속으로 신랄하게 그를 비난했다. 직접 말해 주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그는 아직 묶여 있었고, 디온 프라벨은 저를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으니.
그는 연장자로서 다시 침착함을 발휘해 보았다.
- 내 말이 맞으면 어쩌려고?
- 굳이 지금 생각할 필요 있나요. 어차피 거짓말일 텐데.
- 하.
어이가 없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대체 왜 저렇게 속이 꼬여 있는 건지. 누구인지 몰라도 그에 대한 소문을 낸 자는 대단한 통찰력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디온 프라벨은 진짜 또라이였다.
빼앗은 증거를 다 읽어 본 후에도 그는 자신을 믿지 않았다.
이쯤 되니 첫인상이 어쩌구 하는 이해심도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를 걷어찰 수 있으면 악마에게 제 영혼 한 줌쯤 떼어 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게 각오하자마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 좋아, 내기해.
오웬이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모든 걸 말해 줬는데도 의심을 받다니, 억울해 미치겠으니까 내기하자고. 나는 맹세코 세이나를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어. 내 말이 맞으면,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무엇이든.
그리고 턱으로 그를 가리켰다.
- 너 말이야. 디온 프라벨. 너.
- 하, 내가 왜 그걸 받아들입니까.
- 내가 지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줄 거니까. 이를테면…….
내기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남은 건 그를 끌어들이는 것뿐.
짧은 시간, 오웬은 직감과 상상력을 총동원해 디온 프라벨이라는 인물에 집중했다.
어떻게 해야 저 자식의 흥미를 끌 수 있을까.
정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 세이나 로힐과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
그를 내려다보는 디온 프라벨의 눈에 경멸이 스쳤다. 오웬은 피하지 않고 도전적인 시선을 마구 쏘아 보냈다. 그의 오기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임기응변으로 떠올린 제안은 예상보다 효과가 좋았다.
- 그럴 필요 없어.
- 좋습니다.
디온은 라샤드 칼만의 만류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 받아들이죠. 대신 이 집도 포함입니다.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세요. 발견되는 날에는…….
- 좋아.
그 결과.
오웬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디온 프라벨의 저녁 시중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건방진 얼굴이 구겨지는 꼴은, 정말로 볼만했다.
그래도 약속을 어기는 쓰레기까지는 아니었던지, 디온은 오웬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다지 고분고분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찻주전자를 새로이 끓여 왔을 때 저걸 내 얼굴 위로 쏟는 건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몰래 음식에 독을 타는 게 아닐까 불안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어제저녁, 오웬은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다시금 디온을 마주했을 때도, 그는 어젯밤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안녕, 도련님.”
세이나의 집. 현관문을 연 디온은 매우 싸늘한 얼굴이었다. 웬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오웬은 쉽게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계속 어제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너처럼 부려 먹진 않았잖아.’
오웬이 내기의 보상으로 받은 건 딱 저녁 시중이었다. 그가 열심히 했던 걸레질도, 빗자루질도 명령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나름대로 연장자로서의 관대함이었다. 미래를 본 판단이기도 했다.
만약 정말 기분대로 그를 부려 먹었다가는 정말 돌이키기 힘들어지리라는…… 그런 직감이 들었다.
딱 봐도 뒤끝 있게 생겼잖아.
“세이나, 안에 있어?”
디온이 물러났다. 현관을 넘자 조금 눈에 익은 평범한 가정집의 모습이 나타났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저 이상한 램프는 선물 받은 건가?’
포효하는 드래곤에게서 시선을 뗀 오웬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멈춰 선 곳은 1층 가장 안쪽 방이었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세이나가 창가에 기대어 옆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았다.
“어우, 풉, 어서, 어서 오세요.”
느긋하게 들어서는 오웬을 보자마자, 세이나는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에게도 어젯밤은 꽤 유쾌한 경험으로 남았다.
오웬은 디온보다 더 계모에 소질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도도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은 정말…….
“그 새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나 아직 아무 말 안 했는데.”
디온이 들어오며 세이나를 살피자 오웬이 덧붙였다.
세이나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차를 다시 끓여 오던 디온이 떠올라 버렸다.
“공작님은?”
“그, 크흠! 공작저로 돌아갔어요. 간 김에 오웬이 말한 걸 확인해 준다고도 했고. 유클레스 후작의, 음, 어머님에 대해서요. 그 반역에 대해서요.”
“공작이라면 더 정확하겠군요.”
“네. 저는 그사이에 엘렌을 지키기로 했고.”
그녀가 창밖을 가리켰다.
“저도 후작을 잡는데 협력할게요.”
다시 오웬을 돌아보았을 땐, 그녀의 눈빛은 진지해져 있었다.
“세르벤스 숲에서 뭘 했는지 직접 물어봐야겠어요.”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다른 방법도 없었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할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그리고 세이나는 시간을 바쳤다.
그럼에도 찾지 못했던 단서가, 이제야 겨우 나타났다.
지금, 여주인공이 그녀의 집으로 온 이후에야.
‘혹시 부모님의 일이 원작과 관련된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걸지도.
세이나는 떠오른 의혹을 일단 접고,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뭐죠?”
“왜 후작은 마족을 부활시키려고 할까요?”
어젯밤부터 줄곧 궁금했었다.
7개의 봉인석을 모으면 소원을 이뤄 주는 것도 아니고.
파괴를 일삼는 공포의 대상을, 왜 굳이 부활시키려고 하는 걸까. 심지어 기껏 반쯤 부활시킨 마족은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나.
“통제되는 것도 아닐 텐데.”
“계약은 가능합니다.”
그러고 오웬은 옆에 있던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책이 몇 권 있었다.
“마족은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세계 간에는 이렇듯…… 벽이 쌓여 있다고 하죠.”
그가 일정 간격을 두고 책을 세워 보였다.
“그리고 이 벽에는 모두 문이 있습니다.”
“문?”
“네.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떻게 찾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 누군가 이 문을 열었고 마족을 만났죠.”
오웬은 느긋하게 말을 이어 갔다.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선 관계가 필요하다고 하죠. 같은 의미로, 마족에게도 ‘관계’가 필요했습니다. 최초의 계약자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름을 주자 마족은 이 땅에 실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엔……?”
“파괴가 시작되었죠.”
세이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건 일전에도 들은 바 있던 이야기였다.
“어쨌든 그것으로 시작되었기에 모든 마족은 인간과 계약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후작은 피를 주겠다 약속하고 계약을 강요했을 겁니다.”
“도망친 걸 보면, 끝까지 거부했을 테고.”
“네.”
“마족과 계약해서, 뭘 하려는 걸까요?”
그러고 그녀는 갸웃했다.
“……세계 정복?”
“그것도 괜찮고. 불로불사. 사자 부활…….”
“그런 것도 돼요? 다?”
“후작에게 어린 나이에 죽은 여동생이 있긴 하더군요.”
한마디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봉인석 7개를 안 모아도 소원은 이룰 수 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서로 걸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 후작의 바람을 이뤄 준다면 마족은 그 이후부터 자유입니다.”
“마족의 목적은……?”
“그건 저도 궁금하네요. 왜 수고롭게 이 세계에 넘어왔는지.”
결국, 앞으로 알아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후작도 마족도.
‘마족이면 악마 포지션이지? 세계 멸망이려나? 응? 후작은 세계 정복이면……. 앞뒤가 안 맞지 않나?’
곧 멸망될 세계를 정복하는 건 이상하다.
세이나는 미간을 좁히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님은 떠난 후였다. 엘렌은 화분을 정성스레 살피고 있다.
“흐으으음.”
“저도 질문이 있는데.”
오웬도 엘렌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다소 불만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을 건가요?”
“네?”
“앞으로 계획은 없나 싶어서요. 엘렌의 기억을 찾게 해 준다든지. 도망간 마족을 추적할 생각은?”
“없는데요.”
단호한 대답에 그의 몸이 삐끗 기울었다.
“분명 어마어마하게 비장하게 말하지 않았던가요. 겸사겸사 엘렌도 지키고, 이렇게 말했던가?”
“역시 몰래 들었군요.”
“윽.”
어쩐지 기척이 느껴지더라. 세이나가 다가가자 그가 움츠러들었다. 요동치는 회색 눈이 그녀의 손끝으로 향했다.
세이나는 보란 듯 검지를 들었다가.
“난 책임감은 있지만 무모하진 않아요.”
탁. 책을 눌러 쓰러트렸다.
“마족이든 후작이든. 둘 다 목적은 엘렌이잖아요.”
“그, 렇죠.”
“여기 있으면 그들이 제 발로 찾아올 거예요.”
‘여주인공에게는 항상 사건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 사건들은 제각각인 듯하나, 결국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엘렌을 구하는 일은 곧 후작으로 향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때 마침, 꽃집의 문이 열렸다.
들어선 이는 엘렌의 친구였다. 꽤 자주 와서 세이나도 몇 번 거리에서 마주친 이였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엘렌과 인사를 나누었다.
곧 다과가 나왔고, 따뜻한 차도 나왔다. 두 소녀는 마주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계속.
계속.
계속.
계속.
계속…….
“점심 먹을까요?”
“그럴까요?”
하도 평화로워 지켜보자니 졸음이 쏟아졌다. 세이나가 먼저 돌아섰고, 오웬과 디온이 뒤따랐다.
오늘 뭐 먹지? 고민하며 방문을 나선 찰나.
쿵!
돌연 들린 소리에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세이나는 순간 생각했다. ‘봐, 내 말이 맞지?’
“꺄악!”
새로운 사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