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세이나는 현관을 보았다.
긴 직사각형에 짙은 갈색,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진 아주 평범한 현관문이다. 위에는 불투명한 유리가 있고, 그 위는 또 할머니가 짠 레이스로 가려져 있다.
‘저건 너무 낡아서 치웠는데.’
하지만 붙어 있다. 색도 바래지 않았고, 이어진 선들도 뜯어진 구석이 없었다. 세이나는 깨달았다.
‘꿈이구나.’
현관문이 열리며 금발의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세이나를 보자마자 매우 놀라워하며 소리쳤다.
- 세이나! 벌써 와 있었니!?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여성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다음에 문이 열리고 들어선 이는 키가 큰 남성이었다.
현관문 색과 비슷한 머리칼의 그는 몸 뒤에 우산을 숨기고 있었다. 그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 부수려고 한 게 아니라……. 잠깐만! 잠깐만 쓰려고 했어! 거참, 요즘 우산은 왜 이렇게 부실한 건지……. 아무리 애들용이라지만 말이야! 아, 아빠가 새로 사 줄게! 응? 울지 말고…….
다시 문이 열렸다.
- 세이나.
그들은 제각각 무거워 보이는 짐을 양손에 가득 들고 있었다. 세이나는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말했다.
- 금방 돌아올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세이나는 제 몸이 무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닥이 갑자기 확 가까워지고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듯 흔들렸다. 땅을 짚은 손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힘들게 고개를 들었건만, 두 사람은 이미 빛 속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쾅!
문이 닫히고.
다시 열렸다.
이번에 들어선 이는 아주 키가 큰 청년이었다. 그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급히 달려왔다.
“괜찮아?”
가까이서 본 라샤드는 불안해 보였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신기했다.
그러다 돌연 세이나는 손바닥의 통증을 느꼈다. 그 손이 닿아 있는 서늘한 이불의 촉감도. 자신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두통도 느껴졌다.
‘꿈이었어.’
세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후에도 두통은 여전했다.
망할 머리. 사고가 난 그날 이후부터 주기적으로 이렇게 지끈지끈 쑤셔 온다. 뭔가가 정수리를 꾹 누르고 있는 것 같다.
라샤드가 물을 건네기에 받아 마셨다. 세이나는 잔을 그에게 돌려준 후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그녀는 잠들기 전을 떠올려 보았다. 비틀대며 집으로 돌아왔고-아마 평소보다 1시간은 더 걸렸을 것이다-, 어린애들처럼 싸우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감정이 북받쳤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세이나는 결국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지금 찾아온 침묵도 아마 그 때문일 테다.
뒤늦게 울음을 터트린 것에 대한 민망함이 밀려왔다. 어디서부터 말해 주면 좋을까, 고민하는데.
“일어나자마자 이런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그녀보다 먼저 라샤드가 입을 열었다.
“협회에서 있었던 일, 들었어.”
“네?”
세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협박해서.”
오, 불쌍한 오웬.
“알리고 싶지 않았다면, 미안해.”
“괜찮아요. 뭐, 말하려고도 했고…….”
“응?”
“저번에 했던 말, 정정할게요.”
그녀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벽돌로 만들어진 집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세이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유클레스 후작을 상대하는 일을 돕게 해 줘요.”
“세이나.”
“들었다고 했죠?”
“……그래.”
“저는 평생을 그날의 진실을 알기 위해 살아왔어요. 헌터가 된 것도, 헌터가 된 후에 등급에 집착한 것도, 모두 부모님 소식을 알아내려고 했던 거예요.”
높은 등급의 헌터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돈, 명예, 권력, 사람.
정보.
헌터들에게도, 귀족들에게도, 하다못해 그냥 지나가는 민간인에게도 금빛 문장을 보여 주면 우호적으로 바뀐다는 것을, 세이나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집을 떠나지 못한 이유도…….”
금방 돌아올게, 라고 해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
괜찮을 거야, 라고 해서 괜찮을 줄 알았고. 살아 있다, 고 해서 살아 있으리라 믿었다. 소중히 여겨 달라고 하여 보물처럼 아꼈고.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다.
7년.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제는 낡아 흠이 생긴 창틀을 바라보며 그녀는 눈가를 훔쳤다.
하지만 다시 라샤드를 바라봤을 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선명한 금색 눈동자가 의지로 타올랐다.
“후작이 부모님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
“아니, 알고 있을 거야. 그런 예감이 들어.”
마족의 부활을 꾀하고 있는 후작과 그가 잘 아는 숲에서 튀어나온 변종 마물.
둘 사이에 관련이 없을 리가 없다. 7년간 쫓아 왔던 일의 단서는 세이나에게 슬픔과 힘을 동시에 불어넣었다.
이대로 놓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래.”
말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라샤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이나에게 눈을 맞춰 왔다.
“알겠어.”
잔혹한 빛이라 생각한 붉은 눈이 오늘따라 따뜻해 보였다.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음에도, 세이나는 그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그를 따라 하듯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고마워요.”
“나야말로 고마워해야지.”
그러고 라샤드는 살짝 미소 지었다. 늘 그렇듯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유능한 헌터가 내 편이 되어 주었으니.”
입에 발린 칭찬 같았지만 듣기 싫진 않았다.
세이나는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시 엘렌의 집을 눈에 담았다.
“이제 엘렌의 일을 외면하기 더 어려워졌네요.”
앞으로 세이나는 유클레스 후작의 모든 것을 알아낼 속셈이었다.
그의 야망, 꿈, 계획, 목적, 과거, 행보. 그 어떤 것도 예외가 될 순 없을 것이다.
가족까지도.
“오웬에게 연락을 넣어야겠어요. 아직 그의 말로서는 확실하지 않아서요. 성국에서 받았다던 정보도 다시 검토하고…….”
“아, 그 남자 말인데.”
라샤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손 좀 보여 줘.”
그녀의 손에는 아직 흰색 손수건이 얌전히 감싸져 있었다. 꽤 고급스러운 소재에, 자수도 놓여 있다.
혹시 여자가 준 걸까. 그렇다면 그녀에게 큰 실례였다.
세이나는 거리낌 없이 손수건을 풀었다. 붉은 상처들은 딱 초승달의 모양으로 손금 위에 박혀 있었다.
그걸 본 라샤드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가 허리를 숙여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아주 대단한 것을 살피는 듯한 자세에 세이나는 민망함을 느꼈다.
“별것 아니에요.”
“큰일이군.”
“진짜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도 않고…….”
“아니.”
그가 고개를 들었다.
“디온이 큰일이야.”
“……네?”
1층으로 내려왔을 땐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먼저, 디온이 “괜찮아요?”라고 물었고 다시 민망함이 밀려왔다.
어색하게 끄덕였지만 차마 그를 보기 힘들어 고개를 숙였을 때, 불쑥 그의 손길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세이나와 디온의 눈이 마주쳤다.
디온이 그녀의 눈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또 울었네요.”
다음엔 손을 보았다.
방에서 붕대를 찾지 못해, 다시 손수건으로 감싼 상태였다. 세이나는 라샤드에게 그러했듯 보여 주며 ‘괜찮아요!’라고 씩씩하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저를 향하는 시선들이 심상치 않다.
세이나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끼며 스르륵 손수건을 풀었다. 무대에 선 마술사가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그리고 완전히 풀어 헤친 후에는 정말 제 손에서 토끼라도 튀어나오고 있나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의자에 묶여 있던 오웬이 소리쳤다.
“봐! 내 말이 맞잖아!”
그와 동시에 디온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세이나는 거실 한편에 묶여 있는 오웬을 그제야 발견할 수 있었다. 저번처럼 꼼짝 못 하도록 꽁꽁 묶여 있지만, 어째서인지 표정은 의기양양하다.
“이제 약속을 지켜야지, 도련님?”
몇 분 후, 세이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
넓은 식탁 위.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들이 가득 올라왔다. 하나같이 모두 비싸고, 고급지고, 또한 많았다.
식탁을 거의 다 채운 접시들의 풍경에 세이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맞은편에 앉아 우아하게 찻잔을 올리는 남자 역시.
대사도 비슷했다.
“차 맛이 별론데.”
쿵. 접시가 식탁 위로 떨어졌다.
내려놓은 이는 말 그대로 뭐 씹은 얼굴이었다. 그가 다음 접시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평소의 기품은 어디로 갔는지 신경질이 가득 담긴 손길이다.
‘쨍그랑!’에 가까운 소음들이 연이어 들렸으나 맞은편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 별로야. 너무 별로라고.”
미간을 찌푸린 모양이 아주 깊은 고뇌라도 하는 듯하다. 쿵! 새로운 접시가 그의 바로 앞에 놓여 였다.
차갑게 뜬 푸른색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았다.
그냥 주는 대로 처먹어.
……라는 의미였지만.
오웬은 말을 잘 듣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제 옆에 있는 디온을 보며 씩 웃었다.
“새로 끓여 와 줄래?”
세이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라샤드에게 속삭였다.
“저기,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