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9.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것
그녀의 집 현관 앞. 두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보고 있었다.
먼저 일어난 사람은 은발의 남성이었다. 그가 쌀쌀맞게 옆의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 손도 안 댔습니다.”
“……네가 비가 올 것 같으니 가지고 나오라고 했잖아.”
“손대진 않았잖아요. 잘 좀 꺼내지 그러셨습니까.”
“정말 이러기야?”
흑발의 사내는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남자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젓고 흑발의 사내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반대로 그 동작은, 세이나의 입장에서는 다가오는 것이었다.
현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그녀는 두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디온은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라샤드와의 거리를 더 벌렸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새침하게 말했다.
“아무튼, 우산은 각하 탓입니다. 전 모릅니다.”
“원래 부러져 있었어!”
“아닐걸요?”
“이게 왜 이렇게 약한…….”
“세이나?”
라샤드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돌아본 그의 표정은 말 그대로, 사고를 치고 들킨 아이와 똑같았다. 반면 디온은 매우 밝았다. 그가 반가워하는 낯으로 세이나에게 다가갔다.
“언제 왔어요? 마침 데리러 가려고 했는…….”
그리고 세이나는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 * *
“대체 무슨 일이야?”
디온이 세이나의 방에서 나왔을 때, 라샤드는 바로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2층에는 오지 말아 달라.’라는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무지 밑에서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세이나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다.
바로 직전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는 점에서 그 행동은 라샤드에게 큰 난처함을 느끼게 했다.
그의 손에는 손잡이 부분이 뚝 떨어진 우산이 있었다.
혹시 이게 아주 귀중한 보물인 걸까. 그래서 저렇게 서글프게 울고 있는 걸까.
또 내가, 실수한 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황하기는 디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라샤드처럼 한동안 얼어붙어 있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도 뭐라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계속 머뭇거렸다.
라샤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디온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디온이 세이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 제가, 제가, 고쳐 드릴게요.
세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지금 라샤드가 완전히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산 때문은 아닐 겁니다.”
디온이 제 오른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쳤더군요.”
“그래. 나도 봤어.”
라샤드가 그걸 발견한 건 그녀가 계단을 오를 때였다. 깊은 상처는 아닌 듯했으나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협회에 간다 했었지?”
“……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어디 가?”
“알아봐야죠.”
디온은 빠르게 라샤드의 곁을 지나쳤다.
다시 한번 닫힌 세이나의 방문을 보고 나서 라샤드는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반쯤 내려갔을 무렵, 홱 하는 소리와 함께 다소 거칠게 문이 열렸다.
밖은 디온의 예상대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디온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차가운 비바람이 아니었다.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두꺼운 코트. 붉은 머리카락. 다시 나타난 오웬은 빙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정확히는 라샤드를 향해서였다.
“세이나가 잊고 간 물건이 있어서…….”
인사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라샤드가 말했다.
“저거 잡아.”
“네? 잠깐만요……. 그게 무슨……!”
그렇게 오웬은 두 번째로 의자에 묶이게 되었다.
* * *
오웬은 순순히 제 처지를 받아들였다.
첫인상은 관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자신의 첫인상은 성인군자라고 하여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건이었다.
그래도 유감스럽긴 했다.
“대화로 해결합시다.”
손은 의자 뒤에 얽매여 있고, 상체 역시 밧줄로 꽁꽁 묶여 있다. 제일 움직이기 힘든 쪽은 발목이었다.
얼어붙어 있는 제 발목을 보며, 오웬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사람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마법부터 쓰나.’
마나의 흐름이 변할 때까지도 설마 싶었다. 그에 대응하지 않은 건 그저 황당함 때문이었다.
설마, 정말로?
오늘은 총을 든 것도 아닌데?
그러나 정말이었다.
차라리 현관문이 열릴 때부터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었어야 했을까. 하지만 오웬은 곧 그것도 소용없었으리라 확신했다.
맞은편에서 저를 노려보는 남자의 눈에는 적개심이 가득했다. 싸늘한 얼굴에는 조금의 자비심도 비치지 않았다.
오웬은 뒤늦게 은발의 사내가 첫 만남에 자신에게 주먹을 꽂았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각하, 그리고…….”
이건 예정된 단계였다.
“디온 프라벨.”
디온 프라벨은 제 이름을 알아낸 것에 어떤 감흥도 비치지 않았다.
칭찬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무덤덤한 태도에 오웬은 조금 실망감을 느꼈다.
그 정체를 알아냈을 때, 그는 놀랐기 때문이었다.
신비로운 은발에 푸른색 눈동자.
그의 특이한 외양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오웬이 그의 정체를 알아낸 것도 순전히 세이나가 부른 ‘디온’이라는 이름 덕분.
헌터들은 물론, 협회에 일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수도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들도 ‘은발의 사내’에 대해서는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아주 신기하게도.
놀라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디온 프라벨이 아버지의 형제들을 골탕 먹인 일화는 오웬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허구라고 생각했다.
혹은 과장되었거나.
그는 협회장을 알고 있었고, 그의 지인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접한 이야기는…….
‘몸이 아프다 들었는데.’
오웬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온을 꼼꼼히 살폈다. 저와 비슷한 키에 수려한 외모. 안색이 조금 창백하긴 했지만, 병약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갈색 외투를 입은 어깨가 반듯하다. 뻗은 손은 마디가 길었으나 핏줄이 보여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라샤드가 원체 체격이 큰 사람이라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뿐. 디온 프라벨은 건장한 사내였다.
멀쩡해도 너무 멀쩡하다.
“대화?”
그리고 깡패 같다.
그간 ‘디온 프라벨’ 하면 떠오르던 병약 미소년이 와장창 깨져 버리고, 웬 최종 보스 같은 놈이 등장했다. 소름 돋게도, 그의 오만한 미소는 협회장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대화라.”
‘제길, 오지 말걸.’
원래 조금 더 기다리려고 했다.
세이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고, 자신 역시 그랬으니까.
그러나 세이나가 두고 간 문서를 봤을 때, 일단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편이 그녀에게 도움이 될 듯했다.
도착하고 난 후엔 조금 고민하긴 했다.
이미 ‘나중에 이야기합시다.’라고 멋지게 말해 버렸는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만나면 좀 민망하지 않을까.
적당히 현관문 틈에 끼워 놓고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문이 열렸다.
웃는 얼굴이었으나 내심 오웬은 당황했다.
그들과 마주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앞으로도 세이나와 따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의심스러운 공작 각하도, 양아치 같은 도련님도 싫었다. 특히 후자의 쪽은 이렇듯 직접 마주하니 거부감이 더 치솟았다.
묻고 싶기도 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라샤드의 태도도 디온과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지?”
“일단 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대답.”
냉혹하기로 유명한 공작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몹시 거슬린다는 표정에 오웬은 그답지 않게 오한을 느껴야 했다. 온몸이 구속되어 있다는 현실은 그에게 큰 심리적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냥 보내 준 호의를 이런 식으로 보답할 줄은 몰랐는데.”
“제가 그냥 죽여 버리자고 했잖아요.”
디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마치 사로잡은 사냥감을 어떻게 처치할지 의논하는 듯한 어투였다.
오웬은 어이가 없었으나 다시 꾹 참아 보았다.
일단 자신은 저 도련님보다 한참 연상이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다쳤더군.”
“그건 그냥…….”
“그리고 울었어.”
그제야 두 남자의 태도가 왜 저런지 알겠다.
‘진짜 거지 같은 타이밍이군.’
놀랍진 않았다.
몇 시간 전 보았던 세이나 로힐은 울기 직전이었으니. 자신에게 시원하게 딱밤을 때린 여자가 우는 모습은 오웬에게 그 어떤 쾌감도 주지 못했다.
그냥 안쓰럽기만 했다.
그래서 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자신의 위로는 조금도 필요 없을 테니.
싫어하는 남자가 어설프게 주는 동정심이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낼지도 모른다는…… 그런 배려심 넘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억울해 미칠 지경이다.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진 않은 것 같은데.’
나라도 설명해 줘야 할까? 설명한다면, 쉽게 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개인사였다.
게다가 그는 그녀와 이들이 어떤 사이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 사건을 숨기고 싶은 과거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낸 상처가 아닙니다.”
“그럼?”
다시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설명해야 그들의 오해를 없애면서 세이나의 비밀을 지켜 줄 수 있을까. 평소 자신이 말솜씨가 좋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따라 머릿속이 새하얗다.
역시 이 발목이 문제다.
오웬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세이나가 오면 말하겠습니다.”
그때, 디온이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전조 없이 다가온 손길에 오웬의 눈이 커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내었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디온은 그의 멱살을 잡은 채 오웬을 내려다보았다.
때리려는 건가?
이를 악문 그 순간, 디온이 오웬의 안주머니에서 문서를 꺼내 들었다.
“이것부터 살펴보죠.”
오웬은 확신했다.
이 도련님과 자신의 상성은 최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