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63화 (63/179)
  • #63

    2층, 넓은 방 안.

    갱신을 위해 찾아온 헌터들이 줄을 서 있다.

    마지막 날치곤 그리 많지 않은 인원이었으나 긴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앞선 순서의 이들이 접수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협회는 대리 갱신을 받지 않습니다. 원칙이에요.”

    “아, 참 빡빡하네. 정말!”

    쿵! 남자가 접수대를 내리쳤다. 접수원은 꿈쩍도 하고 그를 노려보며 답했다.

    “본인이 아니면 갱신할 수 없습니다.”

    세이나는 길게 하품하며 옆으로 빼냈던 몸을 제자리로 했다. 매년 보는 풍경이었다.

    “내 동생은 지금 병원에 누워 있어!”

    남자가 다시 줄줄이 제 딱한 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 안에서 그의 말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남의 헌터증을 훔쳐 헌터인 척하는 이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갱신할 수 없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좀 부탁하자! 헌터 일을 못 하면 우리 가족은 거리로 나앉아야 해! 사람 살리는 셈 치고…….”

    “갱신할 수 없습니다. 다음 분!”

    그리고 늘 그렇듯, 한둘은 아니었다.

    “저기, 아버지께서 헌터증을 집에 두고 임무를 가셔서 대신…….”

    세이나는 연거푸 하품해 대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반듯하게 서 있던 줄은 이제 흐트러져 엉망진창이었다.

    다른 헌터들도 세이나처럼 기다림이 꽤 길어지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수다 상대를 찾고 있었다.

    어, 오랜만이다! 너도 갱신하러 왔냐? 하는 식으로.

    세이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헌터증 갱신은 애초에 낮은 등급의 헌터들에게만 의무적이다. 그리고 신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아직 세이나를 많이 알지 못했다.

    혹여, 안다고 해도 말을 걸어 올 리는 없었다.

    말을 꺼내 봤자 어차피 좋은 말도 아닐 테고.

    세이나는 적당히 혼자 서 있을 만한 자리를 찾아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쪽 구석, 방 전체가 다 보이는 곳이었다.

    거기에 쪼그려 앉아 있으니 정말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오랜만이라서 그래. 오랜만이라.’

    디온과 라샤드가 집을 오가게 된 이후로 이렇게 오래 혼자 있는 건 처음이었다.

    디온이 따라오겠다 했지만, 거절했다. 그는 너무 눈에 띄니까.

    원체 고독이 익숙한 그녀였으나 시끌벅적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최근을 지나고 나니 지금의 적막이 몹시 낯설었다.

    ‘이래서 협회에 오기 싫었어.’

    어린 얼굴의 헌터들은 모두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런 시절이 세이나에게도 있긴 했었다.

    불과 1년 전인데도…….

    이젠 아주 아득한 옛날 같았다. 그녀는 제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가져갔다.

    이대로 한숨 잘까 싶었으나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아무도 자신을 깨워 주지 않을 테니.

    그럼 이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하던 와중.

    눈에 익은 코트 자락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갱신 못 하셨나 보네요.”

    오웬이 조심스레 물었다.

    “옆에 자리 있나요?”

    대답하기도 전에 오웬은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때, 접수원은 벌써 다섯 번째 대리 갱신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저도 예전에 대리 갱신을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긋나긋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저번에도 느꼈는데 그는 이야기꾼에 꽤 소질이 있었다.

    “제 스승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귀찮은 걸 엄청나게 싫어하셨죠.”

    “아, 네…….”

    “그래서 저더러 헌터증을 쥐여 주고 다녀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전 너무 어려서, 고개를 끄덕이고 협회로 왔습니다. 이해가 가기도 했죠.”

    오웬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귀찮잖아요?”

    “……네. 엄청 귀찮아요.”

    그녀는 거의 1시간째 이 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졸린 듯 반쯤 감긴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다섯 번째 대리 갱신자는 꽤 호전적인 이였다. 분을 참지 못한 그는 접수대를 뛰어넘어 접수원의 멱살을 잡으려 시도하고 있었다.

    “저렇게 되었지요.”

    그러나 미수에 불과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사내들이 각자 그의 오른팔과 왼팔을 잡았다.

    조금 후, 대리 갱신자는 물구나무서듯 거꾸로 들려서 방을 빠져나가게 되었다.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세이나와 오웬도 웃고 있었다.

    “알고 보니, 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보내셨더군요. 애초에 등급이 높아서 갱신도 필요 없었습니다.”

    “맞았나요?”

    “질질 끌려 쫓겨났습니다.”

    세이나는 거꾸로 들린 사내에 오웬을 대입해 보았다.

    “그래도 아팠겠다.”

    거친 이들이 오가는 곳이라 그런지 헌터 협회는 꽤 폭력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었다. 시비도 자주 걸리고, 약한 이들은 무시도 쉽게 당했다.

    스승은 오웬이 거꾸로 들릴 것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정말 성격이 나쁜 스승이다.

    “나도 강등만 안 당했으면 갱신 따위 하러 오지 않아도…….”

    절대로 회상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 뇌리를 스쳤다.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쓰린 느낌이 들어, 그녀는 입술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억.

    그 끔찍한 광경이 아직 생생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정말, 불행하게도.

    ‘이래서 협회가 싫어.’

    외투 주머니 안에 넣은 손은 계속 헌터증을 꼭 쥐고 있었다.

    세이나는 괜히 손가락을 움직여 그 표면을 매만졌다. D등급. 금속으로 된 볼록한 부분이 유난히도 차갑다.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할 말 있으시면 하세요.”

    세이나는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듣기는 할게요. 일단은.”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앞에서는 여전히 헌터들 간의 수다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꽤 거리가 있었기에, 그들의 귀에 제대로 닿는 것은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그들과 자신 사이에 세워진 것만 같다. 그 때문에 세이나는 오웬의 음성을 아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저는 칼만 공작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반지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해명하지 않았으니까요.”

    “사라졌다 했잖아요.”

    “그걸,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오웬의 목소리가 낮아진 건 그때부터였다.

    “탐지 부서의 마법사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네? 출장은?”

    “남은 이가 있어서 찾아 물어봤습니다. 인맥이죠.”

    “설마, 마물에 관해 물었나요?”

    “저와 친분이 있는 마법사들은 수도에 마물이 나타난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전혀?”

    “네.”

    “탐지 부서는 마물을 찾아내는 게 일이잖아요.”

    “전혀 모른다더군요. 직접 만나 확인했습니다.”

    “……혹시, 공작님이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 황실에서도 함구령이 떨어지진 걸까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그러고 그는 세이나의 곁에서 물러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의 발이 움직이는 모양을 세이나는 가만히 주시했다.

    오웬은 이제 그녀를 정면에서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성국의 의뢰로 성녀를 보호하고, 마족을 사냥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겁니다.”

    “…….”

    “그리고 세이나는 마족으로 인한 피해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해서, 라고 하셨죠.”

    “……맞아요.”

    “저는 우리가 협력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중한 제안이었다. 오늘 그가 잘 차려입어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게 복장의 힘인가. 제대로 체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 총을 들고 집에 쳐들어왔던 남자가 서서히 지워지는 것을 세이나는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녀가 염려한 마물을 보낸 이는 마족이 아닌가.

    오웬이 사냥에 성공하면 세이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알아내면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가 끄덕여지진 않았다. 오웬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세이나를 바라보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치 이런 반응을 예상하였다는 듯.

    그가 짧은 인사 후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오웬.”

    세이나가 그를 붙잡았다.

    팔랑대던 코트 자락이 기어코 그녀의 손안에 들어왔다. 자신이 잡아 놓고도, 세이나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혹시 탐지 부서의 사무실을 뒤져 보면 힌트가 있을까요?”

    “그렇긴 하지만, 탐지 부서의 방은…….”

    줄곧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던 쪽의 손이 빠져나왔다.

    오웬은 놀란 눈으로 그녀의 손안에서 빛나는 은색 열쇠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안 하겠다고 약속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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