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보통 어떻게든 맞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이것도 혹시 함정? 날 속이려고?’
세이나는 이게 또 무슨 질 나쁜 기만인가 싶어 오웬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젠장, 이놈도 잘나긴 했네.’
이마부터 미간, 곧은 콧날까지 이어지는 모양이 완벽했다. 머리칼보다 짙은 색의 눈썹은 눈보다 길었고, 거의 바로 아래에 얇은 눈꺼풀이 있었다.
속눈썹 색도 붉은 기가 있어 신기하다 생각하는데, 갑자기 그의 눈이 열렸다.
깊은 눈매 속 회색 눈동자가 한 번 깜빡였다. 곧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때려도 됩니다.”
다시 눈이 감겼다.
‘혹시 때려 봤자, 약할 거로 생각하는 건가.’
폭력을 기대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안한 얼굴이었다. 기분 좋은 낮잠을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반면 세이나는 그와 달리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 그런 이들이 있다. ‘때려 봐!’라고 얼굴을 들이밀면서, ‘설마 진짜 세게 때리겠어?’하고 생각하는 녀석들이.
디온이 말했던 ‘세이나는 마음이 약하다.’라는 말을 오웬이 주워들었다면 충분히 그리 생각할 만했다. 딱밤이 아파봐야 얼마나 아프겠어.
‘아, 그런 거야?’
잠시 후, 세이나의 오른손이 쫙 펼쳐져 오웬의 이마 위로 올라갔다. 왼손은 중지를 잡아당겼고, 입매에는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마치고도 세이나는 바로 손을 놓지 않았다. 오웬이 기다림에 지쳐 슬쩍 눈꺼풀 연 바로 그 순간.
빠각!
직후의 일은 세이나의 시야 속에서 유난히도 느리게 펼쳐졌다.
먼저, 오웬의 눈이 크게 떠졌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이나는 그 안에 담긴 생각을 쉽게 읽어 낼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세이나는 속으로 답도 해 봤다. 뭐긴 뭐야.
‘겁나 아픈 거지.’
쿠당탕! 오웬의 무릎이 무너졌다.
당당하게 이마를 내밀던 사내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끄윽……!” 하는 신음과 함께 그의 굽은 등이 바들바들 떨렸다.
세이나는 싱긋 웃으며 무릎을 접었다.
“오웬 씨.”
곧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머리칼만큼이나 새빨갛게 변한 이마. 마찬가지로 붉은 얼굴. 그리고 도저히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
이게 정말 사람의 손이, 사람의 머리와 부딪칠 때 나는 소리인가.
익히 본 반응이다.
“거짓말하면…….”
그녀가 자랑하듯 오른손을 보여 주었다. 검지와 엄지를 엮어 한 번 튕겨 보였다. 퉁.
어때, 참 사랑스럽지?
“죽어요. 진짜.”
“…….”
“알겠죠?”
그가 힘없이 대답했다.
“네…….”
세이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S급 헌터가 제 발치에 구겨져 있는 광경은 생각보다 제법 볼 만했다.
통쾌함에 손끝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한결 낫긴 하네!’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제 발치에 놓인 오웬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디온은 오웬만큼이나 창백한 낯이 되어 그를 보고 있었다. 세이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이나가 뭐라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 * *
헌터들은 1년에 한 번, 꼭 모험가 협회에 방문해야 한다.
모험가 협회에 등록된 헌터들이 처음 협회와 계약할 때 동의해야 하는 조항 중 하나였다. 이 번거로운 절차의 목적은 단순히, 생존 신고를 위함이었다.
그로써 자신은 아직 헌터로서 일하고 있으며, 협회에서 제안하는 의뢰를 받을 의향이 있음을 확인시켜 줘야 했다.
1년 중 1달. 가을. ‘갱신일’이라 불리는 기간.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갱신을 받는 날이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어.’
세이나는 급히 협회로 가는 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갱신일을 맞추는 것은 그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달은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벌써 두 번이나 협회를 방문했는데도 말이다.
최근 벌어진 일들이 좀 평범해야 말이지.
예상치 못한 사고들이 매일 터져 나오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벌써 헌터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세이나는 아직, 협회에 볼일이 남아 있었다.
“생각보단…… 사람이 별로 없네, 다행이다.”
협회의 로비를 둘러보며, 세이나가 중얼거렸다. 펼쳐진 풍경은 여느 때와 같았다.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접수대. 그 앞에 줄지어 있는 초보 헌터들.
그럭저럭 연차가 쌓인 녀석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곳저곳에 저들만의 수다 장소를 만들었다.
접수대 근처 우측에는 커다란 칠판이 달려 있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그 역시 임무를 위한 자리였다.
대규모 레이드의 경우 저렇듯 종종 공개적으로 참여 인원을 모으기도 했다. 세이나가 등급을 올린 결정적인 임무 대부분이 바로 저 칠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이나는 옛 생각에 잠겨 칠판을 올려다보았다.
혼자서 저곳을 서성거리며 사람들의 눈치를 열심히 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끌어 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찾아온 협회였다.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친우들은 세이나가 헌터가 된 것을 다소 늦게 알았다. 은퇴한 이들 중에는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세이나가 알리지 않았다. 그걸 알면, 분명 그들이 막을 것으로 생각해서. 눈치챌까 봐 성도 없이 처음엔 이름만 올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맨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어딜 가도 한 사람의 몫을 할 만큼 성장하긴 했으나…….
여전히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세이나가 씁쓸함을 느끼며 입 안을 씹던 바로 그때였다.
“세이나!”
우렁찬 목소리에 1층에 있던 인원 대부분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세이나도 그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2층 계단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는 얼굴.
“이런.”
긴 코트 자락을 나부끼며, 그가 성큼성큼 2개씩 계단을 뛰어넘었다. 밝은 오렌지색 머리칼이 눈 깜짝할 사이 바로 앞에 도착해 버렸다.
오웬은 숨도 제대로 고르지 않고 활짝 웃으며 세이나에게 인사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세이나는 당황스러웠다.
‘얘, 얘가 왜 이러지?’
오늘의 오웬은 매우 깔끔한 차림새였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진 않았지만, 검은 코트에 안에 입은 옷도 정장에 가까웠다.
어제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하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그러나 세이나를 당황하게 한 건 바로 그 괴리감이 아니었다. 갸름한 얼굴 위로 해맑은 미소가 가득 번진다.
“협회에는 무슨 일이에요?”
누가 봐도 아주 친밀한, 반가운 사람을 만난 표정.
‘진짜 머리 맞고 어떻게 된 거 아냐?’
어제의 결말은 분명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세이나는 결국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 힘껏 오웬의 이마를 때려 버렸다.
오웬은 거의 울 뻔했고, 고통에 바닥을 뒹굴었다. 세이나는 그런 그에게 끝끝내 상자까지 쥐여 주며 냉정하게 말했다.
- 돌아가세요.
그런 짓을 한 여자를 오웬은 반가워하며 찾아왔다. 스치듯 마주친 것도 아니고 저 멀리서부터 발견하고 뛰어와 붙잡았다.
세이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저 오웬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던 중,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나 로힐이잖아?”
“그 옆은?”
“설마, 오웬?”
수군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원래 협회의 유명 인사인 그녀다. 최근 마르셀과 있었던 사건은 그녀가 저지른 기행 중에서도 특이점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유명 인사와 유명 인사. 1명으로도 신기한데 2명이나 붙어 버렸다. 사람들의 눈이 흥미로 빛나기 시작한 것을.
세이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 이래서 협회에 오기 싫었는데.’
사람들을 피해 요리조리 잘 숨어 다니자는 작전은 협회에 발을 들인 지 5분도 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세이나?”
“네.”
그러고 그녀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왜요?”
“그게…….”
주변을 둘러싼 소리가 오웬에게도 닿지 않을 리 없었다. 곁눈질로 사람들을 살피던 그는 어렵게 다시 세이나에게로 시선을 맞추었다.
잔뜩 화가 난 미간. 더하여 불편함까지 세이나는 거리낌 없이 내비쳤다. 오웬은 괜히 제 목덜미를 한번 쓸어내렸다.
아차, 실수했구나.
그리 생각하는 눈이었다.
“반가워서요.”
“아, 네.”
짧은 대답을 뱉자마자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거침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웬은 급히 그녀의 옆에 붙어서며 말했다.
“저 여기 혹 생겼어요.”
“잘됐네요.”
“근육통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더군요.”
“아, 무척 잘됐네요. 그건.”
“평소에도 청소를 세심하게 하세요?”
“네. 저는 결벽증이라서요.”
사실 세이나는 결벽증 따위 없으며 지저분한 야외에서 며칠 동안 노숙한 전력도 많았다.
대충 대꾸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튀어나와 버렸다. 그래도 굳이 정정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리 듣든 말든.
오웬은 완전히 그녀의 관심 밖에 있었다.
“세이나.”
“왜 자꾸 불러요?”
세이나가 짜증스레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오웬은 그녀의 바로 옆에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몇 발자국 멀리 떨어진 뒤에 멈춰 선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때문에 협회를 떠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세이나는 어느새 자신이 협회의 출입문까지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그를 피해 발이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셈이 되었다.
“정말 인사하려고 온 거예요.”
오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묶여서 심문당할 때도, 걸레질할 때도, 심지어 맞은 직후에도 보이지 않았던 슬픈 얼굴에 세이나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결국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두 사람의 거리도 좁혀지지 않았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오웬은 다가올 때만큼이나 떠나는 것도 빨랐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울렸고 사람들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세이나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발치를 주목했다.
생동감 있게 휘날리던 코트 자락은 이제 무거운 추라도 달린 것처럼 축 처져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세이나가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심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