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60화 (60/179)

#60

솔직히, 오웬은 여전히 라샤드를 믿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이해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라샤드는 어떻게 반지를 잃어버렸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마족의 일기장도 의심스럽다.

솔직히, 꾸미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지 않을까.

그 일기 전부를 거짓으로 꾸며낸다면, 지극정성이 맞았다. 그리고 세상에는 지극정성으로 조작을 하는 이들도 가끔 있었다.

‘쉽게 믿을 수는 없지.’

그는 오늘도 세이나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할까 고민하던 그때 마침, 엘렌이 세이나의 집으로 찾아왔다.

대화를 전부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세이나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 버렸다. 덕분에 오웬은 세이나가 고통받는 과정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유클레스, 라는 단어만 안 들린단 말이지?’

그런 마법이 있었던가. 생각하는 사이 두 남자가 집으로 돌아왔다.

오웬은 위치를 바꿔 반대편으로 향했다. 세이나가 답답함에 열어 둔 창문 아래에서 몸을 숨기고 안의 소리에 집중했다.

라샤드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말했잖아요. 집을 지켜야죠. 엘렌이 이 거리에 남아 있는 이상, 마물은 계속해서 나타날 거예요.”

그러고 긴 한숨소리가 나왔다. 오웬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세이나 로힐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반쯤 감은 채, 늘어져서 힘들게 공작을 마주하고 있으리라.

짧은 침묵 후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리고 저는 헌터죠.”

순간 오웬의 몸이 크게 휘청했다.

상상과 전혀 다른 답변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가 예상한 바는 이러했다.

‘너희끼리 알아서 잘해 봐.’

그러나 세이나 로힐은 그러지 않았다.

“꽤 책임감 있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힘이 생겨났다. 오웬은 그녀에게서 어떤 결의마저 읽을 수 있었다.

“집을 지키는 김에 겸사겸사 엘렌을 구하는 일에도 협조할게요.”

“…….”

“아, 그렇다고 후작이랑 마족과 함께 맞서 주겠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그런 능력까진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마물까지. 응?”

“그래.”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는 그 이후에 튀어나왔다.

“고마워.”

하마터면 숨어 있는 처지를 잊고 고개를 쳐들 뻔했다. 오웬은 손바닥으로 제 귀를 퍽퍽 두들겼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야.

“네가 날 쫓아내도 받아들이자고, 각오하고 있었거든.”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걸요.”

칼만 공작. 숙부부터 사촌, 제 자리를 위협하는 모든 가족을 없애 버린 냉혈한. 감히 다가갈 수도, 마주하기도 어려운 남자. 그 무서운 눈빛만 마주쳐도 돌로 변한다든가. 아무튼.

그를 의심했기에, 오웬은 그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 미친 별명들은 그가 걸어온 과거에 퍽 적절했다. 그래서 더욱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칼만 공작은 악역에 어울리는 남자였다.

이런 곳에서 평민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쨌든, 다 같이 때려잡아 봅시다. 마물.”

진심인가? 오웬은 더는 참지 못하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세이나 로힐이 날카롭게 옆을 노려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웬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급히 다시 몸을 숙였다. 아니, 완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가슴에서 방망이질이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단 한 장면, 홱 고개를 돌리던 세이나 로힐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들켰나?’

이글거리는 태양같이 강렬한 금색 눈동자였다. 굽이치는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작은 얼굴에는 오싹한 분위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서 저를 발견한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문을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제가 말한 대로 두 분 다 공부해 주세요.”

오웬은 겨우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까지, 고작 찰나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흐른 식은땀이 그의 이마를 가로질렀다.

오웬은 무릎을 끌어안으며 창틀 아래로 조금 더 제 몸을 욱여넣었다. 남이 앞에 있다면 절대로 보여 주지 않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디온?”

“윽.”

“왜 대답이 없죠?”

“오늘은 열심히 했으니까…… 내일부터 시작하면 안 될까요? 어, 이제 식사도 해야죠. 각하께서 아주 맛있는 메뉴를 발견하셨다 합니다.”

“맛있는 메뉴요?”

“직접 만들어 주시겠답니다.”

그리고 오웬은 또다시 경악했다. 요리해 줘? 공작이?

“내가 언제?”

‘그래, 역시 아니지?’

“그 요리는 아직 준비가 더 필요해. 너무 어려워.”

‘진짜냐?’

“어떤 건데 그래요?”

“아, 어떤 거냐면…….”

충격적인 상황의 연속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여기서 요리 이야기로 왜 넘어가는 건데? 마물은? 엘렌은? 계획은? 이게 끝이야?’

끝이었다.

그들이 주방으로 넘어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와중에도 토론은 이어졌다. “당근은 빼죠.” 은발 사내의 목소리였다.

‘대체 뭐야, 저 조합.’

오웬은 음식 냄새가 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그러고도 믿기지 않아 몰래 들여다보고,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를 걸을 땐 무심코 주린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놀랍게도, 칼만 공작의 요리는 꽤 냄새가 좋았다.

‘그래도…… 칼만 공작은 아직 의심스러워.’

하지만 그를 협박하기는 쉽지 않다. 저택에 침입할 수도 없고, 정면으로 싸우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까.

“세이나 로힐.”.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경쾌해졌다. 목표와 방법이 제대로 세워졌고, 계획들도 떠올랐다.

수백 가지나 되는 아이디어들의 콘셉트는 하나였다.

‘세이나 로힐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또 그 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하나, 찾아갈 이유가 있긴 하지.’

그리하여 다음 날.

오웬은 세이나의 집 현관에서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세이나는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을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웬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게 더 황당하여, 묻게 되었다.

“무슨 약속이요?”

“때리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웬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으러 왔습니다. 세이나.”

세이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겸사겸사 엘렌을 구하는 일에도 협조할게요.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해 뒀지만.

세이나는 다음 날이 되도록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결정은 내렸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단, 엘렌에게 위험을 알려야 할 것 같아. 과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마물이 나타나는 것까지라도 알아야 엘렌도 조심할 텐데.’

그런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세이나는 자신의 말솜씨를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황이 원체 기가 막혀서 말이지.

제국 수도에서 마물이 나타난다는 말을 누가 믿어 준다는 말인가.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알려진 곳이다.

정신병자 취급받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끈대는 머리를 붙잡고 있는데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나는 현관문 앞에 등장한 오웬을 보고 굳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와 달리, 그가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맞으러 왔습니다. 세이나.”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지만…….

욕은 할 수 있다.

“……미쳤어요?”

제 발로 찾아와 맞기를 바라다니.

“아니면 변태신가?”

당황스러움에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말이 정제되지 않고 바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런 노골적인 적의에도 오웬은 계속 웃고만 있다.

정신병자? 바보? 혹시 디온이랑 빠져나온 사이에 공작이 고문했어?

그래서 어떻게 되어 버린 건가?

“사과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뭘요?”

“무턱대고 총을 들고 와서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 변명하자면…… 정말 세이나가 공작님께 협박받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구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아, 네.”

“물론, 지금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제멋대로 오해했어요. 사과드립니다.”

제법 친절한 말투였다. 자세도 바르고, 바라보는 눈빛에는 죄의식도 있었다. 사과를 위해 방문해서인지 옷차림도 깔끔했다.

그래도 세이나는 매정했다.

“끝났죠?”

쾅!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디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소파에 앉아 살짝 턱을 들어 세이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손에는 억지로 쥐여 준 ‘마물 도감’이, 몸은 팔걸이에 반쯤 기대어 있다.

그의 첫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세였다. 그러나 세이나는 이제 위화감도 느끼지 않았다.

“잡상인이에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세이나! 세이나!?”

“……치곤 끈질기네요.”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세이나는 조용해진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불투명한 유리 밖 그림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좌우로 왔다 갔다, 불안한 듯 서성이고 있었다.

어쩌면 열릴 때까지 저러고 있을지도.

‘알 게 뭐람.’

그렇게 생각하고 막 발걸음을 옮기는데 왼쪽 창문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오웬이 창문을 뜯고 들어오는 건가. 세이나는 바짝 긴장해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에 그림자는 없었다. 정체는 그저, 바람이었다.

수도의 계절은 이제 겨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밖은 몹시 쌀쌀했다.

‘감기 걸릴 텐데.’

그녀가 혀를 찼다. 역시, 알 바 아니다. 감기에 걸리든 말든. 그런데 쉽게 문 쪽에서 떨어지기가 힘들다.

그림자는 사라졌다. 하지만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오웬은 이제 그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세이나는 마음이 약하네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세이나가 다시 디온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디온이 그녀의 뒤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조금 몸을 틀면 바로 닿을 거리였으나 세이나는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그가 가까이 있는 게 이제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게 느껴졌다.

“각하도 용서하지 않았습니까.”

“제대로 사과받았어요. 이후에 빚진 것도 있고.”

오늘 라샤드는 급하게 처리할 용무가 있어서 오지 못했다. 다른 이를 보내겠다는 아론에게, 세이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답했다.

디온에, 이제는 자신도 엘렌을 신경 쓰고 있다. 굳이 다른 이를 또 부를 필요까진 없었다.

“그럼 저 사람은요?”

“네?”

“저 사람도, 용서했나요?”

용서. 용서라. 사과를 받긴 했는데 말이지.

“종일 저러고 있을 것 같은데.”

“흠…….”

“제가 해결할까요?”

“어떻게요?”

그때, 푸른색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세이나는 깨달았다.

‘아.’

디온의 양아치 스위치가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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