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세이나는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그리고 욕도 하고 싶었다.
‘망할 유클레스 후작.’
망할 후작 부인. 망할 그 애새끼들.
대체 애를 어떻게 굴렸기에 저런 상처가 몸에 여럿이란 말인가. 대체 뭘 했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문득 글로 읽었던 엘렌의 과거가 떠올랐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세이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갑갑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건 그저 일부에 불과했다. 글에는 엘렌이 상처까지 입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으드득. 이가 갈렸다. 세이나는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했으면서.
‘또 찾고 있다고?’
만약, 유클레스 후작이 엘렌을 찾으면…….
찾으면, 이번엔.
‘어떻게 되는 거지?’
늘 그렇듯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일단 감금부터 하겠지. 그리고…….’
돌연 손끝에 온기가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엘렌이 세이나의 손을 잡아끌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괜찮아요!”
밝고 활기찬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세이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어느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에 생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좋은 일만 있었는걸요! 일도 마음에 들고…… 그리고…… 세이나도 있잖아요!”
“네?”
“이상한 변태들도 몰아내 주고, 공작님에 대해서도 미리 경고해 줬잖아요?”
“…….”
“세이나의 조언이 없었다면 저는 결국 공작님을 따라갔을 거예요.”
“그, 그렇군요.”
“저는 이곳에서 행복해요.”
맞잡은 손은 몹시 따뜻했다. 엘렌의 눈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집 자체가 평소보다도 유난히 따뜻한 느낌이었다.
엘렌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세이나. 제 이웃이 되어 줘서.”
* * *
엘렌이 가져온 쿠키는 세이나도 익히 잘 아는 것이었다.
그녀가 거의 매일 방문하는 빵집의 물건. 그리고 거의 매일 방문할 만큼이나, 실력 있는 주인의 작품이다. 세이나는 오도독 소리를 내며 쿠키를 씹었다.
그런데 맛이 안 느껴진다.
‘망할, 어떻게 말을 꺼내지?’
쿠키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세이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의 말재주가 나쁜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뭐라고 시작하지? 네 아버지가 널 노리고 있어? 그리고 마족도 널 노리고 있지. 그래! 넌 성녀였던 거야! 와우!’
잘 말하지 않으면 미친 사람으로 오인당하기 딱 좋다.
문제는 그밖에도 또 있었다.
‘과거를 알고 싶지 않다잖아.’
엘렌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차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가족을 이야기하면서 보였던 우울함이 씻은 듯 사라진 뒤였다.
그런데 다시 과거를 입에 올린다고?
‘내가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왠지 몹쓸 짓을 하는 기분이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절벽에서 떠미는 악인이 된 것만 같다. 세이나는 다시 쿠키를 씹어 보았다.
역시,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차 맛이 좋네요!”
“아, 네…… 하하. 그렇죠? 좀 더 드릴까요?”
“정말요?”
엘렌이 눈을 반짝이며 물어 왔다. 세이나는 다시 한번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엘렌이 그녀를 따라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정말 고마워요!”
이 얼굴을 또 한 번 슬프게 만들어야 한다니.
죄악감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명치를 꾹 누르는 기묘한 통증을 느끼며 세이나는 깊이 숨을 골랐다.
그리고 엘렌을 마주 보았다.
‘그래도 자신을 노리고 있는 위협에 대해서는 말해 줘야지!’
모르는 것보다 알고 있는 편이 더 안전하다.
엘렌의 과거를 들은 후에도, 세이나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저기, 엘렌. 사실 저도 오늘 할 말이 있는데…….”
“네?”
“유클레스 후작.”
거기까지 말하고 세이나는 다시 숨을 골랐다. 무겁게만 여겼던 이름은, 생각보다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넘었다.
엘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세이나는 가슴 아프도록 쿵쿵대는 심장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아나요?”
그러자, 엘렌이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세이나.”
세이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
똑같은 문답이 계속 이어졌다.
“누구라고요?”
“유클레스 후작이요!”
“누구?”
“유, 클, 레, 스!”
“네?”
다시금 힘껏 크게 소리쳐 봤건만, 엘렌은 여전히 영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세이나는 답답함에 제 가슴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은 엘렌의 귓구멍을 잡아 늘이거나!
“말씀하셔요. 세이나.”
“유클레스 후작이요!”
그리고 이제는 패닉에 빠질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렌은 가만히 앉아서 커다란 눈을 껌뻑일 뿐이다.
맑고 순수한 눈동자였다. 그 빛깔이 퍽 예뻤으나, 세이나의 갑갑함을 달래 주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아, 안 들려요?”
엘렌이 끄덕였다.
“네.”
‘무슨 고요 속의 외침도 아니고.’
벌써 몇 번이나 유클레스 후작을 외쳤는지 모르겠다.
어찌나 소리를 높였는지 이젠 목이 따끔거렸다.
이쯤 되면 유클레스 후작마저도 ‘누가 날 이렇게 간절하게 부르지?’라고 한 번쯤 돌아볼 만하다 싶었다.
그러나 엘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반응하지 ‘못 한다’에 가까웠다.
“후작! 후작은 알죠!?”
“네. 알죠.”
“유, 클레스 후작이라고……!”
“어떤 후작님이요?”
“유클레스요!”
“누구?”
너 나 놀리냐!?
……라고 외쳐 주려던 그때, 돌연 기침이 튀어나왔다. 너무 열심히 소리를 쳤던 탓이다.
콜록! 콜록! 기침을 쏟아 내는 세이나를 보며, 엘렌이 몹시 당황하여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세이나! 괜찮아요?”
“콜록! 유클……! 콜록! 콜록!”
“자, 잠깐만 기다려요! 마침 목감기에 좋은 약이 있어요! 가져올 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엘렌은 쏜살같이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돌아온 후에도, 세이나는 기침을 하고 있었다. 목이 미친 듯이 따가워서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물! 물 드릴게요! 잠깐만요!”
엘렌은 그러고도 꽤 오랫동안 세이나를 옆에서 간호했다.
함께 있는 내내, 세이나는 후작의 이름을 다시 입에 올렸으나.
엘렌이 그 이름을 듣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세이나, 목감기가 정말 심각한가 봐요.”
세이나는 차라리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유클레스 후작을 인식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엘렌은 너무 아프면 꼭 자신을 불러 달라는 당부를 남긴 채 집을 떠났다.
“……강적이네요.”
라샤드와 디온은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세이나는 기진맥진하여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몸을 일으켰으나, 곧 기운이 없어서 다시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말았다.
정말,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꿈에서도 유클레스 후작이 나올 것 같다.
“그렇지.”
라샤드가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알아차리는 눈빛이었다.
세이나는 바로 라샤드가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가서 해 봐.’에는 이런 허탈함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기억을 지운 거죠?”
“그래.”
라샤드가 끄덕였다.
“누가 그랬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어.”
“어떤 놈인진 모르겠지만 아주 지독하네요. 유클레스 후작의 이름조차 듣지 못하게 하다니.”
“엘렌이 지독한 거죠.”
디온은 세이나가 있는 소파에 앉았다. 팔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엘렌이 가지고 온 약을 살펴보며 말을 이어 갔다.
“마법사는 엘렌이 바라는 대로 해 줬을 겁니다.”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전혀 상관없는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그게 이상해서, 세이나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디온이 덧붙였다.
“아, 저도 엘렌에게 후작에 대해 말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예민한…… 거겠지?’
너무 지쳐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엘렌의 간호는 너무 지극정성이라,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곱게 허락하지 않았다.
와중에도 유클레스가요, 유클레스도, 유클레스라니까! 등등 다양한 어미를 붙여 가며 빈틈을 찾으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니, 지칠 만도 했다.
하지만 엘렌은 떠나는 직전까지도 ‘유클레스’라는 이름을 듣지 못했다.
벽을 보고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마법이 정말 있나요? 어떤 단어를 못 듣게 하는…… 그런 마법?”
“마법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니까요.”
디온이 어깨를 으쓱한 후 약 봉투를 내려놓았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유클레스 후작의 이름을 듣는 것조차 싫다는 뜻이겠죠.”
세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결국, 진실을 알리는 작전은 실패했다.
다른 작전을 강구해야 하는 시점. 그러나 세이나는 좀처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유클레스 후작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니, 엘렌?’
* * *
그 시각.
세이나의 집 근처를 서성이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꽤 큰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민첩한 행동과 암살자와 같은 은신으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장시간 주변에 머물 수 있었다.
그 그림자는 오늘 하루 동안 세이나의 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두 남자가 세이나의 집을 떠난 것과 소녀가 세이나의 집을 방문한 것.
그리고 세이나가 그 이름을 외치는 것 역시.
그림자, 오웬이 중얼거렸다.
“유클레스 후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