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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58화 (58/179)
  • #58

    “아, 디온도 돕기로 했어요.”

    디온과 달리 비교적 라샤드는 책들에 호의적이었다.

    그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책 하나를 집어 들다 말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세이나는 설명을 이어 갔다.

    “사실 디온은 엘렌이 기억을 잃기 전부터 아는 사이예요. 그래서 돕겠다고 하네요.”

    “엘렌과?”

    “아주 오래된 친구예요.”

    라샤드의 시선이 디온으로 향했다.

    맞은편의 남자는 누가 봐도 억지로 끌어 앉혀져 있는 모습이었다.

    반쯤 감긴 눈, 삐쭉대는 입술, 손안에서 돌리고 있는 펜까지.

    나머지 시험을 치고 있는 불량 학생 같다.

    라샤드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벌써 세 번쯤 ‘일어나야겠다.’라고 다짐을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식탁을 짚는 것 이상으로 진행이 되지 않았는데, 당연히 세이나 때문이었다.

    디온이 세이나를 곁눈질한 후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곧이어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그게 무척 우스워 라샤드는 힘껏 웃음을 참아야 했다. 항상 자신만만한 낯으로 저를 놀리던 남자는 오늘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웃음을 가리기 위해 입가를 꾹 누르며 말했다.

    “크흠, 그래. 전력에 도움이 되겠군.”

    “공작님도 마물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다고 했고. 공부가 필요해요.”

    “있긴 있어.”

    “몇 번이나?”

    “네 번.”

    “여기서 만난 것 포함?”

    답변은 없었다. 침묵은 대체로 긍정이었기에, 세이나는 턱을 괴며 물었다.

    “원정은 안 나갔나요?”

    “대규모 마물 토벌은 15년 전이 마지막이야. 그 외에는 신전이나 황실 기사단이 직접 나서서 토벌해 왔지. 헌터들을 고용하거나.”

    “아, 그렇겠군요. 요즘은 헌터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15년 전에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라샤드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표정이 무거워지고, 분위기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시기와 겹치나 보다.’

    세이나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생각해 봤는데. 엘렌에게 가서 직접 이야기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뭐?”

    “모든 것을 설명하자는 뜻이에요. 그러면 대응하기도 한층 더 수월해질 거잖아요. 엘렌의 협조를 얻어, 마족을 유인할 수도 있고.”

    어쩌면 이제 공작저로 가겠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그건 세이나에게 가장 좋은 방향이었다.

    엘렌이 이사 가면 이 거리에 더 이상 마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세이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습관적으로 현관으로 향하던 세이나는 불투명한 창 너머로 비친 인영을 발견했다. 키가 작고, 몸도 왜소해 보인다.

    그 정체는 바로 다음 순간 드러났다.

    “세이나! 안에 있나요?”

    “엘렌?”

    세이나는 식당 쪽을 홱 돌아보며 외쳤다.

    “엘렌이에요!”

    “잘됐군. 가서 해 봐.”

    “해 보라고요?”

    라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말?”

    “자리를 비켜 줄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뒷문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 디온에게 손짓해서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부를 안 해도 돼서 즐거운지, 디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라샤드를 따랐다.

    세이나는 그들이 떠난 후에도 멍하니 식당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 의문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정말 엘렌에게 과거를 말해도 돼?’

    엘렌의 기억이야말로 원작의 핵심이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모든 것을 밝히라고?

    나는 고작 엑스트라인데?

    “세이나?”

    “아, 지, 지금 나갈게요!”

    세이나는 허둥대며 현관으로 바삐 달려갔다.

    정오의 햇살 아래 나타난 여주인공은 마치 후광을 등에 업은 듯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앳된 얼굴, 금색 머리카락, 호수처럼 맑은 두 눈동자. 가녀린 어깨에 옅은 하늘색 원피스.

    말 그대로 ‘여주인공’의 전형이라고 해도 좋을 외모의 소녀였다. 엘렌이 방긋 웃으면서 물었다.

    “바쁘신데 제가 찾아왔나요?”

    “아, 아니에요. 전혀 바쁘지 않아요. 무슨 일이에요?”

    “쿠키를 샀는데, 너무 많이 남아서 나눠 먹으려고요. 드릴 것도 있고.”

    “드릴 것?”

    나무 바구니를 들어 올려 보이며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뭔가를 맡겨 두었던가. 짧게 고민하던 세이나는 곧 비켜섰다.

    “일단, 들어오세요.”

    여주인공의 첫 옆집 방문이었다.

    방금 라샤드와 나눴던 대화 때문일까. 세이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하여 엘렌이 들어오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매우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하늘색 눈동자가 빛나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집이 멋지네요.”

    “하하, 그래요?”

    “네, 특히나…… 여기 이…….”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춰 섰다. 그 끝을 따라가던 세이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발견하지 못한 채, 엘렌은 종종걸음으로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시선은 계속 고정되어 있었다.

    소파의 바로 옆. 낮은 협탁 위에 있는 것은.

    드래곤이었다.

    “역시 헌터의 집이에요. 이건 뭐죠? 마도구인가요? 아니면 전리품? 아니면 정말 드래곤의 유물인 걸까요?”

    “……램프인데요.”

    “아.”

    세이나는 난감해하는 눈으로 디온이 사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작품을 바라보았다. 선물로 주려고 했건만, 어쩌다 보니 세이나의 집에 자리를 잡아 버렸다.

    그것도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위치였다.

    엘렌이 바로 발견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평범하지만 아늑한, 거실 속에 쩍 드래곤이 입을 열고 손님을 노려보고 있으니.

    와, 정말 안 어울린다.

    “멋진 취향이에요!”

    그러나 엘렌은 주인을 무안하게 만들지 않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고, 고마워요.”

    “정말 잘 만들었네요. 예뻐요!”

    세이나는 엘렌에게 자리를 권한 후 부엌으로 향했다.

    차를 준비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트레이와 함께 돌아왔을 땐, 엘렌이 테이블 위에 바구니 안의 내용물을 펼쳐 놓은 뒤였다.

    다양한 모양의 쿠키들이 예쁜 쟁반 위에 올려져 있다. 하지만 세이나의 시선을 끈 것은 그 옆에 있는 작은 케이스였다.

    “이건……?”

    “약이에요.”

    “약?”

    “얼마 전에 왼손을 다치셨잖아요. 맞죠?”

    그 말에 세이나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정석을 터트린 대가로 남았던 울긋불긋한 상처는 이제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다.

    세이나가 원체 회복이 빠르기도 하고, 의사의 치료도 매우 적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엘렌은 조금 멍해졌다. “아.” 하고 짧게 뱉은 소녀는 곧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늦게 전달 드려서 미안해요. 제가 옛날에 만든 레시피가 있는데, 수도에서는 그 재료를 찾는 게 좀 까다로워서요……. 게다가 주문 제작까지 해야 해서, 좀 오래 걸렸어요…….”

    세이나 역시, 멍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팠다고 엘렌에게 말한 적이 있던가?’

    전혀. 애초에 세이나는 제 상처를 자랑스레 보이는 부류도 아니었다.

    그런데 엘렌은 세이나의 상처를 알아보았다. 알아보고, 걱정해 주고, 이렇듯 약도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세상에, 여주인공씨. 너무 착한 거 아냐?’

    게다가 직접 만들었다고도 했다.

    뜻밖의 친절에 세이나는 차마 말도 잇지 못한 채 엘렌을 빤히 쳐다보았다.

    엘렌이 그녀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케이스를 내밀었다.

    “받아…… 주실래요?”

    하얗고 작은 손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떨리고 있기도 했다. 혹여 거절당할까, 불안해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세이나는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죠.”

    엘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세이나는 그녀의 손을 감싸며 엘렌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잘 쓸게요. 고마워요, 엘렌.”

    엘렌의 낯빛이 금세 밝아졌다. 오히려 엘렌의 쪽이 선물을 받은 사람 같다.

    받아 든 케이스는 엘렌의 손만큼이나 따뜻했다. 차를 준비하는 동안, 꽉 쥐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면서.

    ‘진짜 착하네.’

    그래서 궁금해졌다.

    “저기, 엘렌.”

    “네?”

    “엘렌은 여기 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나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엘렌에게서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너무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나.

    세이나가 자책하던 바로 그때,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전 기억이 흐릿해요.”

    “전부?”

    “네. 전부. 숲속에 쓰러져 있던 절 신전분들이 찾아 주셨죠. 신전에서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난 후에 이곳에 이사 온 거예요.”

    “그렇군요…….”

    “식물에 대해서도 신전에서 배웠어요. 주변이 온통 숲이었어요. 헌터분들도 많이 만났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약학에 대한 지식도 늘었어요.”

    “외진 곳이었나 보네요.”

    “네. 그러다 어떤 헌터 분을 도와 드렸는데 보상금을 엄청 많이 주셨거든요. 거기다 신전 분들이 도와주셔서 이 집을 살 수 있었어요.”

    “아, 그랬던 거군요.”

    “과거는 기억나지 않지만…….”

    말끝을 흐린 뒤, 엘렌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슬퍼 보이기도 했다.

    “어째서인지, 제 이름은 또렷해요.”

    “부모님을, 찾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네.”

    단호한 대답에 세이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엘렌이 손을 든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걷어 냈다.

    오른쪽, 이마 위. 평소에는 가려져 있던 그곳에 제법 큰 흉터가 남아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생긴 상처라고, 사제님이 말씀하셨어요.”

    “세상에.”

    “이것 말고도 꽤 많아요.”

    “……이것, 말고도?”

    “아무래도 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나 봐요.”

    그녀의 손이 내려가자 예쁜 소녀가 돌아왔다. 엘렌은 쉽게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이나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저는 제 과거가 궁금하지 않아요. 알고 싶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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