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57화 (57/179)
  • #57

    8. 기다림의 맹세

    디온은 한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자마자, 세이나는 결심과 달리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기에, 그녀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제 팔뚝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야 집 때문이고. 공작님은…… 뭐, 책임감 때문인가? 어쨌든.”

    아주 차분하게. 한 단어, 한 단어에 신경 써서.

    부디 듣는 이가 기분 나빠 하지 않도록.

    “엘렌의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공작님께 맡겨요. 저래 봬도 공작이기도 하고. 실력이 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니까요.”

    그의 많은 별명은 대부분 사실과 달랐다. 그래도 ‘소드 마스터’라는 것까지 헛소문일 리는 없다.

    일단, 그는 남주인공 후보였으니.

    “이미 한 번 엘렌을 구하기도 했잖아요? 공작님이 알아서 잘할 거예요. 디온도 이제 알겠지만, 그렇게 무례한 사람도 아니에요. 첫 만남 같은 불상사는 없을 거예요.”

    라샤드와의 생활도 제법 적응되었다.

    “그러니까 공작님께 모두 맡기고 더 위험해지기 전에…….”

    “잠깐. 잠깐만요. 세이나.”

    그때, 디온이 세이나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큰 충격에서 헤어 나온 그는 이제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매우.

    “제가 위험해진다고요?”

    그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네. 그렇게 말했잖아요.”

    “내가 언제…….”

    “공작저에서요. 기억 안 나세요?”

    “그건……. 네, 하, 그때, 그랬긴 했지만.”

    “마물이랑 싸워 본 것도 저번이 처음이라고 했고. 마물도 싫어하잖아요. 이곳은 이제 사건·사고의 중심이 될 거예요. 위험하다고요!”

    “제가, 마법을, 쓸 줄, 아는 걸, 잊었습니까?”

    그가 짓씹어 뱉듯 말했다. 세이나는 더 단호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 그리고 폭주에 이를 뻔했죠.”

    디온은 뒤통수라도 거하게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멍하니 입을 몇 번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힘없이 떨군 고개를 향해 그녀가 말했다.

    “자칫 잘못됐으면 죽었을 거예요.”

    차마 말하기도 끔찍했다.

    세이나는 아직도, 그날의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디온을 볼 때마다 그날이 떠올랐다.

    땀에 젖은 작은 얼굴. 데일 듯 뜨거운 열기.

    어려진 디온이 눈을 뜨기 직전까지, 세이나는 정말 불안함에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아, 남자 조연에게.

    남주인공 버프는 없구나.

    “엘렌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여기 일에 휘말렸다가 다칠 수도 있어요. 제 동료 중에서는 다리가 썰리거나, 손목이 날아가거나…….”

    디온이 그런 일을 당하는 모습은 차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하는 말로, 디온이 섭섭함을 느낀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번처럼 또 휘말리고 말 거예요. 당분간은 오지 않는 게 좋아요.”

    “저도 도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재차 고개를 젓던 그때, 갑자기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디온이 계단을 올라, 그녀에게 바짝 다가온 것이다. 딱 알맞게 맞춰져 있던 눈높이가 위로 뛰고, 그가 훅 앞으로 다가왔다.

    세이나는 그의 얼굴을 좇아 고개를 살짝 젖혔다. 다시 올려다본 디온은…….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다.

    “정말, 앞으로 오지 말아요?”

    세이나는 큰 곤란함을 느꼈다.

    그의 그늘진 얼굴이 삽시간에 슬픔에 잠겼다.

    두 눈은 우수에 가득 차 있었다. 냉정한 사람이라도 당장 ‘누가 괴롭혔어!?’라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만큼.

    간절하고, 절박했다.

    ……따지고 보면 그 ‘괴롭힌 사람’은 자신일 테지만.

    ‘진짜 반칙이야.’

    저런 얼굴을 들이밀며 부탁하니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긴 속눈썹이 흔들리며 당장 또르륵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번복하기도 어려웠다.

    저 예쁜 얼굴이 이 집에서 피투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물은 그토록 위험했다.

    세이나는 강경하게 나가기로 했다.

    “안 돼요.”

    “세이나.”

    “다칠지도 몰라요. 아니, 다칠 거예요. 확실해. 디온은 아직 마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무 감정 없이 사람을 막 죽이는, 그런 놈들이라고요.”

    그녀는 그러고 이마를 짚었다.

    “거기다 마족이라니. 분류하자면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마물이라고 봐야 해요. 사람을 잡아먹는 건 기본일 테고.”

    “…….”

    “이야기 들었잖아요. 성녀의 피를 마신다고.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혐오스럽지 않아요?”

    직후 바로 정적이 찾아왔다.

    세이나는 살짝 내린 시야 속에서 디온이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을 보았다.

    충격을 주려고 일부러 세게 말했는데. 그것 때문에 겁을 먹은 걸까.

    하지만 물러서는 기색은 전혀 없었기에 그녀는 다시 고민에 빠져야 했다. 여기서 더 매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세이나는 저를…….”

    한참 후, 다시 디온의 입이 열렸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두고 모르는 척하는 나쁜 놈으로 만들고 싶은가 보군요.”

    “그, 그건…….”

    “이미 사정을 다 들어 버렸는데, 외면하고 있으라니. 정말 냉정하시네요.”

    “외면이 아니라…….”

    “저와 엘렌이 어떤 사이인지 아시면서.”

    “저는 디온을 걱정하는 마음에 권하는 거예요!”

    “저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은 진심이 틀림없었다.

    그려 낸 듯 수려한 얼굴 속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다. 세이나는 다시금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정말 엘렌을 걱정하고 있구나.’

    하긴, 좋아하는 여자가 위험에 처했다는데 누군들 모르는 척 넘길 수 있을까.

    세이나는 자신의 권유가 처음부터 아주 잘못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이 집에 머물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이 미인계에 참 약하다는 것도.

    “그럼 하나…… 조건이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디온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가 반색하며 말했다.

    “세이나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뭐든지?”

    “네.”

    고민하듯 제 이마 옆을 꾹 누르던 세이나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디온은 몇 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꼬리를 치며 따르는 강아지랑 겹쳐 보이기도 하고.

    “정말, 싫어하는 일이라도?”

    “싫어할 리가 없죠. 세이나가 부탁하는 건데요.”

    기분이 좋아진 그는 말도 참 예쁘게 했다. 세이나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정말 감동적이네요. 디온.”

    *

    그리고 다음 날.

    “……뭐 하나?”

    여느 때와 같이 세이나의 집을 방문한 라샤드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가 발을 들인 장소는 식당. 낡지만 커다란 식탁 위, 온갖 책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괴상한 마물이 그려진 책자도, 뱀처럼 기어가는 글씨가 빽빽이 채워진 종이도 아니었다.

    디온은 식탁 옆에 얌전히 앉아 뭔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흘깃 라샤드를 본 디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면 모릅니까?”

    보면 알지. 알긴 아는데…….

    라샤드는 애써 침착하게 펼쳐져 있는 책들을 다시 훑었다. 꽤 많은 책이 나와 있지만, 그중 어느 것도 소설은 아니었다.

    사각. 사각. 디온이 다시 펜을 움직였다.

    뚱한 얼굴로 입술도 조금 내밀고 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라샤드는 기묘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겪은 디온 프라벨이라는 남자는, 하기 싫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성미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 공작님! 마침 잘 왔어요.”

    식당으로 들어서는 세이나는 또 다른 책들을 가득 들고 있었다.

    방향을 보니 2층 서재에서 가져온 듯했다.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쌓인 책의 탑을 보고, 라샤드가 아연실색해서 물었다.

    “세이나. 이게 대체 뭐야?”

    “응? 어제 다 결론 내린 것 아니었나요?”

    쿵. 책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라샤드가 멍하니 그걸 보는 것과 달리, 디온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그가 남은 한쪽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마물이 올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제부터 철저하게 대비해야죠.”

    “……대비?”

    “네.”

    세이나가 책의 가장 위를 쓰다듬었다.

    마치 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보여 주듯,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녀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공부합시다. 우리.”

    그리고 디온은 종이 위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정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 * *

    지난날, 세이나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1. 아무래도 우리의 여주인공은 대단한 숙명의 주인공인 모양이다.

    2. 여주인공이 내 옆집에 사는 한, 마물은 계속 이 근처에 나타난다.

    3. 제대로 된 방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네 번째.

    ‘나는 원작에 휘말리게 되었다.’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엑스트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소시민이 마족이니, 후작이니 하는 음모에 휘말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또 수많은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주인공들이 미쳐 날뛰며 기술을 난사할 때, 파괴되던 건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건물들의 집주인들은 눈물을 흘렸겠지만. 그들이 묘사되는 경우는 적었다.

    세이나는 바로 그 생략된 인물 중 하나가 될 운명을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 부정의 시간을 그리 길게 끌지 않았다.

    원체 험난한 인생이었다. 몇 가지가 더 겹쳐진 것일 뿐이라. 이번 고난은 저번 것들에 비해 비교적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바로 마물.

    다행히 세이나는 나름대로, 그 방면의 전문가였다.

    “언제 어디서 어떤 놈들이 나타날지 모르니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겠어요. 두 분도 마물에 대한 건 대충이라도 숙지해 주세요.”

    그리도 또 다행히, 그녀의 아버지도 그 방면의 전문가였다.

    세이나는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마물과 관련된 서적들을 모조리 긁어 1층으로 옮겨 왔다.

    디온과 라샤드가 오가면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같은 친절에도 디온은 침울하기만 했다. 당연했다. 그는 공부가 싫다며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조차 머뭇거렸던 사람이다.

    그래서 세이나는 더욱 감동했다.

    적어도 아직까진 못 하겠다며 집어 던지진 않았으니 말이다.

    ‘엘렌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지극해서겠지.’

    아주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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