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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56화 (56/179)
  • #56

    “지, 집을 사려고 한 것도, 마족과 후작 때문이었군요.”

    “맞아.”

    “엘렌의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정말 특별한 사정이 있었네요! 말하기도 어렵고!”

    “으응.”

    “이해했어요. 완전히!”

    이윽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라샤드의 반듯한 얼굴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세이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고, 고마울 게 뭐 있나요! 하하!”

    기왕 한 번 웃기 시작한 것. 호탕한 이미지로 가 버리자.

    조금만 더 가까운 사이였다면 등을 팍팍 쳐 주면서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녀석, 다 털어 내 버리라고! 하는 유쾌한 외침도 덧붙여 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세이나는 공작이 괜찮아지길 바랐다.

    그거 사실 제가 그런 거예요…… 라고 말할 용기는, 아직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뭐, 나야…….”

    거기까지 말하고, 세이나는 잠시 고민했다.

    긴 이야기를 들었고, 많은 생각을 했지만 역시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집을 지키는 방향으로 해야죠.”

    “그렇군.”

    “마물에 마족이라니, 징그럽긴 하지만…….

    그녀가 제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도 짜증을 떨치지 못했는지 거칠게 한 번, 헝클이기도 했다.

    내내 찌푸리고 있던 미간 주름은 더욱더 깊어졌고,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한숨도 나왔다.

    하지만 손이 내려왔을 때, 세이나의 표정은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햇살을 받은 금색 눈동자가 번뜩이며,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나는 내 집 포기 못 해요.”

    누가 오든 도망칠 생각 따윈 없었다.

    오웬의 말대로 마물이든, 사람이든.

    마족이든.

    엘렌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녀를 이곳에 붙잡은 이가 자신이기도 했고.

    ‘그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

    마족더러 쫓아와 달라고 애원한 것도 아니고.

    성녀가 되기로 선택한 것도 아니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던 와중에 무작정 흥미로 선택한 가출도 아니었다.

    엘렌은 살기 위해 도망 나온 것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 기억을 잃었다.

    그걸 두고 뭐라고 하겠는가.

    결정적으로 엘렌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저번에도 쿠키를 구워 줘서 얻어먹었단 말이야!

    “미안하게 됐군. 내가 잘만 설득했어도…….”

    “그,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아니야, 내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죠! 하하하!”

    ‘누가 나 왜 계속 웃는지 좀 알려 주라.’

    턱이 너무 아팠다. 입꼬리는 이제 감각도 없었다. 결국, 세이나의 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따악!

    팔뚝을 스치는 아픔에 라샤드가 놀라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세이나가 경고하듯 외쳤다.

    “그만 해요! 알겠죠?”

    공작 각하께 ‘감히’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입을 그냥 틀어막아 버렸을 것이다.

    죄책감 들잖아! 그만 말해!

    “앞으로 할 일만 생각해요!”

    라샤드가 놀란 얼굴 그대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세이나 자신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까.

    ‘마물부터 막아야겠지.’

    그럼 나타나는 족족 잡아 버리면 괜찮을까. 전처럼 1마리만 튀어나오는 정도라면, 그럭저럭 대처할 만할 것이다.

    마물이 나타날 걸 미리 알고 준비하는 것과 모르고 맞닥뜨리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세이나는 며칠 전과 같이 당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로 없으리라 결심했다. 단단히 대비한다면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부수입도 따라왔다.

    ‘마정석. 또 얻을 수 있으려나?’

    그리고 세이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안전이라고! 마정석이 아니라!’

    하지만 마정석의 영롱한 광채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이나는 애써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이를테면, 저기에 졸고 있는 바로 저 소녀에게로 말이다.

    세이나가 라샤드에게 물었다.

    “혹시 엘렌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어요?”

    “그건 불…….”

    “그럼 이 녀석은!”

    날카로운 외침이 라샤드의 말을 가로막았다. 세이나는 의자에 꽁꽁 묶여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아, 잊고 있었다.’

    지금 심문 중이었지.

    오웬은 여전히 버둥대고 있었다. 줄곧 무시당한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얼굴도 조금 상기되어 있다.

    ‘너무 많은 것을 말했나?’

    세이나는 깊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오웬도 남주인공 후보가 아니던가.

    엘렌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을 테다.

    그리고 지금 그의 관심사도 엘렌은 아니었다.

    “이 녀석은 대체 뭡니까?!”

    라샤드와 세이나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두 사람은 그제야, 그들이 또 다른 누군가를 잠시 잊고 있음을 상기시킬 수 있었다.

    “대화 끝났나요?”

    디온이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총이 쥐어져 있었다.

    총구가 향하는 방향 역시 같았다.

    “그럼 죽여도 되죠?”

    오웬이 간절한 눈으로 세이나를 보기 시작했다.

    살려 줘!

    세이나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오웬. S급 헌터. 성황의 반지의 소유자. 대단한 인망과 스펙을 가진.

    거짓말쟁이.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지.’

    세이나가 손을 젓자 마침내 총구가 오웬에게 떨어졌다. 디온은 대단히 아쉽다는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그 후에도 총을 쉽게 놓지 않는 모습이 언제든 허락이 떨어지면 달려들 것 같다. 실수인 척하며 방아쇠를 당겨 버릴지도.

    “정말 그냥 풀어 줄 겁니까?”

    “그래.”

    디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오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총을 쥔 그의 모습은 위험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온기라곤 하나 없는 푸른 색채의 눈동자에 서늘함이 가득했다. 검지는 방아쇠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디온?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못 박힌 듯 오웬의 뒤를 지키던 디온은 의외로 순순히 세이나의 부름에 따랐다.

    방을 나선 세이나는 그를 계단으로 이끌었다. 전부 오르지는 않고 중간의 위치.

    그녀는 디온보다 조금 높은 단층에 서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높이가 딱 맞다.

    “다 들었죠?”

    “네. 귀가 있으니까요.”

    디온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즐거워 보이시던데.”

    “즐거울 게 뭐 있어요? 심각한 사안인데.”

    세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팔짱을 꼈다.

    심히 오버스럽게 웃어 젖히긴 했지만 즐거운 마음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마물과 관련된 문제에서 그녀는 늘 진지했다.

    목숨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역시 신경 쓰이죠?”

    “네.”

    대답은 세이나의 목소리에 연결되듯 빠르게 들려왔다. “역시.”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사이 총은 디온의 외투 안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세이나는 그가 외투를 열어 품속에 총을 집어넣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간단한 동작일 뿐인데도, 우아하게 보였다.

    그리고 다음,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 세이나를 마주했다. 무거운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신경 쓰입니다.”

    의미심장한 눈이었다. 세이나는 그에게서 어떤 결심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뜻을 추측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역시 그렇군요. 사실 눈치채고 있었어요.”

    세이나는 턱을 매만지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음, 역시 그랬군. 그럴 수밖에 없지.

    더없이 진중해진 그녀와 달리, 디온에게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저, 정말입니까?”

    “네. 그럼요. 저 눈치가 빠른 편이라서요.”

    “언제……부터요?”

    “얼마 안 됐어요. 디온은 이 집에 너무 자주 오잖아요. 어떻게 모르겠어요?”

    첫 만남부터 벌써 몇 주가 흘렀다.

    세이나는 그동안 단 이틀을 제외하고 매일 디온을 만났다. 그가 찾아왔고,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모를 리가 없지.’

    게다가 방금의 대답.

    거기까지 듣고 나니 그동안의 의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디온은 마물을 싫어한다. 공작의 일은 알고 싶지도 않고,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 행동도 했다.

    그럼에도 이 집에, 오늘도 방문한 이유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좋아한 기간이 그렇게나 긴데, 포기가 쉽진 않죠.”

    “……네?”

    “이해해요. 잊겠다고는 했지만, 그게 어디 쉽겠어요.”

    “세이나, 지금 무슨……?”

    “네? 당연히 엘렌 이야기죠.”

    원작의 조연. 엘렌의 과거사를 알고 있는 남자.

    그 간단한 설정값을 세이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바로 이 집 앞에서 그는 엘렌을 잡고 제 마음을 고백했다.

    아주 절절하게 소녀를 붙잡고 자신과 함께 가 달라고 애원하듯 붙잡았다. 이후 그녀를 붙잡고 털어놓은 과거사는 또 어떻고.

    세이나의 머릿속에서 디온 프라벨은 당연히, 엘렌을 연모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이곳에 있는 주요한 이유 역시 그녀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접고 싶지만, 계속 머릿속에 엘렌이 맴도는 것이다. 걱정되고 불안해서 엘렌의 곁을 떠날 수 없다.

    세이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제 입가를 매만지더니, 작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세이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후 나온 작은 중얼거림은 빈정거리는 듯 들렸다.

    “아, 그거.”

    “……디온?”

    “그렇죠. 엘렌 말이군요.”

    “네. 그렇죠. 당연하죠.”

    “그렇네요.”

    “마족에 후작까지. 알고 있었나요?”

    “몰랐습니다.”

    “제 예감엔, 이제 정말로 위험해질 것 같아요.”

    “네.”

    “그러니까…….”

    세이나는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다, 이내 결심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이 집에 오지 않는 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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