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55화 (55/179)
  • #55

    “나는 2년 전에 이 일기의 주인과 마주쳤다. 우연이었어. 나는 여행 중이었고, 그는 사냥 중이었지.”

    “어디였습니까?”

    “북쪽. 후작령 안은 아니었어.”

    아론은 라샤드가 말하는 사이 일기를 가방 안에 넣었다. 아주 귀한 보물 모시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 일기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엘렌의 피를 마시고 점점 회복했다. 검은 마력을 부르고, 마물을 만들었어. 그 정체를 유추하긴…… 그리 어렵지 않더군.”

    “마족.”

    세이나는 그러고도 믿기지 않아 한 번 더 반복했다.

    “후작이 마족을 부활시켰군요.”

    “완전히는 아니야.”

    창문 너머의 엘렌 유클레스는 계속 쿨쿨 자고 있었다. 자세가 불편할 법도 한데, 조금도 깨어나지 않았다.

    “기억이 온전치 않다고 했지. 그리고 마력을 회복했다면,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말이 안 돼. 마족이 겨우 D급 마물을 부른 것도 이상하고.”

    라샤드는 창문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아주 소량만 주면서, 후작은 마족을 길들일 계획이었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결국 실패했고.”

    “실패? 아, 도망쳤구나! 그리고 공작님과 마주친 거고!”

    “그래. 왜 멀리 도망치지 않았는지도 알겠어?”

    “……엘렌의 피를 원하니까.”

    “나와 마주쳤을 때 그는 불안정해 보였어. 마법도 형편없더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마족은 엘렌의 피가 더 필요하다.

    “피라니. 징그러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오웬이 묻자 라샤드가 우울하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놓쳤다.”

    “예!?”

    “내 실수였어.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군. 비난해도 좋다.”

    오웬의 눈빛이 다시 사나워졌다. 그가 라샤드를 쏘아보다 말했다.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 마족이 지내던 거처를 발견했어. 급히 짐을 챙기고 도주했더군. 하나 남은 게 바로 이것이다.”

    “아주 멀쩡하게 보내 준 모양입니다. 제 물건 챙길 정신도 있고.”

    비꼬는 말투에 세이나가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조용히 해 봐요! 그래서요? 어떻게 됐어요?”

    “일기를 황제 폐하께 보여 드렸다.”

    “폐하께서는?”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리셨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황제 폐하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니까. 후작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당장 후작을 잡아들이기는 어려웠어. 증거라곤 일기 하나밖에 없으니까. 마족을 잡은 것도 아니고, 망상병자가 한 짓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니.”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구나.

    “나는 폐하의 명대로 먼저, 성녀부터 확보하고자 했다. 나름대로 명분도 있었지.”

    “명분?”

    “나는 미혼이고, 엘렌은 후작 영애니까.”

    거기까지 듣고, 세이나는 디온을 살폈다. 라이벌 선언을 듣는 그의 표정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쟤도 혹시 눈 뜨고 졸고 있는 것 아냐?

    “하지만 청혼서를 보내기도 전에 엘렌이 도망쳐 버렸더군.”

    “…….”

    “나는 이후로도 엘렌 유클레스를 찾아다녔다. 찾아서, 보호할 생각이었어. 겨우 수도에서 그녀를 찾아내긴 했지만…….”

    라샤드가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나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지.”

    뜨끔. 커다란 바늘이 허리를 찌르는 감각에 세이나의 어깨가 떨렸다.

    손을 뒤로 하여 등을 만져 봤지만, 걸리는 것은 없었다. 등 뒤에 있는 건 디온이 유유히 걸어 나왔던, 바로 그 고급스러운 옷장밖에 없다.

    세이나는 다시 라샤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아직도 의문이야. 나름대로 좋은 제안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그 순간 세이나는 깨달았다.

    찔린 것은 허리가 아니라.

    양심이었다.

    “엘렌이 나를 싫어해서 물거품이 되었지.”

    라샤드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세이나는 차마 그를 보기 힘들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모두 내 탓이야.”

    * * *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렇다.

    유클레스 후작은 딸을 이용해서 마족을 수하처럼 부려 먹을 속셈이었다.

    딸의 피를 급여(?) 삼아서, 마족을 마음대로 써먹고 그가 설설 기어서 제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면 선심 쓰듯 몇 방울 주는 악덕 고용주가 그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족은 ‘이렇게는 못 살아!’ 분통을 터트리며 도주했고, 불행히도 딸아이도 17살이 되자마자 가출해 버렸다.

    엘렌은 마족과 유클레스 후작 양측 모두에게 노려지고 있었다.

    그녀를 돕기 위해서, 공작은 그녀에게 자신의 집으로 갈 것을 권유했는데.

    누군가가 막아 버렸다.

    그게 바로 누구냐.

    ‘……난가?’

    칼만 공작의 작전은 세이나 로힐로 인해 망가졌다. 그녀의 말 때문에, 엘렌은 공작을 따라가지 않았다…….

    ‘나라고!’

    다시 바늘이 쿡쿡 찌르는 느낌이다. 그녀는 그것에 이름도 붙여 보았다.

    ‘나야!’

    죄책감.

    “자, 잠깐만요! 그럼 이 주변에 나타나는 마물은?!”

    “마족이 보냈겠지. 그는 후작령 근처에서 후작의 동태를 계속 관찰하고 있었을 거야. 후작이 엘렌을 찾고 있다는 것도 지금쯤이면 눈치챘을 거고.”

    “그래서 마구잡이로? 막 마물을 보낸다고?”

    “그 공격으로 조금의 피라도 얻을 수 있다면 마족은 힘을 회복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좌절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엘렌이 공작가로 가는 것을 막아 버려서 마물이 내 집에 나타난 셈?’

    엘렌이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면, 마물은 지금쯤 그의 저택에 있을 것이다.

    그녀의 집이 아니라!

    “하지만 마물들은 결계 안으로 들어왔잖아요?”

    “결계에도 문제가 생겼어. 타이밍이 나쁘다고 할지……. 궁정 마법사들이 총동원됐지만, 아직 원인을 밝히기 어렵다더군.”

    “세상에.”

    “이건 비밀로 지켜 줘. 새어 나가면 곤란하니. 그래도 아직 마족 본인이 발을 들이진 못하니까…….”

    라샤드는 끊임없이 입술을 움직였으나 세이나는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깊은 좌절감 탓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탁자를 때리며 엉엉 울고 싶은 감정을, 세이나는 지금 느끼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험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참고 넘길걸!’

    이미 첫눈에 반해 있는 상황인 줄 알았더니. 그냥 의무감에 지켜 주려고 했던 것일 뿐이라니! 그럼 결국 자신이 한 훼방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스토커에게 엿을 먹이긴커녕.

    최종적으로는 자신도 피해를 보아 버렸다.

    제가 제 무덤을 판 셈이다.

    “괜찮나?”

    세이나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지자 라샤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세이나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아 몇 번이고 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작게 헛웃음도 터트렸다.

    작게 욕도 중얼거려 보았다.

    ‘망할.’

    마물을 이 집에 끌어들인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젠장, 난 그런 줄 몰랐지!’

    그냥 엿 먹일 생각밖에 없었다.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 봐라. 앞일을 염려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여주인공이고, 어차피 남자주인공이잖아?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그러나 자신이 놓은 덫은 어마어마한 여파를 불러왔다.

    라샤드는 엘렌과 연애는커녕 첫 만남 이후로 만나지도 않고 있고. 오웬은 의자에 묶여서 불쌍하게 손만 꼼지락대고 있었다.

    ……초록 머리, 다른 한 놈은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그것도 나 때문? 나 때문에 사건들이 틀어져서?’

    이런 걸 두고 나비 효과라고 하는구나, 와중에 전생의 지식도 하나 떠올려 보았다.

    엑스트라 빙의자가 놓은 깽판은 원작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엘렌이 잡혀가나? 그럼 마족이 부활하고……. 혹시 세계 멸망?’

    그때, 라샤드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시간을 끌어서 미안하군. 사안이 워낙 복잡해서 말하기가 어려웠어.”

    “아, 네. 하, 그, 그렇군요. 이해했어요.”

    “말했지만, 이건 내 탓이다. 나를 원망해도 좋아. 내가 엘렌에게 더 잘 말했어야 했는데…….”

    “예!? 아, 아니에요!”

    라샤드는 정말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에 세이나는 더욱더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럴 수 있죠! 하하!”

    망할, 나 왜 웃고 있니.

    괜찮다는 듯 행동하자고 생각했는데 웃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저도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표정도 지어졌다.

    “원망하지 않아요, 절대로!”

    라샤드의 눈이 커졌다. 그가 세이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을 받으면서, 세이나는 입꼬리에 이는 경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럴 땐 인자한 미소를 보여야 한다던데, 창문에 살짝 비친 자신의 낯짝은 묘하게 비웃는 듯하다.

    세이나는 그를 최대한 안심시킬 수 있을 만한 행동을 떠올려 보였다. 그리고 조금 후.

    그녀가 오른쪽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괜찮아요!”

    더 이상해졌다.

    세이나는 절망했다.

    이게 뭐냐, 도대체. ‘최고다!’ 뭐가 최고인데? 누구 놀리냐? 작전이 실패해서 최고입니다, 각하! 이런 뜻이야?

    ‘조졌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라샤드는 그녀에게서 어떤 이상함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크게 뜬 눈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곧 그의 고개가 조금 아래로 꺾이고, 큰 손이 이마를 짚었다.

    나지막이 새어 나온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은…….

    “고마워.”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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