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54화 (54/179)

#54

그가 입을 뗀 것은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잘 들어요. 세이나.”

막 세이나가 답답함에 윽박지르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그간 느꼈던 비호감을 싹 잊어버리고, 오웬의 말에 집중했다.

오웬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마치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이 반지는 1개가 아닙니다.”

“네?”

“정확히는 다른 것들은 모조품이라고 해야겠네요. 같은 모양에, 성력을 품은 반지 5개가 더 있습니다.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소지자에게 돌아가는 것도 같습니다.”

세이나는 생각했다. 와, 6개가 동시에 돌아가는 걸 보면 엄청 신기하겠네.

“초대 성녀는 다섯 가문에게 반지를 나눠 주었습니다.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마족을 같이 감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비밀 공유했다는 약속의 증표죠.”

오웬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망설이거나, 고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회색 눈이 분노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30년 전. 칼만 가문의 반지를 들고 온 자가 봉인석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샤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오웬은 비틀린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최근, 이상할 정도로 변종 마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랬어요?!”

“협회 내 대부분 탐지 부서 소속 마법사들이 모두 장기 출장 중입니다. 그 때문이겠지요.”

아는 소식에 세이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탐지 부서의 마법사들은 꽤 수가 많은 편이다. 그런데 모두 사라졌다니.

만약 모두가 자리를 비웠다면, 둘 중 하나다.

회장과 싸워서 모두 나갔거나.

“그리고 최근, 칼만 공작이 공작령을 떠나 수도로 올라왔습니다. 올라오자마자 한 일은.”

그만큼 중대한 일이 생겼거나.

“어떤 여자를 찾는 것이었죠.”

그제야 왜, 오웬이 라샤드를 의심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디온이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도.

“이래도 발뺌하시겠습니까, 칼만 공작?”

세이나는 입을 꾹 닫고 공작을 주시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떠오르지도 않았고.

오웬의 추측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개연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공작에게는 반지가 없다. 마물은 봉인석의 주변을 맴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세이나에게 쉽게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방 안 모든 이의 시선을 받는 남자는 시종일관 어두운 표정이었다.

다시 긴 침묵이 흘렀고, 세이나는 긴장감에 손바닥에 땀이 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길 바랐는데.

그러던 중, 갑자기 문이 열렸다.

“오.”

문 앞에 나타난 이는 아론이었다. 옆구리에는 처음 보는 가방을 낀 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정장 차림이다.

그런데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눈을 빙그르르 굴리며 방 안을 살폈다. 세이나는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오……. 우와……. 오…….”

심각한 표정의 공작.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집주인. 총을 들고 있는 건방진 아는 동생.

그리고 그들의 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묶인 남성.

“저, 저는 지하실에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이나는 혀를 찼다.

이 녀석들이 왜 계속 남의 집 지하에 시체를 숨기려고 하는 거야?

벌써 하나 숨긴 건 아니겠지?

* * *

당겨 놓은 활줄처럼 팽팽했던 긴장감은 아론의 등장으로 숨통이 틔었다.

세이나는 죽이려던 게 아니에요, 라고 몇 번이나 설명했지만 아론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노려보니 이젠 뒷걸음질 쳐서 공작의 뒤로 숨기까지 했다.

라샤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에게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 설명하지. 아론. 그것을.”

“여기서요?”

“그래.”

아론은 영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었으나 공작의 말에 직접 반박할 만큼 호기롭지도 않았다.

그가 가지고 온 가방을 책상 위에 두었다.

곧이어 나온 것은 낡은 책이었다.

“……열면 저주받는 거 아니죠?”

“이미 확인했어. 그걸 한 번 더 확인하느라, 시간이 더 걸린 거고.”

하지만 영,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싸구려 가죽으로 만든 표지가 얼룩덜룩하다.

대체 뭘 묻힌 건지. 고개를 기울여서 본 내부는 젖은 것을 말린 듯 구겨져 있었다.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은데.

“방법이 있습니다. 세이나.”

“네? 어떤?”

디온이 총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의자를 붙잡았다. 동시에 오웬의 눈이 커졌다. 끼이익, 끽.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고 조금 후.

오웬은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어.”

“빌어먹을! 나더러 저주받으라는 거냐!?”

“괜찮다잖아. 열어.”

“내가 저걸 어떻게 믿고! 너도 못 믿으니까 시키는 거잖아!”

“난…… 난 믿어.”

“야, 너 목소리 떨린다?”

“오웬은 마족 좋아하잖아요. 파이팅!”

“좋아해서 모은 게 아닙니다! 사람을 뭐로 보고!”

음, 변태가 아니었나?

그냥 둘러대는 말이라기엔 오웬의 표정이 너무 절박했다.

마치 오물을 보는 것같이 안면을 구기고 있다. 그 불쾌감의 원인은 꼭 책에만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묶어 두고 어떻게 열라는 겁니까?”

의자 뒤에 묶인 그의 손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에메랄드 반지가 반짝반짝 햇살을 받아 빛난다.

풀어 줄까?

아니, 분명히 도망갈 것이다.

세이나는 아직 오웬을 풀어 주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집에 쳐들어온 것에 대한 사과도 못 듣지 않았나.

“……내가 열지.”

“그쪽은 내가 안 믿습니다!”

라샤드가 나서려고 하자 오웬이 다시 소리쳤다. 그는 아랫입술을 꾹꾹 씹으면서 생각에 빠졌다.

회색 눈이 오른쪽을 한 번. 왼쪽을 한 번.

“세이나, 제 손에 일기장을 쥐여 주세요. 바꿔치기하는지 감시 좀 해 주시고.”

그래도 은발에 총 든 놈보다는 같은 헌터가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세이나는 의자를 돌려서 오웬의 손이 책상에 닿도록 도와주었다.

“제엔장, 빌어먹을…….”

오웬은 욕을 씹으면서도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그도 궁금하긴 한 모양이다.

이윽고 의자가 앞으로 살짝 들렸고, 세이나는 넘어지지 않게 의자를 지탱해 주었다.

마침내 표지가 열렸다. 첫 장은 물에 젖어 글이 제대로 남아 있지도 않았다.

“와, 엉망진창이네.”

“젖기도 했지만……. 대단한 악필이군요.”

“뭔데?! 나도 보여 줘!”

“더 넘겨 보죠.”

“나도 보여 달라니……. 악! 아파! 팔 꺾인다!”

“아파요? 그럼 이쪽으로…….”

“거기도 아픕니다!”

그동안 라샤드는 아론과 대화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그냥 두죠. 웃기잖아요.”

각고의 노력 끝에 겨우 읽을 만한 페이지가 나타났다. 세이나는 오웬을 바로 해 두고 바로 다시 책상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악필이었다. 그래도 아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세이나는 이 책의 소유자가 아주 어린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점점 글씨가 나아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5번째 일기. 날씨는 흐림.”

그사이 디온은 오웬의 팔을 한 번 더 꺾어 보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그 쩌렁쩌렁한 울림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세이나가 말했다.

“유클레스 후작이 자는 사이 또 내 몸에 실험한 것 같다.”

순식간에 방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세이나는 제 귀가 먹어 버렸나 하는 착각마저 느꼈다. 주변은 지독하게도 고요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정적. 계속 창문을 두들기던 바람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세이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저번처럼 힘들진 않았다. 후작이 말하길, ‘피’를 더 넣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나니 숨 쉬기가 한결 낫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져, 한 번 길게 숨을 내쉬기도 했다. 하지만 읽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기억은 아직 온전치 않았다. 이름을 떠올리라는데…… 잘 모르겠다. 나는 뭐라 불렀던 걸까. 왜 내가, 이곳에 갇혀 있지?”

다음 장을 넘긴 사람은 그녀였다.

저주니 더럽다느니.

그런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물에 젖어 얼룩진 부분들을 넘기니 또,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나왔다.

“82번째. 뭔가가 손끝에 잡혔다. 뭔가 검은 연기 같은데…… 어쩐지 친숙하다. 후작은 이게 내 마력이라고 했다. 그가 유리병 안에 연기를 담아 갔다. 다음에 바로 기절한 것 같다.”

글자는 점점 더 괜찮아지고 있었다.

세이나는 거침없이 책장을 넘겼다.

“112번째. 자고 일어났는데 발치에 검은 먼지 뭉치가 걸렸다.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 들어, 가만 바라보니 그것이 내 다리를 넘어 어깨 위로 올라왔다. 후작은 먼지 뭉치를 보면서 기뻐했다. 먼지? 먼지라면…….”

“D급 마물이네요.”

잠자코 듣고 있던 오웬이 덧붙였다. 세이나는 끄덕인 후, 다시 읽을 부분을 찾았다.

“166번째. 후작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감옥에 찾아왔다.”

거의 책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금발의 여자아이. 양쪽 팔에는 나처럼, 붕대가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이 아이가, 내게 피를 줬구나.”

“피라니, 설마…….”

“후작이 아이를 내 앞으로 끌고 왔다. 오기 싫다는 것을, 질질 끌고 오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후작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아이를 떠밀었다.”

“…….”

“아이는 울고 있었다. 이름이 뭐니? 내가 물었다. 아이는 울먹이며 답했다.”

“…….”

“엘렌.”

그리고 구겨진 글씨로 한 번 더.

“엘렌.”

이후로는 모두 읽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얼룩진 잉크가 다 번져서, 아래의 글씨까지 모두 삼켜 버렸다.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세이나는 결국,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기이한 침묵이 계속 이어졌고.

세이나는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 또 다른 창문 속. 금발의 소녀가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엘렌…….”

아주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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