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라샤드의 방.
세이나는 의자에 묶여 있는 오웬을 가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붉은 머리칼, 회색 눈동자. 기억 속 엘렌의 옆에 있는 남자에 관한 묘사와 일치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그는 묶여 있는 상태에서도 투지를 지우지 않았다. 눈에서 불을 쏟는 듯하다. 그 속에는 경멸도 섞여 있었다.
그 대상이 아닌 세이나마저 조금 불쾌할 만큼, 노골적인 혐오였다.
“나를 본 적이 있나?”
“세 번은 보았습니다.”
“그랬나?”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남자와 달리, 세이나의 곁에 선 두 남자는 그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라샤드는 오웬의 대답에도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워낙 유명인사니 흔히 하는 문답인 듯하다.
“그쪽은 저도 처음이군요. 누구십니까?”
오웬의 분노가 방향을 틀었다. 디온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나른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손으로는 오웬의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러다가 철컥,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오웬의 이마에 총구를 가져간 채 말했다.
“역시 죽이는 게 나아 보입니다.”
“여기서 죽이면 안 돼요!”
“그럼 지하실 좀 써도 됩니까?”
“안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깨끗하게 파묻으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내가 알잖아요! 집주인인 내가!”
다급히 만류하자 그가 총을 거두었다. 그래도 완전히 놓지 않은 걸 보면, 아직 포기하진 않은 모양이다.
세이나는 푹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오웬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이 떠올랐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뭐? 훌륭한 헌터? 대단한 자질?
‘괘씸한 놈.’
세이나가 낮게 속삭였다.
“진짜 죽여야 한다면 돌연사처럼 위장해서 길거리에 버려두는 게 어때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사람 말 좀 들어라! 너 누구냐고!”
“그 전에 한 대 때려도 될까요?”
“마음껏 패셔도 됩니다.”
“너! 누구냐니까!”
“사실 지금 당장 패고 싶은데…….”
“아, 그럼 잡아 드릴까요?”
“자, 잠깐! 진짜? 진짜 때린다고?!”
“어디부터? 머리? 몸?”
“명치.”
“아, 좋네요. 잡아 드릴게요. 자, 하나, 둘…….”
“잠깐! 잠깐만!”
“그 전에.”
세이나가 막 주먹을 감아쥐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첫 대화 이후부터 쭉 물러서 있던 라샤드가 앞으로 나섰다. 오락실 기계 앞에 선 사람처럼 때릴 자세를 잡고 있던 세이나가 흘깃 그를 쳐다보았다.
라샤드는 늘 그렇듯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다.
“뭘 하러 왔는지 물어봐야겠지.”
“공작님을 죽이러 온 거예요.”
“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오웬이 발버둥 치며 외쳤다. 세이나는 심드렁한 눈으로 답했다.
“그쪽도 날 속였잖아요. 뭐? 터지는 것? 웃기지도 않아. 처음부터 이렇게 집에 들어오려고 내게 선물을 준 거였어요?”
“아, 선물을 준 자가 이자입니까?”
“아니, 그쪽은 도대체 누구냐니…….”
오웬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또다시 총이 튀어나왔다. 디온이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가져간 채 물었다.
“유언은?”
새파란 눈동자에는 어느덧 살기가 형형했다. 그는 정말, 이 자리에서 방아쇠를 당길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이나는 오웬에게서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어디를 때려야 속이 시원할까.’ 따위의 생각을 홀로 하고 있었을 뿐이다.
오웬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마침내 입술을 떼었다.
“저는 선대 칼만 공작이 훔친 마족의 봉인석을 회수하기 위해 왔습니다.”
‘역시 그랬군.’
세이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디온이 빈정거렸다.
“묘비에 적기엔 꽤 길군요.”
오웬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묶여 있는 그는 라샤드를 노려보는 것처럼 뒤에 있는 디온을 볼 수는 없었다.
그땐 조금 안쓰러워 보이긴 했다. 디온은 사람을 약 올리는 걸 꽤 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성녀도 찾고 있습니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세이나, 당신을.”
뜻밖의 타이밍에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세이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오웬의 고개가 푹 아래로 꺾였다.
“지키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만……. 설마 당신이 공작을 돕고 있을 줄이야. 정말 뜻밖이군요.”
“……네? 저를요?”
“말을 더듬으시기에, 저는 협박이라도 받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그랬었던가?’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날이 아니었다.
세이나는 요란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오웬을 내려다보았다. 힘없이 처진 어깨가 그의 실망감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방의 분위기도 이상해졌다. 창문은 확실하게 닫혀 있는데. 주변 온도가 떨어진 느낌이었다.
여기에 아주 큰 물음표가 허공에 여러 개 떠오르면 딱 적절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세이나가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뜻밖이라고 했습니다.”
“아뇨, 저요.”
세이나가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성녀?”
* * *
“……아닙니까?”
세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세이나는 라샤드를 먼저 보았다. 그는 세이나를 보다 창문 쪽을 건너보았다. 디온은 내내 세이나만 보고 있었다.
그들이 차례대로 말했다.
“아니요.”
“아니다.”
“그럴 리가.”
“자…… 잠깐! 잠깐만! 아, 아니라고?!”
이제 방 안에서 가장 당황한 이는 오웬이 되었다.
그는 세 사람이 시선을 교환한 행적을 좇았다.
처음엔 세이나를, 다음엔 라샤드를, 그리고 다음엔 고개를 젖혀서 제 의자를 잡은 디온을 보려다가…… 이번에도 실패했다.
“경이로운 치유력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경이롭다니. 찢기면 피도 나고 베이기도 하는데요.”
“어, 어쨌든 빨리 낫지 않습니까. 체력도 일반인 수준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냥 튼튼한 건데.”
“불사신이잖아요!”
“그건 과장.”
“불사신입니까, 세이나?”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진짜 화낼 거예요.”
디온은 세이나의 날카로운 경고에도 계속 웃기만 했다.
“저는 신전 싫어해요.”
신전. 그 장소를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완전 혐오. 주변에 있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아. 흰옷들만 봐도 속이 답답하고 그래요. 상식적으로 성녀라면 성력에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그,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친하게 지내는 신관도 없어요. 아, 전부 사이가 안 좋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어쩜 그렇게 전부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인지.”
“아주 공감합니다.”
디온이 거들었다.
“신성력도 못 쓰고, 남을 치유한 적도 없어요. 그냥 좀 많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럴 수가…… 그, 그럼 당신은?”
“날 말하는 건가?”
“선대 칼만 공작이 마족의 봉인석을 훔치지 않았습니까.”
라샤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이마를 짚었다.
“아니야.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그럼 누가 훔쳤다는 겁니까?”
“그 전에 네 정체부터 확인해야겠는데.”
오웬은 잠시 생각하다 늦게 답했다.
“……안주머니에 있습니다.”
라샤드가 거침없이 그의 품을 뒤졌다. 두꺼워 보이는 코트 안에는 예상보다 든 것이 많았다.
상급 마정석 3개에, 최하급 마정석 2개.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회중시계와 금색 시곗줄도 딸려 나온다. 마지막에 그가 꺼낸 것은 반지였다.
라샤드는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왜요? 이게 뭔데?”
제법 굵은 은색 반지였다.
테두리 전체에 화려한 무늬가, 중간마다 다이아몬드 같은 작은 백색 보석들이 있다. 가운데 박힌 것은 큰 에메랄드였다.
안에는 검은 연기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일렁이듯 빛깔을 바꾸는 보석을 보며 세 사람이 저마다 입을 뗐다.
“진짜군.”
“진짜네요.”
“당연히 진짜지!”
“왜? 왜?”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세이나가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라샤드는 얕은 신음을 흘리더니 곧 낮게 말했다.
“성황의 반지야.”
“성황이면, 성국?”
“맞아.”
“이, 이게요?”
어쩐지 퍽 대단해 보이는 외관이긴 했다. 세이나는 보석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반지가 흔한 물건이 아님은 짐작할 수 있었다.
“훔친 건 아니겠죠?”
“불가능해. 성황이 직접 허락하지 않으면 소유주가 바뀌지 않아. 봐, 이렇게 멀어지면…….”
라샤드가 제 손바닥 위에 반지를 올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느리게 움직였다. 방향은 오웬의 반대쪽.
그리고 중간쯤에서, 반지가 사라졌다.
세이나는 놀라 오웬의 손을 확인했다. 오른쪽 검지. 에메랄드 반지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자, 알겠죠?”
“그럼, 성황이 직접 이 남자에게 반지를 줬다는 말이네요?”
“성국에서 의뢰를 받았다고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거기는 졸지 않았으니 기억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그러려니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듯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조금 놀라웠다. 성황은 황제만큼이나 대단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직접 의뢰를 받았다고?
“그쪽 것도 꺼내시죠.”
오웬이 한층 거만해진 얼굴로 말했다.
반면 그쪽, 라샤드의 낯빛은 어두웠다. 그가 조용히 오웬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세이나와 처음 봤을 때의 바로 그 분위기였다. 무섭고, 위엄 있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 하지만 목소리는 그때와 달랐다.
“……없다.”
“하!”
힘없는 대답에 오웬이 바로 코웃음을 쳤다. 세이나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봤죠? 봤죠, 세이나?”
“왜, 왜. 뭔데?”
“……30년 전에 사라졌어.”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도무지 따라가기가 어려운 대화였다.
왜? 뭐? 반지가 어쨌는데?
하지만 정신없이 두 남자를 번갈아 봤을 땐, 이미 사나운 눈싸움이 시작된 직후였다.
쿠쿠쿵! 뒷배경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살벌한 기세였다.
그리고 그 싸움에는 어느새 디온도 합류해 있었다. 덩달아 심각해진 디온을 보며, 세이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야, 너희 왜 나 따돌리냐! 나도 좀 알자!’
왜 나는 원작을 제대로 안 읽은 걸까. 또 후회스러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