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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51화 (51/179)
  • #51

    세이나의 시선도 디온을 향했다.

    끈질기게 눈을 맞춰 오던 평소와 달리, 은발의 청년은 오늘 그녀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제저녁부터 계속 저랬다. 누가 준 선물이냐는 질문에 세이나는 어색하게 답했다.

    - 그냥 아는 사람이요.

    그 이후로는 계속 저 상태다.

    세이나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웬처럼 ‘옛날, 아주 먼 옛날에’라고 시작할 수도 없다. 앞 내용은 조느라 다 까먹어 버리고 말았다.

    그럼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서두를 꺼낼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대는 통에 그냥 대답을 회피해 버렸다.

    디온은 그 후 완전히 토라져 버렸다. 어제 그는 작별의 인사 하나만 달랑 남긴 채 집을 떠났다.

    ‘그래도 오늘도 온 걸 보면 완전히 삐친 건 아닌데.’

    1층으로 내려갔을 때, 라샤드와 대화를 나누는 그를 보았다. 놀리듯 웃기도 하고,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 세이나가 오자마자 표정이 싹 바뀌었다.

    침묵 속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요 며칠 재잘대는 이야기가 오가던 식당은 지금, 달그락거리는 소리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음식이 맛있는 것을 떠나서, 세이나는 이 상황이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일어선 이도 디온이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가는 디온을, 두 사람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싸웠나?”

    “글쎄요, 이걸…… 싸웠다고 해야 할지…….”

    뒷정리를 모두 마친 세이나와 라샤드는 조심스럽게 거실로 향했다.

    디온은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긴 속눈썹을 내리고 입을 닫고 있는 옆얼굴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하지만 두근거리진 않았다.

    오늘의 디온은 매우 차갑고 냉랭했다. 가까이에 다가가면 냉동고처럼 한기가 느껴질 것 같다.

    늘 그를 볼 때마다 생각하던 ‘예쁘다.’라는 감탄도 오늘만은 쏙 들어가 버렸다.

    “싸웠네.”

    “저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저, 사람 이름을 하나 숨겼을 뿐이다.

    “내가 물어볼게.”

    “네?”

    “내가 불편하잖아.”

    요즘 이 공작님이 왜 이렇게 친절하지? 의아하여 그를 돌아보니, 잔뜩 좁아진 미간이 보였다.

    뭐라고 말을 걸까 고심하는 표정이다.

    세이나는 착하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라샤드가 조금 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늘 말해 주려고 했으니까. 이런 분위기면 같이 앉기도 어렵잖아.”

    “오늘?!”

    저도 모르게 먼저 큰 소리가 나왔다.

    거실에 있던 디온의 시선이 드디어 그녀에게 향했지만, 세이나는 미처 느끼지도 못했다.

    그녀가 다시 큰소리로 물었다.

    “정말요?”

    “당장은 안 돼. 아론이 가져올 물건이 있으니 그걸 보여 주고 설명하지.”

    큰 결심을 내린 표정에 세이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내내 안 보인 것도, 혹시 그 ‘물건’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을까?

    어쨌든 드디어 내내 머리가 아프던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기뻐서 저절로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이죠?”

    그러자 라샤드도,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언제쯤?”

    “3시쯤 온다고 했으니 그때가 좋겠군.”

    “그럼 저는…….”

    다시 그녀가 거실을 보았을 때, 디온은 책으로 시선을 옮긴 후였다. 세이나는 한동안 묵묵히 그를 지켜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케이크를 사 올게요. 디온이 단 걸 좋아하니까.”

    “혼자 가도 괜찮아?”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세이나가 투덜대듯 입을 삐쭉거리자 라샤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직후 들린 목소리는 그의 것이라고 하기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세이나는 라샤드를 보았다.

    ‘정말 이 남자가 마족의 봉인석을 훔친 걸까?’

    검은 머리칼. 큰 키. 넓은 어깨. 붉은 눈.

    분명 어딘가의 ‘흑막’이라고 하면 퍽 어울릴 외관이긴 하다. 지금에야 좀 표정이 부드러워졌지만, 처음 마주쳤을 때의 차가운 눈빛을 세이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입고 다니는 옷이 단정하여 귀족처럼 보여도 막상 뒷골목에 가져다 두면 암흑가의 보스로 여겨질 것이다.

    요리책을 보며 가정식을 차려 주는 암흑가 보스도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아니면 오해?’

    오웬은 그를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남주 후보들끼리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장면은 흔하다. 그런 구도를 위해 작가가 설정한 오해일 수도 있다.

    ‘공작님이 나쁜 놈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 세이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 *

    낮의 거리는 오늘도 활기가 넘쳤다.

    상점가를 지나가면서, 세이나는 후식으로 딱 적절해 보이는 쿠키를 발견했다.

    오드득 오드득 씹으면서 걸어가다 보니, 또 군것질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세이나는 넉넉하게 간식을 샀다. 이 정도면 집에 돌아가서 라샤드와 디온과 나눠 먹을 수 있을 테다.

    그런데, 내가 왜 나왔더라?

    ‘아 케이크.’

    그리고 또 할 일이 있었다.

    ‘전생을 떠올려 봐야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분명히, 뭔가를 보긴 봤던 것 같은데.

    ‘미치겠다. 어쩜 이렇게 안 떠오르지?’

    다른 소설의 빙의자들은 턱, 턱 잘도 떠올리던데.

    자신이 머리가 비상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잘 굴러가지 않을 줄이야.

    ‘난 똥멍청인가 봐.’

    어쩐지, 학교를 그만둘 때 아무도 말리지 않더라니.

    무능해 보이는 학교 선생들도 나름대로 보는 눈은 있는가 보다.

    세이나는 짜증스레 제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이제 어떡하지,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나!”

    거리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외침에 세이나는 퍼뜩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확 향했다.

    세이나의 고개도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저 멀리,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질 것 같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멀리서 흔들렸다.

    세이나는 바로 그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오웬?”

    오웬이 다시 한번 외쳤다.

    “세이나! 큰일 났습니다!”

    인파를 가르고 달려온 남자는 세이나의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숨을 골랐다.

    전에는 깔끔하게 넘겨 있던 붉은 머리가 오늘은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다. 살짝 그을린 피부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장식 하나 없이 무거워 보이는 갈색 외투와 부츠. 목 주변 셔츠의 단추는 풀려 있었다. 꽤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마침, 하아, 세이나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에 세이나를 발견해서 이렇게 따라온 거고요.”

    “네? 왜요?”

    “저번에 드렸던, 하, 마도구 중에, 이상한 것이 섞여 들어갔습니다.”

    “이, 이상한 것이요?”

    “아주, 후, 큰일입니다. 그걸 회수하러 직접 왔습니다. 집에 두셨습니까?”

    세이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빨리 갑시다! 집이 터질지도 몰라요!”

    “집이 터져요?!”

    우르르 그녀의 손에 있던 것들이 쏟아졌다.

    다음 순간, 세이나는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잠깐! 같이 가요!”

    오웬이 그녀에게 다가올 때보다 훨씬 빠른, 바람 같은 속도였다.

    집이 터진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왜 그런 걸 준 거야!?!’

    그녀는 금세 그녀의 집 앞에 이르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의 외관을, 세이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세심하게 살피고 또 살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집은 무사했다.

    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와중 세이나는 드디어 제 옆에 이른 기척을 느꼈다. 그녀의 뒤를 따른 오웬에게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세이나는 그의 멱살을 붙잡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 내며 물었다.

    “어떤 거예요?”

    “함부로 손대면 안 됩니다. 자칫 폭발할 수도 있어요. 제가 직접 회수하겠습니다.”

    폭발. 그 소리에 다시금 이가 갈렸다. 그녀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받던 오웬이 푹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정말…… 하아, 제 실수입니다.”

    “짐은 2층에 있어요. 빨리 가져가 버려요.”

    “예, 그럼…….”

    오웬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후 앞으로 다가갔다. 집의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가 떠날 때와 똑같다.

    다행이다, 라고 속삭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돌연 오웬이 몸을 돌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기 직전.

    세이나는 뒤늦게 그가 떠올랐다.

    ‘칼만 공작이 안에 있는데!’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던 오웬의 표정이 아직 기억에 선명했다. 강한 의지가 눈빛. 사람은 물론 마족들도 전부 다 때려잡을 각오가 담긴 그 눈.

    그 눈이 라샤드 칼만을 보게 된다면…….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되면…….

    집은…….

    ‘개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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