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마차에서 내렸을 땐 늦은 오후였다.
세이나는 오웬의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멍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어깨에 힘이 없었다. 발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에너지는 생각에 쓰였다.
그렇다고 아주 대단한 가설과 그에 따른 추리가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니다.
마치 공회전 같았다. 떠오른 생각들이 뚜렷한 방향 없이 동시에 머리 위를 떠다니는 느낌.
전생과 현생.
가족과 집.
일. 마물과 헌터. 돈.
공작. 그의 기사. 마차.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고양이.
악마. 마족. 봉인.
성녀.
옆집 여자.
‘복잡해.’
시험 기간 전에 속성 강의를 들은 기분이다.
뭔가 많은 것을 들었고, 또 이해하긴 했는데 확실하게 각인되진 않았다. 이전에 있었던 생각들이 너무 확고했기 때문이다.
‘칼만 공작은 엘렌을 좋아해서 스토킹하는 게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엘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와 아직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그가 엘렌에 대해 세이나에게 묻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거절당했다고 해도, 다시 찾아가 볼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도 않았다.
문득 아론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 엘렌 양은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그렇다면 엘렌이 성녀겠군.’
성녀.
썩 여주인공에게 어울리는 타이틀이다.
그 피가 마족과 연관된 것도 몹시 그럴듯하다.
저 꽃집에는 이제 곧 마족의 봉인을 풀고 싶어 하는 악당이 찾아오게 될 것이고, 남주들은 그걸 막아 내다가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옆집 여자는 그 마족들과 그들이 부르는 마물에 스트레스를 받겠지.
세이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 옆을 눌렀다.
‘가능성은 두 가지야.’
첫째로, 라샤드 칼만이 선역인 경우.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성녀를 보호하러 왔으며, 주변의 일도 해결하고자 한다.
실제로 세이나가 마음이 기울어 있는 것도 이쪽이었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봤던 남주인공 후보였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럼 마물들은 왜 생기냐는 말이야.’
첫 번째 경우라면 라샤드는 마물의 봉인석을 훔쳤을 리가 없다. 그런데, 마물은 버젓이 그의 주변을 얼쩡대고 있었다.
세이나는 라샤드와 있을 때만 마물과 조우했다.
마물의 봉인석은 마물을 끌어들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에게 봉인석이 없다면, 대체 마물은 왜 나타났을까.
‘두 번째, 라샤드 칼만이 악역인 경우.’
라샤드 칼만은 마물의 봉인석을 훔쳤고, 엘렌의 피를 이용해 마물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엘렌의 집 주변을 배회하는 것도 다 그녀를 노려서…….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겠지. 남주인공 후보잖아? 엘렌을 구해 내기도 했다고.’
그래서 오웬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가 맞다면, 오웬은 그녀가 가장 먼저 연락해야 할 대상이었다.
‘유클레스 후작이 엘렌을 찾는 이유도 성녀의 피 때문일 거고.’
세이나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생각을 이어 갔다. 그래도 이렇게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아주 이해가 어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엘렌은 보호가 필요하다.
본인은 이 상황을 알고 있을까?
‘모를 확률이 높지. 기억을 잃었으니까.’
스스로, 자신의 선택으로 지워 낸 기억이다.
세이나는 그녀의 처지가 참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복잡한 일에 연루될 운명이었다.
자신의 피를 노리고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달려드는 형국이라니.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다음에 만나면 더 잘해 줘야겠다.’
그렇게 다짐하고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뜻밖의 인물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소리가 들리기에 나왔어요. 어디 다녀왔어요?”
문을 열고 나온 디온이 물었다.
아침과 달라진 복장. 저녁에 온다던 남자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쇼핑?”
그녀의 뒤에 가득 쌓인 상자들을 보고 디온이 물었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오웬의 부하가 그녀의 앞에 내려놓은 것이었다.
- 오웬 님의 선물입니다.
그걸 듣고, 세이나는 오웬이 꽤 머리를 쓸 줄 안다고 생각했다. 직접 준다고 하면 그녀는 필시 거절했을 것이다.
세이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부하는 상자를 내려놓고 사라져 버렸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생각이 시작되었고, 그러다 디온과 마주친 것이다.
“마침 잘됐어요. 같이 열어 봐요.”
“네?”
“이리 와요. 빨리.”
그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지만, 디온은 곧 순순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세이나는 무릎을 접고 벌써 상자를 열고 있었다.
“대체 어딜 다녀온…….”
“와! 이게 다 얼마야!?”
큰 상자 가득 마정석이 들어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 눈대중으로도 몇 개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손을 넣어 보니 차르륵, 거칠게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환상이 아니다.
“맙소사.”
세이나는 급히 옆에 있던 상자도 열었다.
그곳에는 책이 가득 들어 있었다. 오웬이 최근에 집필한 책을 발견했을 때, 그만 반가워하고 말았다.
너무 비싸서 살 엄두도 안 났던 바로 그 책이었다. 흠집 하나 없는 표지로 보아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펼치자마자 보인 ‘오웬’이라는 이름에 기분이 급격히 식긴 했지만.
거기다 비싼 마도구들도 보였다.
마물의 기운을 감지하는 도구. 마법사들이 쓰는 마력 증폭기. 걸어 온 길을 표시해 주는 마법 가루. 멀리 있는 동료와 소통하는 것 등등…….
전부 되팔아도 30만 루펜은 더 나오지 않을까. 값진 물건들의 향연에 세이나는 어지럼증까지 느꼈다.
“산 거예요?”
“선물 받았어요!”
“선물? 누구?”
“어떡하지? 어떡해요, 디온? 이, 일단 들고 들어와야겠죠? 여기에 두면 안 되니까…….”
그냥 받기에 너무 과한 물건이었다. 세이나는 바로 이것들을 모두 오웬에게 돌려줘야겠다고 결정했다.
모두 공짜로 받기엔 너무 과하다!
‘그래도 마정석은 몇 개 꺼내 써도 티 안 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디온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은 쪽은 세이나의 왼편에 있던 상자였다.
오웬의 부하가 내려놓을 때 쿵, 하는 소리가 났던 바로 그것이었다.
“아, 잠깐…….”
세이나는 짐을 열어 무게를 좀 줄이자고 제안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말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상자가 들어 올려졌다.
디온이 평온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디에 두면 되나요?”
빈 상자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세이나는 ‘끙.’ 소리를 내며 얼굴을 구기던 오웬의 부하와 디온을 도저히 연결 지을 수 없었다.
‘같은 상자 맞지?’
“세이나?”
“아, 음……. 2층이요.”
“방문 앞에?”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디온이 발을 떼자 세이나도 급히 상자를 들었다. 마정석은 무게가 매우 가볍기 때문에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여전히 디온이 걱정이긴 했다. 세이나는 앞서나가는 등이 혹시 위태롭게 흔들릴까 봐 주의 깊게 살폈다.
현관문을 넘었을 때, 질문이 던져졌다.
“누구한테서?”
세이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선역? 악역?
오웬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아, 그 소설 열심히 읽어 둘걸.’
그래도 남주인공 후보라서 아주 나쁜 놈은 아닐 텐데.
‘S급 헌터이기도 하고. 미담도 꽤 많잖아.’
고아원에 기부를 했다든가. 부상 당한 팀원들의 치료비를 모두 지원해 줬다든가. 곤란한 일을 겪은 헌터의 일에 발 벗고 나섰다든가.
“또 대답 안 하네.”
오웬은 많은 헌터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와의 대화가 썩 유쾌하지 않아서인지 세이나는 좀처럼 오웬에게 호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이어 가는 와중, 돌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앞서가고 있던 디온에게서 난 것이었다.
그는 상자를 흔들어 보고 있었다.
저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도 놀라웠지만, 저런 소리를 듣고도 계속 흔들어 보는 게 더 놀라웠다.
세이나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깨지는 거예요!”
“아, 그런가요?”
하지만 그에게서 당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야말로 악당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누가 줬다고 그랬죠?”
착하다는 말, 취소해야겠다.
* * *
다음 날의 풍경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세이나는 식탁 위에 올라온 보기 좋은 음식들을 흐린 눈으로 살폈다.
보기 좋게 익은 베이컨에 마찬가지로 구워진 각종 야채들, 갓 나온 빵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를 풍겼다.
한쪽에는 가격이 부담스러워 잘 사지 못했던 과일들과 따끈따끈한 김을 올리는 크림수프, 깨끗한 물이 채워진 잔도 준비된 완벽한 식사였다.
하지만 세이나는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그녀가 감긴 눈을 비벼 댔다.
‘젠장, 너무 졸려.’
어젯밤은 전생을 떠올려 보는 데 고스란히 투자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많은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주민 등록 번호. 학번에 사번과, 피트니스 사물함 번호, 자주 쓰는 통장 계좌 번호, 카드와 통장 비밀번호에, 심지어는 대학교 포털 비밀번호와…….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 이름도 생각났다.
‘그 소설’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전혀. 하나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마음에 안 들어?”
이틀 만에 나타난 공작님이 물었다. 세이나는 그를 빤히 보다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제는 무슨 일 있었어요?”
“아, 그냥 바빴어. 자리를 비워 미안하군.”
“아니에요. 어제도 별일 없었으니까.”
“별일이 없다고?”
라샤드는 그리 말하며 오른쪽을 힐끔 살폈다. 곧 그가 상체를 살짝 숙여 세이나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