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49화 (49/179)

#49

5개의 문양이 다시 나타났다.

“성국에서 의심하는 가문은 이곳에 있는 다섯 가문. 마족의 혼이 성국에 봉인되어 있음을 알고 있고, 그에 접근할 수 있는 자. 그리고 성국의 감시망을 피해 그 사실을 숨길 수 있는 자.”

그의 손가락이 한 곳에 멈추었다.

“공작 정도의 위치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칼만 공작가였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이나?”

치켜뜬 두 눈이 세이나를 향했다. 그때 세이나는…….

졸고 있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말했다.

“예, 예? 뭐라고 하셨죠?”

오웬의 손등에 힘줄이 솟아났으나, 세이나는 그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 * *

세이나는 마족에 대해 잘 몰랐다.

마족, 혹은 악마는 그녀에게 대단히 추상적이다. 나쁜 마음이 불쑥 솟을 때마다 ‘악마의 유혹을 받는 듯하다…….’라고 흔히 쓰지 않던가.

세이나에게 있어서 악마는 딱 그 정도의 존재였다.

성국? 치료제를 잘 만들고 가 볼 만한 관광지가 많은 나라.

마물? 돈벌이 수단.

마법사? 축복받은 놈들. 젠장, 나도 쓰고 싶다.

마족?

관심 없음.

신학 수업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목소리 좋은 사제님의 수업은 잠들기 제일 좋은 수업이었다.

‘그래서 낙제점 받을 뻔했지. 매번.’

세이나는 항상 아슬아슬하게 시험을 넘겼다. 흥미가 있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공부 따위,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생의 여파 때문인 것 같다. 전생에서도 입시 지옥에서 살아왔던 그녀다.

기억은 없어도, 공부에 대한 거부감은 깊이 남아 있던 게 아닐까.

때문에, 코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전혀 와닿지 않았다.

마물은 그냥 있는 것.

마법도 그냥 잘 쓰는 것.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모기가 존재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많으나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해하는 이는 잘 없는 것처럼.

보이면 그냥 죽이면 그뿐.

하지만 지금, 세이나는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진짜 하나도 모르겠네.’

평소 관심도 없는 소재를 머릿속에 주입 당하고 있으니 충격보단 당황이 먼저 느껴졌다. 졸음은 바로 다음에 해일처럼 밀려왔다.

사실 ‘마족의 힘들은…….’ 부분이 시작됐을 때는 생각하는 척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마물과 마법사, 신관의 차이를 말할 땐 짜증이 치밀었다.

아니,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신학을 들어야 해?

‘다섯 가문과’에서는 벌써 자고 있었다. 손님 된 입장에서 예의는 아닌 건 알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집의 인테리어가 가장 예의가 없다.

적어도 세이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도 안 궁금한데요. 선생님.’

공작이 훔쳤을지도 모른다.

훔친 그것이 그냥 예쁜 보석이 아니라 정말 마족의 혼이 봉인된 것일 수도 있지.

그래서 어쩌라고?

그녀는 반쯤 감은 눈으로 오웬을 마주 보았다. 다시 본 오웬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재미가, 없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신화는 영 좋아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죠. 제가 손님 배려를 못 했군요.”

그는 정말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에 이토록 지루해한 건 처음 본 눈치다.

잘생긴 얼굴에, 목소리도 좋고, 스펙도 좋으니.

대부분 이들은 그에게 호의적이었을 테다.

그러나 이미 세이나는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힌 뒤였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하품을 했지만, 눈가에 고이는 눈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자가 편안해서 자기에 더 좋았다.

그녀가 졸린 눈을 한 번 더 비벼 댔을 때, 오웬이 주먹을 꽉 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족은 마물을 부릅니다.”

“아, 예……. 그렇군요.”

“그의 힘에서 파생되어 생겨난 생명이니까요. 그들의 명령을 받고…… 명령이 없어도 그들을 따릅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마족이 있는 곳에는 마물이 있습니다.”

“그렇겠네요. 신화가 진실이라면.”

“……봉인된 상태에서도 마물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국에서 엄중히 보관되어 있었지요.”

“네에…….”

“만약 칼만 공작이 마족의 봉인석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세이나의 초점 흐린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마름모꼴의 보석을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폭포가 쏟아지는 모양 같다. 허공에서 퍼져 나온 연기는 땅에 닿았고, 이윽고…….

“마물이 주변에 나타날 겁니다.”

그때부터, 세이나의 눈이 바로 떠졌다.

오웬은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제가 찾고 있는 것은 마족들뿐만이 아닙니다.”

“그럼…….”

“성녀.”

“……네?”

“칼만 공작이 어떤 여자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이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웬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건 졸리지 않나 보네요?”

* * *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고, 또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 모든 것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젠장.’

너무 놀라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오웬이 여유로운 인상의 미소를 입가에 걸며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아직 서로 맞닿아 있었다.

세이나는 그동안 그의 왼쪽 눈 아래에 있는 작은 점과, 목에 나 있는 상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도 아마, 세이나를 관찰하고 있으리라.

세이나와 오웬은 탐색의 시간을 이어 갔다. 자신만만함이 담긴 회색 눈이 자신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생각을 한번 읽어 보았다.

들켰지?

다시 욕이 떠올랐다. 젠장.

‘끈질기게 물어보겠군.’

방금 자신이 보인 변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하기에는 전혀 적절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오웬이 거기까지 알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 칼만 공작이 어떤 여자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놀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뒤이어 그가 뱉었던 어떤 이름 역시.

몹시 의외의 것이었다.

“최초의 성녀는 자신을 희생하여 33명의 마족들을 모두 봉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봉인은 굳건하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혼을 훔쳐 낸다고 해도 그들의 봉인을 풀 방법은 없습니다.”

“……안전하고 좋네요.”

“단 하나. 예외가 있지요.”

오웬의 긴 손가락이 책장을 넘겼다. 이전과 달리 세이나는, 이제 그 낡은 책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새로운 삽화가 나타났다.

어떤 방에 걸려 있던 그 그림처럼, 한 여자를 그려 놓은 것이었다.

“성녀는 세대마다 1명씩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피가…….”

다만 이번에 여인이 쥐고 있는 것은 꽃이 아니라 단검이었다. 그녀의 피가 떨어진 바로 아래, 악마가 고통스럽게 말라 죽어 갔다.

그 표현이 꽤 자세하여, 묘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여인은 악마의 심장을 짓밟고 있었다.

“마족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어렵게 고개를 올렸을 때,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오웬이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칼만 공작은 어떤 여자를 원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죠?”

노려보는 눈빛은 독사 같았다.

세이나는 온몸이 꽁꽁 묶인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일어나고 싶은데,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꼬리가 내려간 눈매 속에는 예리함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깊은 내면까지 모두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가 마족의 봉인을 풀고자 한다면.”

동시에 목소리는 다정했다. ‘쓸데없기는.’이라고 생각하며 세이나는 혀를 찼다. 듣기 좋은 부드러운 음성이 미끄러지듯 그녀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아주 또렷하게.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세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제법 단호하게 대답했건만. 바라보는 시선에 흔들림은 없었다. 오웬은 자리에 앉은 채 일어서 있는 세이나를 그대로 올려다보기만 했다.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미남의 미소에 세이나는 거북스러움을 느끼며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했다시피 공작님과는 그리 친밀한 사이가 아니에요. 누굴 찾고 있는지도, 어떤 여자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일어서고 나니 숨쉬기가 한결 나아졌다. 뭔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도 사라지고, 목소리도 잘 나왔다.

세이나는 바로 나갈 듯 몸을 입구 쪽으로 반쯤 돌리고 있었다. 그녀가 눈동자만 굴려 오웬을 흘겨보았다.

“직접 물어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마음이 내킬 때 언제든 말해도 됩니다. 이건 강요가 아니라, 부탁이니까요.”

결국 내 말은 안 믿는다는 거군.

단단한 벽을 만난 기분이다. 답이 정해져 있는 사람은 원래 상대하기 어려운 법이다.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일이 있어서요.”

마지막으로 최대한의 예의를 쥐어짜 내어 세이나가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드디어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또 연락하겠습니다. 세이나.”

악수는 거의 스치듯 이루어졌다. 혹여 그가 자신을 붙잡을까, 세이나는 살짝 그의 손을 잡은 후에 재빨리 놓아 버렸다.

그에 오웬의 입술에서 웃음기가 잠깐 사라졌지만, 세이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오웬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제 됐고, 떠나기만 하면 끝.

그런데 발을 떼려던 그 순간, 이상하게 그녀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던 낡은 책. 악마를 밟고 있는 성녀.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까지 주시한 건 그 괴상한 삽화가 아니었다.

세이나는 그보다 더 아래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직사각형 안. 뿔이 나 있는 악마가 하나 주저앉아 있다. 짧은 다리에 불룩 튀어나온 배, 등 뒤에 달린 날개의 일부는 찢겨 있다.

악마는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좌절하는 것 같은 자세다. 그의 두 손을 타고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틀림없는 눈물이었다.

세이나는 그 아래에 있는 글자를 보고 눈을 가늘게 접었다.

다시 보니 이 괴상한 책은, 폴리시아어와 알 수 없는 언어가 혼용되어 있었다. 전체 뜻은 알 수 없으나 일부, 특히 단어들이 몇 개 눈에 익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악마의 아래에 적혀 있는 단어도 읽을 수 있었다.

세이나는 무심결에 그 뜻을 중얼거렸다.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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