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48화 (48/179)
  • #48

    오웬의 서재는 매우 넓었다. 로비만큼이나 크고, 온 벽면이 책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곳이었다.

    그러나 세이나의 시선이 닿은 곳은 따로 있었다.

    세이나는 유리관 안에 있는 해골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땐 정말, 쓴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가는 길목에 버젓이 전시돼 있는 해골이라니. 게다가 유리관 안에는 빛을 발하는 마정석도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아주 잘 보이도록.

    ‘미친놈인가?’

    느릿느릿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하녀들이 트롤리를 몰고 와 테이블을 채웠다.

    그동안에도 그녀는 앞의 남자를 흘깃거렸다.

    너무 특이한 머리 색이었다. 그냥 적발이라기엔 어렵고, 형광 빛이 살짝 섞여 있었다. 마정석처럼 밤에도 반짝반짝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저 스펙.

    S급 헌터. 어딘가에서 남주인공을 할 것 같은 직업이다.

    ‘왜 남주 후보가 엘렌이 아니라 날 부른 거지?’

    하녀들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하던 그가 세이나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입은 듣기 좋은 소리를 내었다.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세이나.”

    “저를……요? 저를 아세요?”

    “물론이죠. 스칼로 토벌에서의 일화는 꽤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치크이트 건은 경이롭기까지 했죠. 쓰러진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밤새도록 마물과 맞서 싸웠다면서요?”

    “아, 하하. 운이 좋았죠.”

    “동료분들이 운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칭찬 세례에 세이나는 수줍게 웃었다. 치크이트 건은 정말로 죽을 뻔하긴 했다.

    그 건을 계기로 C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후 바로 강등당하긴 했지만.

    새로운 별명도 생겼다. 영웅이라든가.

    “불사신, 이라는 별명도 있더군요.”

    세이나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완전히 정색하여 대꾸했다.

    “네. 엄청나게 유치해서 싫어합니다.”

    “하하, 왜요. 딱 어울리는데.”

    “뭔가 어린애들이 쓰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실제로 불사신도 아니고요. 그냥 남들보다 더 튼튼하고 빨리 낫는 것 정도입니다.”

    “그것만 해도 뛰어난 자질이지요. 세이나는 훌륭한 헌터가 될 겁니다. 저와 동급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거야말로 과찬이세요. 저는 그냥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거라…….”

    S급에 이르는 헌터는 모두 세계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업적을 갖춘 이들이었다.

    오웬은 유적 발굴과 유물 연구로 전 세계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세이나에게도 대단한 목표가 있긴 했지만, 딱히 역사에 남을 것 같진 않았다.

    지금 당장은 다른 목표에 매진하고 있기도 했다.

    바로 집을 지키는 것.

    “유적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음, 글쎄요.”

    “이쪽으로 방향을 잡는 건 어떻습니까?”

    전혀 뜻밖의 제안에 세이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는 곧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해외에도 나가야 하고, 팀을 꾸리고 팀장이 되어서 리드해야 한다고 들어서요.”

    “네, 그렇지요.”

    “엄청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일들이죠. 하하…… 애석하게도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네요.”

    “도와줄 수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세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웬이 찻잔을 들어 올린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

    “칼만 공작.”

    “아, 그 사람 도움은 안 받을래요.”

    단호한 답변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오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사이가…… 좋지 않습니까?”

    “무슨 사이라고 할 만한 친분도 아니에요. 그냥 지인 정도.”

    집주인과 세입자는 이니, 최소한 지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이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웬을 따라 찻잔을 들었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기 전에 중얼거렸다.

    “그럼 다행이네요.”

    “네?”

    달칵. 오웬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손님을 대할 때의 친절한 표정이 사라지고, 무거운 진지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세이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세이나. 제가 오늘 당신을 부른 이유는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칼만 공작 때문이기도 합니다.”

    “네? 아…….”

    세이나는 옅은 탄식을 뱉었다.

    그럼 그렇지.

    ‘하늘이 주신 기회는 개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리가. 아무래도 의뢰서는 그저 만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내가 그와 엮인 것을 알았을까? 잠깐의 고민을 거친 세이나는 늦지 않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마르셀을 시원하게 걷어찼던 날.

    협회의 로비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일으킨 소란은 이목을 끌 만했고, 라샤드는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누군가 라샤드의 정체를 알아봤다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웬은 그 소식을 들은 게 틀림없었다.

    그는 ‘헌터 세이나 로힐’이 아니라 ‘칼만 공작’에게 용무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세이나는 그와 대화할 의욕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망감이 꽤 컸다.

    뛰어난 자질이니, 훌륭한 헌터니.

    모두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

    그를 향한 존경심도 한풀 꺾여 버렸다. 세이나는 그냥 이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나도 집에 가서 막장 소설이나 읽어야겠다.

    “혹시 공작님께 투자를 부탁하고 싶어서 그러시나요?”

    헌터들이 귀족 인맥을 찾는 이유는 보통 돈 때문이었다.

    마침 새로운 유적을 찾아냈다는 소식도 안나가 전해 주지 않았던가.

    세이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파에 등을 기댄 그녀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 말이 통할 것 같진 않은데요. 정말 지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서. 물론 자리를 주선해 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다지 안 친해요. 정말.”

    마지막엔 거짓말을 조금 보탰다.

    요 며칠 많은 시간을 공유한 두 사람이다.

    집에도 들어와 살고 있고. 자신이 권유한다면 한 번 정도는, 낯선 이라도 만나러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이나는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투자는 중요한 문제다.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이어 줬다가 덩달아 손해를 입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이제 가도…….”

    “투자 때문이 아닙니다.”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막 일어서려 팔걸이를 붙잡았던 세이나는 그 모습 그대로 오웬을 노려보았다.

    “다른, 아주 중요한 볼일이 있습니다.”

    오웬은 진중함을 넘어 이젠 심각해져 있었다. 그가 무릎 위에 양팔을 올리고 몸을 숙였고, 세이나는 그에 맞춰 더욱 뒤로 물러났다.

    “혹시 칼만 공작과 함께 있을 때…….”

    아니다, 역시 일어나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물과 마주친 적이 있지 않습니까?”

    * * *

    동경하던 헌터와의 대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세이나는 잠시 입을 닫았다.

    아주 짧은 침묵이었다.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세이나는 오웬을 관찰했다.

    살짝 처진 눈매 속 회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상대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한 눈빛이다.

    세이나는 그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요.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단호한 답변에도 오웬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라는 듯한 반응이다.

    그가 찻잔을 든 후 몸을 뒤로 빼냈다. 그녀의 금색 눈이 날카롭게 그를 주시했다.

    ‘어떻게 알았지?’

    공작이 잘 대처하지 못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문에도 아무 소식이 없었고, 집 주변을 얼씬대는 이도 없었으니.

    탐지 부서의 집무실을 탈탈 털었지만 나온 것도 없었다. 만약, 알아냈다면 독자적으로 알아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슨 일인지 자세히는 모르나 보네.’

    공작에게 직접 찾아가지 않고 자신을 부른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순순히 말해 줄 수는 없지.’

    뒤에서 칼만 공작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다닐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여러 가지 일도 함께 겪었고, 이제 라샤드는 그녀에게 무례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말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받은 상황이지 않던가.

    ……비록 1시간 전에는 그걸 따져 물으러 가려고 했지만.

    세이나는 차분히 그를 노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고 얼마쯤 지났을까.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요.”

    돌연 오웬이 웃으며 말했다.

    “엥?”

    “아주아주 먼 옛날에, 마족이 있었습니다.”

    그가 커피 테이블 위에 있던 커다란 책을 펼쳤다.

    “스스로 지옥의 문을 열고 이 땅으로 뛰쳐나온 마족들은 사람들을 괴롭히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린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로 오웬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이나는 기가 차 할 말을 잃고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상황인가?

    “물리적으로 고통을 선사하기도 하고, 유혹해서 타락시키기도 했죠. 사람들 사이의 불신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균열, 그리고 파멸을 만들기를 즐겼습니다.”

    “네… 뭐, 그렇다고 저도 듣기는 했어요.”

    “그들의 만행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지옥에서 사용하던 악독한 힘을 이 땅에도 끌어왔죠. 대지를 오염시키고, 동식물을 변형시켰습니다. 그리하여…….”

    팔랑. 종이가 한 장 더 넘어갔다.

    페이지를 가득 채운 삽화 속에는 온갖 기괴한 형상들이 가득했다.

    정원에 있는 조각상들을 닮았다.

    “마물이 탄생했죠.”

    “…….”

    “마족들의 힘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의 경우 셋 중 하나였습니다. 완전히 미쳐서 이성을 잃거나, 그 힘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완전히 정화하거나. 이 세 가지의 차이를 아십니까?”

    세이나의 입술은 꾹 닫혀 있기만 했다. 오웬이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마물과 마법사, 그리고 신관입니다. 마족의 힘은 역으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의 힘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팔랑. 또 종이가 넘어갔다.

    다음 장에 나타난 것은 다섯 가지의 문양이었다.

    세이나의 눈에 그건 가문의 문양으로 보였다. 그들 위에는 ‘신’을 상징하는 태양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마침내 마족을 붙잡는 데 성공하게 됐지요. 칼만 공작가도 그중 하나입니다.”

    “…….”

    “대부분 마족을 도륙하는 데 성공했으나 고위 마족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내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족을 봉인하여 성국에 보관하기로 합니다.”

    또 다른 그림이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커다란 원 안에 갇힌 거대한 괴수처럼 보였다. 그리고 괴수의 몸 곳곳에는 작은 원들이 그려져 있었다.

    모두 33개.

    “성국에는 33개의 혼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

    “그리고 그중 3개가 사라졌습니다.”

    오웬의 긴 손가락이 괴물을 가리켰다. 모두 세 곳. 한쪽 눈과 어깨.

    마지막은 심장이다.

    “저는 성국의 의뢰를 받고 세 마족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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