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47화 (47/179)
  • #47

    저번에 떠나면서 가는 길은 대충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 그래도 찾아가면 문전박대는 안 당할 것 같다. 아론을 불러 달라고 해도 될지도.

    그런데 또, 바쁠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할 일이 많다고 하기도 했고.

    곧 알려 주겠다고도 했으니, 기다리는 게 맞는 걸까?

    생각이 깊었던 탓인지 걷는 속도도 좀처럼 나지 않았다.

    세이나는 안나와 헤어진 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어느새 멈춰 있었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세이나!”

    이상하게도, 안나가 다시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세이나는 당황해서 그녀를 보았다.

    뭐지? 혹시 뭘 잃어버렸나?

    “세이나아!”

    하지만 표정은 어쩐지 좋아 보인다. 활짝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양팔을 위로 막 휘젓고 있었다.

    행인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더 시선을 끌기 전에 안나에게 가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세이나가 막 발을 내딛던 순간이었다.

    “일이에요, 일!”

    아, 도망칠까.

    * * *

    탁. 말린 종이가 올라왔다.

    안나는 더 신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왜 안 열어 봐요?”

    협회의 데스크 앞. 세이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올라온 종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나가 열어 볼 것을 재촉했지만, 어째서인지 좀처럼 손이 나가지 않았다.

    ‘또 마물이 나타난 건 아니겠지?’

    아니, 헌터에게 온 일이니까 당연히 마물일 것이다. 그러니 말을 바꿔야 한다.

    ‘또 수도 안에 마물이 나타난 건 아니겠지?’

    어제도 이런 식으로 새로운 일이 그녀에게 떨어졌었다.

    당연히 ‘수도에 마물이 나타났으니 퇴치해 주세요!’는 아니겠지만, 그와 유사한 일일까 의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제가 오늘 세이나와 약속 때문에 점심시간을 일찍 시작했잖아요. 그사이에 왔대요!”

    “아, 어, 그래…….”

    “위험하지도 않고, 조건도 딱 맞아요. 보수는 무려 5만 루펜!”

    “아, 그렇구나.”

    “반응이 너무 실망스러운데.”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안나가 불현듯 소리쳤다.

    “혹시 돈 생겼다고 헌터 그만둘 생각이었던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있지, 안나. 정말 좋은 자리라면 더 급한 이에게 양보해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오, 진짜 돈 많이 벌었나 보네.”

    “……안 믿었냐?”

    “농담이에요. 농담. 하지만 그건 어렵게 됐어요. 의뢰인이 꼭 세이나였으면 좋겠다고 해서요.”

    “나를?”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등급이 높지도 않았고, 딱히 이렇다 할 특기도 없었다.

    붙어 있는 것이라곤 조롱 조의 별명 몇 개에 괴이한 소문들밖에 없다. 세이나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임무에 나서겠다고 해도 꺼려질 마당에, 직접 지목을 했다고?

    “혹시 속세를 떠나 계시는 분이니?”

    “그 반대죠.”

    결국, 안나의 손에 의해 의뢰서가 펼쳐졌다. 모험가 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뢰장이었다. 의뢰인에 적힌 이름은…….

    “오웬.”

    그걸 확인한 세이나의 눈이 몹시 커졌다. 금색 눈이 충격에 휩싸이며,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물었다.

    “그…… 그 오웬?”

    “네. 그 오웬.”

    “에, 엘리오리스의 그 오웬?”

    “엘리오리스 유적을 발굴한 그 오웬이요.”

    “카르닌 왕가의 그?”

    “카르닌 왕가의 무덤도 발굴한, 그 오웬이죠.”

    “협회에 5명밖에 없는…….”

    안나의 입매가 미소를 그렸다. 드디어, 기대했던 반응이 찾아왔다.

    안나가 의뢰장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S급.”

    쿵, 하는 요란한 소리가 가슴을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세이나는 이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의뢰장을, 그 이름을 뚫어지라 바라보기만 했다. 진짜인지 확인하는 감정사처럼 아주 꼼꼼하고.

    조심스럽게.

    안나가 들뜬 목소리로 덧붙였다.

    “S급 헌터 오웬의 초대장이에요. 세이나.”

    오웬.

    모험가 협회에 단 5명밖에 없는 S급 헌터.

    최연소로 S급의 자격을 획득했음에도 단 한 번도 의뢰에서 실패하지 않은 전설적인 존재. 아카데미의 인정을 받은 학자이자, 유적 발굴가.

    에드헤스트에 있는 고대 엘리오리스 유적, 카르닌 왕가의 무덤, 현자 세르릴의 마도서, 고대 마법 도시 루크란 발굴 등등.

    그가 세워 올린 무수한 업적들이 파노라마처럼 세이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세이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얘, 얘가 왜? 날?”

    “폴리시아어를 할 수 있는 헌터를 찾는다고 했어요. 얼마 전에 새로운 유적을 발견했다고 들었으니 아마도, 거기서 폴리시아어가 나왔겠죠.”

    “잘…… 못 하는데?”

    “흔하진 않죠. 세이나는 폴리시아에 다녀오기도 했잖아요? 나름대로 베테랑이기도 하고. 적절한 보조라고 생각했겠죠.”

    “세상에.”

    그녀는 손으로 이름을 매만지기도 했다. 어떤 트릭이라든지, 눈속임이라든지. 그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고도 이름엔 변화가 없었기에, 이번에는 눈을 비벼 보았다. 눈꺼풀이 살짝 붉게 변할 때까지 매만진 후 다시 확인했을 때에도,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오웬.

    S급 헌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맙소사, 내 인생에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전생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오웬은 이런 사람이었다.

    저명한 학술지에도 이름이 오르고, 분쟁 지역을 오가는 능력자임과 동시에, 작가이자, 인기가 많은 연예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만능.

    그런 사람이 함께 일하자고 연락한 것이다.

    ‘하늘이 주신 기회!’

    “하지만 거절할 거죠?”

    세이나는 제 손을 빠져나가는 의뢰장을 빠르게 붙잡았다. 그녀가 얼굴색을 싹 바꾸고 태연하게 말했다.

    “지목까지 해 줬는데, 얼굴을 보고 거절하는 게 예의 아니겠니. 언제 가면 돼?”

    오웬의 마차가 협회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2시간 이후였다.

    * * *

    오웬의 저택은 도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쪽에서 마차를 보내 줘서 다행이었다. 검은 칠이 되어 있는 마차는 라샤드 칼만의 머리 색과 썩 비슷했지만, 세이나는 전혀 그를 떠올리지 못했다.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데.’

    S급 헌터의 위명은 어마어마했다. 그와 조금이라도 아는 사이가 된다면 필시, 앞으로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흥분과 긴장, 그리고 걱정을 안고서 초조하게 입술을 뜯으며 마차에서 시간을 보냈다.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하지? 팬입니다!

    ‘아니야, 좀 촌스럽지 않아?’

    나름대로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짜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차가 저택에 이르렀을 때, 세이나는 조금도 그 계획을 떠올리지 못했다.

    ‘와, 저게 뭐람?’

    저택의 대문을 지나치자마자 그녀를 반긴 건 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이었다.

    하나같이 괴기한 생김새에, 쓰러진 것도 있다. 서로를 마주 보는 것, 등을 지고 있는 것, 옆에 있는 숲을 주시하는 것.

    잘 만들어도 너무 잘 만들었다.

    깎아서 만든 게 아닌, 그렇게 생긴 악마가 석화되어 굳어 있는 것 같았다. 배치에도 규칙이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적당히 뿌려 댄 것 같은 느낌이다.

    세이나는 다소 당황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건 헌터가 아닌 괴물의 소굴 같지 않은가.

    “세이나 님이시군요.”

    그런 풍경 속에서 나타난 집사 역시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웬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택 안에서도 조각상의 행렬은 이어졌다.

    밖은 모두 악마더니, 안은 모두 사람이다. 특이한 점은, 모두 하나같이 현관으로 들어오는 이를 바라보게끔 방향을 틀어놓은 것이다.

    관찰하고 감시하는 것처럼.

    혹은, 도와 달라고 소리치거나.

    “서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천재들은 괴짜라더니. 아니지, 변태인가 이 정도면?’

    이런 곳에 살면 기분이 어떨까, 가만 생각해 보던 세이나는 끔찍한 상상에 고개를 저었다.

    밤 12시가 땡 하면 움직이는 조각상이라니. 하필이면 그 유치한 전설들이 떠올라 버렸다.

    ‘하지만 진짜로 그럴 것 같이 생긴 걸, 특히 이런…….’

    그때, 어떤 그림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그건 단언컨대, 이 저택에서 본 것 중 가장 정상적인 예술품이었다.

    빛을 품은 여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고 있다. 한쪽 손에는 꺾인 꽃을,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치맛자락을 들었다. 주변에는 작은 정령들이 맴돌았다.

    그녀의 새하얀 발아래는 악마들이 있었다.

    하나, 둘, 셋……. 얼핏 다섯으로 보이는 그것들은 입구에 있는 악마처럼 제각기 창에 찔린 채 고통스러워했다.

    비교적 정상적이지만, 역시 조금, 이상한 그림이었다.

    “악마…….”

    “멋있죠?”

    “끄악!”

    갑자기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세이나는 그만 제자리에서 튀어 올라 버렸다. 황급히 돌아본 바로 뒤엔, 해골이 있었다.

    정확히는 해골 가면을 들고 있는 낯선 남자였다.

    해골 가면의 뻥 뚫린 눈 부분, 그 너머의 또 다른 눈이 곱게 휘어진다.

    사람이다. 해골이 아니라.

    “어후! 미친! 아휴…… 허…… 어,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놀리기 좋은 아가씨군요.”

    하지만 그 정체를 알아차린 후에도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망할, 정말 놀랐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그를 걷어차 버릴 뻔했다.

    후엔 잽싸게 도망갔을 것이다. 저기 보이는 창문을 깨트리며 뛰쳐나가 버릴까, 순간 그런 충동이 들기도 했으니.

    남자가 얼굴을 가린 해골을 내린 후 손을 내밀었다.

    “오웬입니다.”

    크고 마디가 긴 손이었다. 세이나는 무릎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 내어 그것을 잡았다.

    “세이나 로힐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

    형식적인 인사말은 그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친 순간 뚝, 멈춰 버렸다.

    세이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차마 마무리하지 못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느리게 흘러나왔다.

    “감……사…….”

    그녀의 시선은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독특한 주홍빛의 머리카락. 그 아래의 회색 눈동자. 제 또래쯤 될까.

    S급 헌터라는 명성을 가진 남자는 예상보다 훨씬 젊었다. 그리고 예상보다 수려한 외모였다.

    헌터가 아닌, 귀족가의 수장 같았다. 웅장한 저택을 배경으로 서 있으니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나 세이나가 놀란 이유는 그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황색 머리카락.

    회색 눈동자.

    이 남자.

    프롤로그에 나왔던 남주 후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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