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세이나는 씹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네 고향에 왜 가?”
“난 영주님이랑도 안면도 있고……. 잘 말하면 한 자리 더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로벤은 점점 더 빠르게 말했다.
“우, 우리 영지 살기 좋아. 일도 별로 없고. 평화롭고. 사람들도 다 친절하고. 아, 북쪽이라 별로 덥지도 않아. 너 더운 거 싫어하지?”
“됐어.”
“뭐?”
로벤은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물었다.
“왜!?”
“너도 알잖아.”
“뭘?”
“내 사정.”
그제야 눈치챘는지, 로벤이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이어지고, 그가 시무룩해서 뒷머리를 긁었다.
“미안해. 잠시 잊고 있었어.”
“괜찮아. 다 먹었어? 일어날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도 로벤은 계속 세이나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정작, 세이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의 제안이나, 자신의 사정이라든가, 혹은 이 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도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네. 두꺼운 외투를 꺼내야겠다. 수도에는 오늘도 사람이 많구나.
빵 냄새가, 참 좋네.
“그래도 혹시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로벤이 어렵게 다시 입을 뗐을 때, 세이나는 멈춰서 빵집의 진열대를 보고 있었다. 갓 구워 낸 쿠키가 나무판 위에 가득 채워져 있다.
모두 유령 모양이었다.
“쿠키?”
“응.”
“아, 내가 사 줄…….”
그때, 낯선 음성이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제가 살게요.”
로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은발의 남성은 면식도 없는 자였다. 미친놈인가 싶어 눈살부터 찌푸리는데, 세이나가 말했다.
“응? 오늘 바쁘다고 했잖아요.”
“빨리 돌아왔습니다.”
“누구야? 아는 사이?”
세이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로벤은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 웃음기가 싹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이나가 다시 그를 돌아보자 바로 미소 짓는 것도.
“디온. 이쪽은 로벤. 제 친구예요. 로벤, 이쪽은…… 마찬가지로 내 친구!”
친구, 라고 말하는 표정이 유달리 즐거워 보였으나 로벤은 평소와 달리 그녀의 작은 변화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남자, 디온이 삐딱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 그 ‘로벤’?”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기에 엉겁결에 악수도 했지만, 로벤은 좀처럼 불쾌감을 지우기 어려웠다.
아마 세이나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 이상한 눈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머리가 삐쳤어요.”
바로 디온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가 세이나를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어디요?”
“여기.”
“이쪽이요?”
“아니요. 여기.”
“잘 모르겠는데.”
그러자 세이나가 바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스스럼없이 남자의 머리를 만지자 로벤은 눈을 크게 떴다.
더 황당한 것은, 그녀의 손길을 얌전히 받으며 남자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이상하네요. 오늘 아침에 세이나가 분명 정리해 줬는데.”
“……아침?”
로벤이 저도 모르게 그 단어를 따라 말하자, 남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디온이 웃음을 흘리며 낮게 말했다.
“네, 아침에 같이 있었거든요.”
마치 제대로 들으라는 듯이.
로벤은 딱딱하게 굳은 채 세이나를 보았으나, 반박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미용사라도 된 듯 머리 정리에 심혈을 기울일 뿐이었다.
아침? 아침 뭐? 설마.
아침부터 같이 있었어?
……왜?
“다 됐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까지의 시간이 로벤에게는 너무 길게 느껴졌다. 뒤늦게 머릿속 혼란을 수습하며 로벤은 또 세이나에게 물어보려 했다.
그 남자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저것만 사면 되나요? 유령?”
“아, 공……. 아니, 샤샤 주려고요.”
또 모르는 이름이 나왔다.
그녀가 그 남자 쪽으로 몸을 숙이고 낮게 속삭일 때 로벤은 다소 야속함마저 느꼈다.
“사실, 유령을 엄청 싫어해요.”
“아, 그럼 이것도 사요. 놀리기 좋겠다.”
“좋아요. 디온은?”
“저도 세이나가 골라 주세요.”
“음, 그럼…….”
두 사람은 사이좋게 물건을 골랐다.
로벤이 끼어들 틈은 조금도 없었다.
7. 세 번째 불청객
“요즘 말이죠. 일이 없어도 너어어무 없어요.”
급한 용무라고 해서 왔건만. 안나는 언젠가의 표정 그대로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다 협회 망하는 걸까요? 실업자 되는 건 아니겠죠?”
“……쓸데없이 안 불려 올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 매정해라! 정말 망할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그러나 안나의 얼굴에 진지함이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심심해서 부른 거군.
오전. 그녀답지 않게 일찍 일어난 세이나는 협회 근처 카페에서 안나를 만나고 있었다. 주목적은 수다.
주제는 흔히 그렇듯, 근황이었다.
“세이나는 어때요?”
“요즘?”
“네. 생활이라든지, 누굴 만났다든지. 뭐 재미있는 이야기 없어요?”
“무슨 소리야?”
“사실, 로벤이 술에 취해서 울고 있었다는 소문을 어제 들었거든요.”
세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장 어제 식사를 함께한 그들이다. 식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도 없었고, 헤어질 때도 무난했던 것 같은데.
“술 취해서 치안대에 끌려갔다는 말을 잘못 들은 거 아냐?”
“아니에요. 울고 있었대요. 이건 확실해요.”
“아, 곧 은퇴할 거라던데. 그래서 그런가?”
대화할 땐 괜찮았어도, 막상 술이 들어가니 울적해졌을지도 모른다. 신인 시절 그가 가졌던 야망을 생각하면 지금의 은퇴는 좀 이르긴 했다.
내 커리어가 이렇게 막을 내리나. 충분히 슬퍼질 만한 이야기였다.
“세이나랑 마신 것 아니었어요?”
“점심 이후론 본 적 없어. 어제저녁에 나는…….”
문득 시선을 돌리던 세이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이상 반응에, 안나의 고개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곳은 협회의 앞. 정확히는 막 그 앞에 선 검은 마차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져 갈 때 즈음, 문이 열렸다.
갈색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여인이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세이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이자벨라 프라벨?”
모험가 협회장의 여동생이다. 그리고 그녀의 다음, 붉은 기가 섞인 갈색 머리카락이 마차에서 삐죽 튀어나왔다.
뒤이어 긴 다리와 커다란 몸체가 서서히 드러난다. 보통의 것보다 훨씬 큰 마차임에도, 그에게는 몹시 좁게 느껴진다. 마치 비집고 나오는 것 같다.
2m에 이르는 거구가 협회 앞에 나타났다. 안나가 속삭였다.
“거기다 회장이네?”
모험가 협회장, 데일 프라벨은 오늘도 몹시 험악한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에는 항상 깊은 주름이 박혀 있고, 얇은 입술은 일자로 꾹 닫혔다. 연녹색 눈동자에는 평소에도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기보단 선망의 눈빛으로 지켜봤다. 지금 당장도 그랬다.
“지, 진짜 데일 프라벨…….”
“와, 나 실제로는 처음 봐.”
“협회에 잘 안 나타난다며? 무슨 일이지?”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까지도, 어린 헌터들은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았다.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
“회장이 웬일로 정문으로 들어올까요? 사람 눈에 띄는 걸 싫어해서 일도 저택에서 보고 협회에도 잘 안 오는 사람이.”
“그것도 마차를 주차해서 정문으로? 벌써 노망이 들었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큰일이 생긴다던데, 혹시 준비해야 할까요?”
“아, 협회 망하면 입구에 있는 탁자 내 거.”
“너무해! 내가 먼저 예쁘다고 한 거잖아요! 그럼 나는 그 옆에 있는 꽃병!”
“오? 들어가는 길에 깨트려 버려야지.”
“나빠요!”
인파들은 데일과 이자벨라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여인들은 이자벨라의 미모를 찬양했고, 어린 헌터들은 처음으로 본 S급 헌터의 실물에 대해 말하며 열을 올렸다.
세이나의 감상은 이랬다.
‘장례식에도 안 갔단 말이지?’
원래 회장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디온의 말을 듣고 나니 또 그가 새삼스럽게 싫어졌다. 어떻게 아내의 장례식에도 안 올 수 있지?
그가 원체 험상궂은 인상이라 더 나쁘게 보였다. 이자벨라도 예쁘긴 하지만, 세이나의 기준에서 눈초리가 얄밉게 보이는 편이었다.
‘하나도 안 닮았어. 하나도.’
어제 서점의 신작을 보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디온을 생각하며, 세이나는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늦게 온다고 했지.
- 해결할 일이 있어서요. 저녁에 올게요.
마치 가족이 나누는 것 같은 작별 인사였다.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세이나는 일단 저녁 식사를 고민했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공작님이 왜 안 나타나지?’
얼굴을 못 본 지 겨우 하루. 하지만 나름대로 볼 일이 있었기에, 세이나는 그가 오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론을 잡으러 간다고 떠난 그는 오늘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아론도, 집에 찾아온 기사도 없다.
‘그때 안 자고 있었잖아. 혹시 꼭 마물에 대해 들어야겠다는 말을 듣고 도망친 건가?’
“어제저녁에, 왜요?”
그래, 어제저녁에도 안 나타났었지.
“세이나?”
“아, 별것 아냐. 이제 들어가 봐야 하지?”
수다가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지나 있었다.
세이나와 안나는 설렁설렁 협회의 입구로 향했다. 회장의 등장으로 모였던 인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로벤이랑 무슨 일 있으면, 알려 주기예요?”
“내가 걔랑 무슨 일이 있다고.”
“그래도오! 알겠죠?!”
세이나가 못 이기고 고개를 끄덕이자, 안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 기대감이 가득한 눈은 뭘까.
의아하여 묻고 싶었지만, 더 붙잡으면 안나가 곤란해질 듯해서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다. 로벤과 무슨 일이라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나온 김에 공작저에 쳐들어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