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너도 내 소문은 들었을 것 아냐? 그것 때문에 불안한 거고.”
분명 처음엔 그러긴 했지만.
계약서를 쓴 후에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겠지, 다소 안일하게 낙관하고 있었다.
왜 마물이 나타나는지 설명해 주지 않은 건 여전히 괘씸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나쁘게 보고 있진 않았다.
“난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지 않아. 장담하지.”
그런데 아직도 자신을 꺼리고 있다고 생각할 줄이야. 정말 의외였다.
“날 안심시키기 위해서 비밀을 말한 거예요?”
“비밀이라고 할 것까지 없어. 귀족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그래도, 직접 말하려면 나름대로 각오가 필요한 이야기잖아요.”
“……네가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네?”
“얼씬도 안 하겠다고, 했잖아.”
내가 그랬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영 기억이 나지 않아 고개만 갸웃거리자, 라샤드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그랬어요?”
“그랬어.”
“언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저번에 저택에 왔을 때……. 하, 됐다. 그냥 잊어버려.”
“제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요?”
“……괜히 신경 썼어. 짜증 나게.”
그가 다시 담요를 끌어당기며 세이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세이나는 한동안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공작님. 화났어요?”
“아니.”
“삐친 거죠?”
“아니야.”
“기억 못 할 수도 있지이…….”
“그걸 어떻게……! 됐어. 자야 하니까 말 걸지 마, 이제.”
“에이, 삐친 것 맞네.”
세이나가 웃으며 속삭였다. 무릎의 무게만 없었다면 저 어깨를 쿡쿡 찌르며 더 놀려 줬을 텐데.
“공작님.”
“……왜.”
잔다고 했으면서. 나직하게 부르니 또 대답이 나왔다. 돌아보지 않은 것은 마지막 자존심인 듯했다.
세이나는 한껏 웃으며 조금 크게 말했다.
“고마워요. 설명해 줘서.”
“…….”
“그보다,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자요. 불편하지 않아요?”
“…….”
“공작님도 날 믿고 푹 자도 돼요. 혹시 옆집에서 소리가 나면 바로 깨워 줄게요. 그리고 또…….”
뭐라고 해야 저 토라진 어깨가 움직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세이나는 나름대로 비장의 수를 꺼내 보았다.
“늦게 자면 키 안 커요.”
“정말 어린애로 보네.”
그 말과 함께 드디어 라샤드가 몸을 돌렸다. 비록 눈빛은 꽤 따가웠지만, 세이나는 그가 일어설 준비를 한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저렇게 자면 분명 내일 내내 목이 아플 거다.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이건만. 쳐다보는 눈빛은 다소 쌀쌀맞았다.
그의 붉은 시선이 멀리 있는 제 서재 쪽과 거실 바닥을 번갈아 훑었다. 디온을 바라보았을 땐, 왜인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러다 세이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가 털썩,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잘 거야. 말 걸지 마.”
제 옆에 누워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세이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 * *
손끝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베개가 아니었나? 아, 그 인형이군.’
연말에 받았던 선물 중 하나였다.
한창 쓸데없는 선물 주고받기가 유행이라 친구들끼리 따라 했는데, 쓸데없기는커녕 끌어안고 자기 좋아서 침대에 두었던 기억이 났다.
술에 취해서 그걸 끼고 지하철을 탈 땐 좀 불편했지만. 원래 개를 좋아하기도 했고, 촉감도 좋아서 퍽 만족스러웠던 인형이다.
‘그런데 털이 이렇게 길었던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손에 감기는 느낌이 좋아서 세이나는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계속 자고 싶은데…….
‘응? 잔다고?’
누군가 눈꺼풀에 풀이라도 발라 둔 것처럼, 감은 눈을 쉽게 뜨기 어렵다.
아니, 사실은 뜰 수 있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잠들기 전에…….
- 저는 사흘 정도 안 자도 끄떡없어요.
- 공작님도 날 믿고 푹 자도 돼요.
급격하게 민망함이 밀려왔다.
‘대체 언제부터 잔 거지?’
분명 9시가 넘어갈 때 시계를 확인했었다. 날이 밝아 온 것을 보고, 엘렌이 꽃집의 문을 여는 것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소파 앞에 앉았고, 잠깐 소파에 머리를 기대서…….
“깼어요?”
그 부름에는, 도저히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눈을 여는 별것 아닌 동작을 세이나는 공을 들이듯 느리게 이어 갔다.
시간도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사이 그녀는 자신이 아예 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과 누군가 담요를 덮어 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이 디온의 머리칼을 만지고 있는 것도.
“돌아……왔네요?”
그것도 완전히 어른으로 돌아온 그를.
“네. 아침에.”
자신의 손 아래에 있는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눈이 마주치자 세이나는 다시금 민망함을 느꼈다.
그는 지금 세이나의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어젯밤, 그녀가 어린 디온을 눕혀 둔 바로 그 위치였다.
그 아이가 그대로 자란 건가 싶기도 했지만, 당장 입고 있는 의상이 달랐다.
흰 셔츠 아래 그의 목을 보던 세이나는 급히 시선을 올렸다. 음, 그러니까.
인형이 아니었구나.
‘이런.’
멋쩍음에 급히 손을 내리던 그때, 그녀의 손등 위로 디온의 손이 겹쳐졌다. 그 온도가 몹시도 서늘하여 순간 머리끝이 쭈뼛했다.
“공작님은 아론을 잡으러 갔어요.”
“……돌아왔고?”
“돌아왔고.”
“아, 다행이다.”
그러고 그녀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성과 나란히 누운 상황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야영 중엔 이와 비슷한 일은 숱하게 겪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어쩐지, 그때와는 영 분위기가 달랐다.
자꾸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고.
손등을 누르는 무게도 좀, 무겁게 느껴지고.
결국 견디기가 어려워 살짝 고개를 돌리자 디온은 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세이나는 정말 잠버릇이 이상하네요.”
“……저도 이제 확실히 알았어요.”
스르륵 손이 떨어지고, 디온이 몸을 일으켰다. 세이나는 그가 다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급히 제 얼굴을 가렸다.
디온의 뒷머리가 까치집이 되어 있었다.
‘나 혹시 쟤 머리채 뜯었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싸우고 온 줄 알겠다.
제 상태를 알 텐데도, 디온은 머리를 정리하지 않고 유유히 걸어갔다. 세이나는 그가 거실을 떠난 후에야 슬금슬금 소파 위로 올라갔다.
디온은 저를 훔쳐보는 눈길을 바로 알아차렸다.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한 그가 웃으며 물었다.
“아침 먹을래요?”
일단, 아침부터 먹어야겠다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 * *
로벤은 횡설수설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완전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술에 취해서 치안대에서 자다니. 아버지가 알면 창피하다고 날 호적에서 팔 게 틀림없어.”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눈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뒤에 있는 남자들도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남자가 셋.
“더 우스운 건, 내가 저자들과 술집에서 합류했다는 거야. 그런데 나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미쳤어! 미쳤다고! 더 우스운 건 뭔지 알아? 날 데려온 기사들도 기억이 안 난대! 다 같이 술을 먹고 뻗은 게 말이 돼?!”
“네가 좀 판을 크게 벌이는 경향은 있지.”
“그, 그건 그렇긴 하지만! 기사들까지 끌어들인 적은 없다고!”
“와, 업적 추가.”
“젠장, 이제 술 끊을 거야……. 빌어먹을.”
“응. 2달 전에도 그랬어.”
“이번엔 진짜야. 진짜라고…….”
로벤은 엉망이 된 기억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하다가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레블로테 짓이군.’
술은 좋은 변명거리다.
레블로테는 로벤을 비롯한 다섯 남자, 그리고 기사들의 하루 동안의 기억을 몽땅 앗아 갔다.
아주 다 없애 버리는 것은 이상하니, ‘대충 술집에서 만난 것으로 해라.’라는 암시도 남긴 모양이다. 숙취는 덤이고.
‘옷도 다 입혀 주고. 친절하기도 하지.’
세이나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전부 다’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으니.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응?”
“네 말대로. 나 이제 술 끊기로 했단 말이지. 적어도 술집에 들어간 기억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로벤은 엉성하게 이어져 있는 기억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이나는 짧게 혀를 차고,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나도 봤어.”
“봐, 봤다고?”
“그래. 너 여기서 술 먹고 꽐라 되어 누워 있었다고. 내가 걷어차 줬는데, 기억 안 나?”
그러자 로벤은 놀란 눈으로 제 몸을 뒤적였다.
“그런데 왜 안 부러졌지?”
“뭐?”
“네가 찼다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는…… 아얏! 아파! 아프다고!”
세이나는 로벤에게 제대로 된 발길질을 보여 준 후 치안대 건물을 나섰다. 문을 나오자 뒤에서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로벤이 넉살 좋게 웃으며 물어왔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점심이나 먹자.”
“쯧, 오랜만 아니라니까?”
“어쨌든!”
“나 돈 없다.”
“내가 살게!”
세이나는 로벤을 따라 근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샤드는 이른 아침에 사라진 지 오래였고, 디온도 오늘은 일이 있어서 늦게 돌아올 거라고 했다. 혼자 점심을 먹어도 괜찮겠지만.
늘 옆에 사람이 있는 게 이제 익숙해졌는지 혼자서 보내고 싶지 않아졌다. 사 주겠다고도 했고. 로벤은 아직 멀어지지 않은 몇 안 되는 친구 중 1명이라 불편하지도 않다.
대화도 매끄럽게 흘러갔다. 한창 베이컨을 먹던 로벤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요즘 너무 먹고살기 힘들어. 협회에 일이 싹 다 말라 버렸다고.”
“다행인 거 아니야?”
“뭐?”
“마물이 줄어들었다는 뜻이잖아.”
“그러니 다행이 아니지. 우리랑 마물은 말이야, 상생이라고 사앙생.”
그는 어려운 단어를 쓴 게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길게 발음했다. 세이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이프를 움직였다.
상생은 무슨. 없어졌다고 하면 좋아해야지.
“아무튼 조만간 난 고향에 돌아갈 것 같아. 우리 영주님이 은퇴하고 싶거든 찾아오라고 했거든. 계약 헌터로 고용해 준다고.”
계약 헌터란 한 사람에게 고용되어 그의 의뢰만 받는 헌터를 뜻했다.
보통 일정 기간 단위로, 마물이 잘 나타나는 지역의 영주들이 의뢰인이 된다. 하지만 말만 헌터지, 경호원, 숲지기, 사냥꾼 등등 잡일도 맡는 위치이기도 했다.
“뭐, 뭐, 나도 이제 정착할 나이가 되었고.”
그러나 가족이 있는 헌터라면 이런 계약을 더 선호한다. 세이나는 대충 끄덕이며 고기를 베어 물었다.
우리 집 요리사가 더 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세이나.”
“엉?”
“너도 같이……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