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점점 어려진다더니.’
이러니 정말 어린아이 같다.
담요 아래의 표정은 어떨까. 벌써 자고 있을까, 아니면 뒤늦게 민망해서 얼굴을 붉히고 있을까.
확 담요를 들쳐 올려 놀리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으나, 세이나는 묵묵히 제 무릎 위의 무게감을 견디기로 했다.
간호해야지. 간호.
세이나가 그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걷어 주자 그가 담요를 내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크게 뜬 눈에 잠기운은 없었다. 세이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사촌 동생들이 놀러 올 때마다 여기서 이야기하다가 잤었어요.”
“동생들?”
“네. 3명. 지금은 뭘 하려나.”
벌써 얼굴을 못 본 지가 꽤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할아버지의 장례식 날. 그녀를 안아 주며 함께 울어 준 아이들의 친절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동생들은 늘 세이나를 잘 따랐고, 세이나도 그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장례식 이후부터, 누구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이 집을 누가 가질지를 두고 할아버지와 고모들이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이나는 그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잘 지내야 할 텐데.
“저도 옛날 생각이 나네요.”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우울한 생각이 뚝 끊겼다. 세이나는 궁금증으로 가득해져 그를 내려다보았다.
엘렌을 제외하고 디온의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했다.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까.
“딱 이 나이쯤이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때가.”
……괜히 들었나.
급격하게 가라앉는 분위기를 느끼며 세이나는 의식적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이럴 땐?
“어…….”
“그렇게까지 안쓰럽게 볼 필요는 없는데.”
“아,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래도 회장이 있잖아요?”
“글쎄요. 얼굴 본 지도 꽤 오래됐고.”
아차. 회장 이야기는 지뢰였었지.
잠시 잊혔던 루셀 도르가 떠올랐다. 그때 회장을 언급하던 디온에게서 애정이란 조금도 묻어나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의아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충실한 아버지는 아니었죠. 장례식에도 안 나타났으니.”
……이젠 알겠다.
‘회장! 왜 그랬어! 응?!’
가라앉다 못해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 같다.
분명 벽난로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어쩐지 한기가 느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 말하는 어조가 또 한없이 가벼워 세이나는 신경이 쓰였다.
디온이 시선을 내려 눈을 반쯤 접었다. 얼핏 보기에 졸린 듯한 그 표정은, 묘하게 낯익은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일 것이다. 그녀의 집 안에 처음 발을 들인 날. 엘렌에 대해 다 털어놓고 한숨을 내쉴 때.
완전히 체념해 버린 얼굴.
그것을, 세이나는 차마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그건 무조건 회장이 잘못했어요.”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덧붙이기도 했다.
“디온 탓이 아니에요.”
유리알처럼 맑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디온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세이나는 아버지를 잘 아나요?”
“잘 안다고 하기에도. 딱 두 번 봤나. 두 번 다 좋은 기억은 아니네요.”
분위기가 더 가라앉을 텐데. 염려하면서도 입은 계속 움직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기도 했다.
“처음은 부모님의 실종 소식을 받은 날이었죠.”
딱히 비밀도 아니었으니까.
“임무 중 사고였대요. 처음에 알려 준 사람은 할아버지의 동료분. 두 번째는 어떤 기사가, 세 번째는 회장이었죠.”
돌이켜 보니, 그날의 회장은 묘하게 디온과 비슷했던 것 같다. 그처럼 어깨가 축 처졌던가.
아무튼, 한없이 우울해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예감했었다.
아, 찾지 못했구나.
“더는 수색이 힘들 것 같다고 말했어요.”
나는 더, 기다려야 하는구나.
* * *
“그것도 아버지가 잘못한 겁니다.”
“회장은 죄가 많은 사람이네요.”
뒷말은 친밀감을 만들기 좋은 수단이라고 했던가.
그를 따라 끄덕이며 세이나는 이 도련님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살짝 이상하기도 했다. 매일 함께 식사하고, 집을 찾아오면서도 이런 대화는 그동안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서로 은연중에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확실히, 세이나는 그랬다.
디온 프라벨은 회장의 첫째 아들이고, 따지고 보면 이 관계를 맺은 처음 목적은 일에 있었다.
회장에게 좀 좋게 말해 주길. 혹시 모르지 않는가. 강등도 없던 일이 될 수 있을지도.
그러나 지금껏 겪었던 일련의 일들.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까지는 일보다는 개인적인 인연에 가까웠다.
……이제는 아는 동생 말고.
친구라고 소개할 만하지 않을까?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던 회장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세이나는 어렵게 과거의 기억을 떨쳐 냈다.
우울한 기억은 굳이 되짚어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땅을 파고, 또 파고, 파다 보면 결국 자신의 마음에만 큰 구멍이 남을 뿐.
그렇지 않아도 상처를 주려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스스로까지 제 살을 깎아 먹을 필요는 없다.
막 마음 정리를 끝내던 그때, 디온이 불쑥 말했다.
“이제 공작님 차례 아닙니까?”
그와 동시에 담요를 덮어쓴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을 세이나는 볼 수 있었다.
‘뭐야, 안 자고 있었어?’
“이런 분위기에서 혼자 숨기다니. 양심이 없군요.”
그 의문에 답변하듯 라샤드가 담요를 살짝 내렸다. 그러나 대답은 매몰찼다.
“싫어.”
“저래서 친구가 없는 거군요. 또 배웠습니다.”
“……따돌림 아니라고.”
그러고 라샤드는 몸을 뒤척였다. 일어서는 게 아니라, 다시 자려고 자세를 바꾸는 것이었다.
“둘 다 수다는 거기서 멈추고 빨리 자 둬. 내일 도서관에 가서 레블로테에 대해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으니. 아직도 안 돌아왔잖아. 불안하지도 않아?”
“안 불안한데?”
“속 편한 녀석.”
은근슬쩍 반말해도 지적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로 불안한 모양이었다. 세이나는 괜히 안쓰러워 라샤드를 더 빤히 보았다.
왜 들어가지 않고 몸까지 웅크려 가며 저러고 있담. 더 불쌍해 보이게.
“나는 바쁜 몸이다. 공작령 문제 외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이런 어린애의 모습으로는…….”
막막한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나는 그를 위로하려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며칠은 괜찮지 않을까요? 아론도 있고, 집안 어른이나…….”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어.”
그런데 또, 지뢰를 밟은 듯하다.
“남은 친척도 없고. 모두 다 죽었지.”
그것도 여러 개를 한 번에.
뭐라고 수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또 한숨이 흘러나왔다.
라샤드는 곤란해하는 얼굴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세이나를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럴까 봐 말하기 싫다고 한 거였는데.”
왜 이렇게 춥지?
장작을 더 넣어야 하나?
* * *
타닥타닥.
벽난로의 불이 불꽃이 튀며 소리를 내었다.
어색하게 중단된 대화는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세이나는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했고, 라샤드는 담요를 끌어당기고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디온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거실은 아주 고요하기만 했다.
‘냉혈한. 악마. 괴물……. 또 뭐였지.’
그러나 라샤드가 던져 놓은 화제가 꽤 무거워, 세이나는 지루함 대신 생각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화려하고 끔찍한 별명들.
그러나 세이나가 아는 라샤드 칼만은, 그 어느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나라 제일의 미남……은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괴물이라고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인간적이다.
거기다 두 사람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고. 혹시 이것도 원작에 있는 내용이었을까? 그럼 엘렌은 어떻게 해결했지?
계속 머리가 복잡하기만 했다.
문득 라샤드와 눈이 마주친 건 막 자정이 지날 무렵이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담요 바로 위에 나타난 붉은 눈이 가만히 그녀를 주시했다. 세이나는 그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괜히 물어봐서.”
“괜찮아.”
디온은 그녀의 무릎을 베고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숨소리에 안도하며, 세이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내일 도서관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요.”
“너는?”
“저는 사흘 정도 안 자도 끄떡없어요.”
무릎은 사흘 동안 내주기 어렵겠지만.
슬슬 다리가 저려 디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이미 푹 잠에 빠진 것 같으니, 조심스레 내리면 되지 않을까.
“잠이 안 오는군.”
어떻게 내리면 잠을 깨우지 않을까 고민하는 와중, 라샤드가 자세를 바꾸었다.
세이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얼굴은 평소처럼 진지하고 침착하기만 했다.
“눈치채고 있었지?”
“네?”
“악몽.”
악몽이라면 그때의 지하실을 말하는 걸까. 조심스레 기억을 되짚어 보던 세이나는 곧, 어떤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세레나.”
“……내 사촌 동생이야.”
그때 그, 천장에 매달려 있던 소녀 말이다.
“정확히는 날 죽이려는 사람의 딸이었지.”
세이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물었다.
“숙부……였나요?”
“그래.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숙부는 그 자리를 되찾아야겠다고 했지. 숙부님은 원래 아버님보다 먼저 후계자로 지목되었어. 어떤 사건으로 아버님께 넘어오게 되었고.”
“…….”
“하지만 결국 공작위를 받은 사람은 나였어. 숙부님은 그 자리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고 했지.”
라샤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마치 잘 모르는, 남의 이야기를 전해 주듯이.
“넓은 저택에서 내 편이라고 할 사람은 몇 없었어. 집사와 하녀장. 그리고 아버님을 따르던 기사와 하인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매 순간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
하지만 목숨을 건졌다는 대목에서부터 살짝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라샤드가 제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감정을 억누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친척들은 그들까지 모두 죽이려 하더군.”
“대단하네요.”
“하지만 세레나는 내가 죽인 게 아니었어.”
그녀는 그 말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레나는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마도, 그의 손에서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어린 소년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때의 결심이 어땠을지 세이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럼 그…… 어떻게 된 거예요?”
“숙부가 죽였다.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가족 다 같이 목을 매자면서.”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결말이었다. 그럼 그때의 그 악몽은, 직접 제 눈으로 본 광경인 걸까.
“그래도 이유는 나였으니, 아주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라샤드는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세이나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눈이 마주쳤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라샤드는 아주 느리게,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
꽤 망설이면서.
“그러니 내가 이 집을 무도하게 빼앗을까 걱정하지 마.”
“……네?”
세이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응? 갑자기?
왜 갑자기 여기서 집이 나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