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그날, 세이나는 연극 내내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당신의 탓이 아닌데도, 할머니는 그녀에게 굉장히 미안해했었다. 그럴 필요 없다, 할머니한테 화난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해 줬어야 했는데.
세이나는 눈가를 매만진 후 뒤로 젖혔던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연극은 어느새 중반부를 훌쩍 넘어 있었다.
두 사람은 허리까지 숙이면서 연극에 몰두해 있었다. 세이나는 그들을 가만 바라보다 곧 사이에 파고들어 작게 속삭였다.
“율리시즈를 죽인 사람이 누구냐면…….”
“말하지 마!”
“쉬잇! 세이나!”
한없이 진지한 눈빛들이 그녀를 향했다. 세이나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후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누구냐면 말이지이…….”
제법, 나쁘지 않은 밤 산책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평화가 꽤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결국, 세이나는 연극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다음 날.
“책 보면서 밥 먹지 말아요.”
세이나는 날카롭게 라샤드를 째려보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일단 끄덕이긴 했지만, 라샤드는 쉽사리 책을 놓지 못했다. 그가 한 번 봐 달라는 듯 불쌍하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세이나는 강경했다.
“책에 발 달렸어요? 도망 안 가요. 당신도, 디온. 등 돌리고 있어도 다 보여요.”
“……한창 재미있는 부분인데.”
디온이 어린아이처럼 툴툴거리며 책을 덮었다. 고분고분한 행동이었지만 아직 자세는 똑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선은 닫힌 책의 표지를 향해 있다.
제목은 어제와 달랐다. ‘솔레스의 다섯 딸’. 하지만 작가는 같았다.
어젯밤.
두 남자는 짧은 연극에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세이나는 연극의 원작이 아주 유명한 소설이며, 다른 작품들도 모두 성공했다고 덧붙였다.
그녀의 할머니가 전권을 집에 모아 둘 만큼이나.
그것이 실수였다.
이른 아침 방문한 라샤드는 짧은 아침 인사 후에 바로 다음 책을 찾았다.
세이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휘적휘적 걸어 그가 찾는 책들을 쥐여 주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잠시간 눈을 붙인 후 1층으로 내려가니, 어느새 은발 머리도 소파를 차지하고 있었다. 손에는 책이 있었다.
‘책 읽는 것 싫어한다더니.’
독서를 시작한 그들은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다.
마치 혼자 있는 것 같은 적막 속에서, 세이나는 적당히 씻은 후 근처 빵집에서 빵을 사 오고 아침을 준비했다.
2명분을 더 산 건 순전히 친절에서였다.
그런데, 이제 이런 쓸모없는 짓은 안 해야겠다.
“책 치우고! 자세도 바로 하고!”
다 큰 성인들에게 예절 교육을 하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두 사람은 귀족이었다. 귀족들에게 예절과 격식은 아주 중요하지 않던가.
아, 이게 밥 먹을 때 핸드폰 치우라고 하는 엄마들의 마음이구나.
“빨리 읽어 주세요. 곧 다 읽으니까.”
“나도 얼마 안 남았어.”
“전 10분이면 다 끝나요.”
“난 5분이야.”
서로 읽는 속도로 경쟁은 왜 하는지.
“저 오늘 나갈 일이 있어요. 집 잘 보고 있어요.”
“다시 생각해 보니 3분이면 될 것 같네요.”
“난 1분.”
“……네, 두 사람이 있으니 저도 안심이네요.”
그래도 아주 이성을 놓은 건 아니었는지, 두 남자는 자발적으로 뒷정리를 맡겠다고 했다.
세이나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내려왔을 때 그들은 다시 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정말 책만 보고 있었다.
배웅하러 나오지도 않았다.
몇 시간 뒤, 모험가 협회 접수대에서 세이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학부모는 정말 힘들어. 그렇지?”
안나가 다소 쌀쌀맞게 대답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 * *
“요즘 말이죠. 일이 없어도 너어어무 없어요.”
안나는 거의 누운 자세로 칭얼거렸다. 한껏 늘어진 모습에 두리번, 세이나는 주변을 살폈지만 자리를 지키는 이는 매우 적었다.
이 녀석. 중요한 일이니 꼭 와 달라고 사람까지 보내더니. 수다 상대가 필요했던 거군.
“이러다 협회 망하는 걸까요? 실업자 되는 건 아니겠죠?”
“……저번까지는 그래도 일이 많지 않았어?”
“네. 많았죠. 하지만 그것도 작년에 비해서 적은 편이었어요. 그리고 한번 다 쓸고 가니 이제 전멸. 이번 겨울은 정말 심심하게 보내겠네요.”
“겨울이 의뢰가 좀 적긴 하지.”
“세이나에게 소개할 의뢰도 없어요…….”
아, 수다가 아니라 이쪽이 진짜인 모양이다.
안나는 세이나에게 괜찮은 임무를 소개해 주지 못해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워서, 세이나는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사실, 최근에 크게 돈 벌 일이 있었어.”
“……네? 돈이요?”
안나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더 설명해 보라는 눈빛이었지만, 세이나는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까.
내 옆집에 여주인공이 사는데, 남주인공 후보가 여주인공을 지켜야 하니 집을 기간제로 빌리겠대. 그리고 지금은 막장 소설을 읽고 계셔.
‘아마 종일 그러고 있을 것 같은데.’
저녁을 먹을 때도 책을 끌고 식탁으로 오면 등짝을 한 대 후려쳐 버려야겠다. 막 그런 다짐을 하는 중이었다.
세이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제야, 떠올린 것이다.
‘엘렌.’
이 소설의 여주인공. 옆집에 사는 예쁜 아가씨이자, 곧 납치범의 방문을 맞이하게 될 여자!
‘맙소사, 납치범이 올 거라고 말을 아직 안 했네!’
집에서 나타난 마물에 정신이 팔려 모조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충분히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세이나는 미처 엘렌을 떠올리지 못했다.
내내 엘렌과 마주친 적도 없었다.
‘엘렌……. 괘, 괜찮겠지?’
아침에 집 앞을 청소하면서 이상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밤사이 큰 소리가 난 것도 아니다.
칼만 공작은 엘렌에 대해서 딱히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세이나는 그걸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아무렴 공작인데. 알아서 잘 처리했겠지.’
그걸 위해서 자신의 집에 들인 것이지 않은가.
오늘도 그는 세이나의 집에 남아 있다. 옆집에 어떤 소리가 난다면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아무리 그가…… 지금, 독서에 빠져 있다고 해도.
‘남주인공이 막장 소설을 읽느라 여주인공을 구하지 못하는 것도 웃기잖아.’
세이나는 애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렸다. 고개를 들자 얌전히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안나가 보였다.
“이, 있어. 그런 일.”
“빚낸 건 아니죠?”
“아니야.”
“그럼 도박?”
“그것도 아니야.”
“혹시 출생의 비밀? 알고 보니 백작가의 딸?”
이쪽도 막장 소설을 너무 많이 봤다.
“아무튼,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당분간은 의뢰를 안 받을 생각이거든. 요즘 바쁘기도 하고.”
“바빠요?”
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튀어나왔다.
안나는 유독 세이나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 저번 일 이후로 세이나가 상심할까 봐 신경 써 준 것이, 그대로 습관이 되어 버린 듯했다.
세이나가 시선을 피하는 와중 안나는 더욱더 그녀에게 다가왔다.
“디온 프라벨? 응? 디온 프라벨 때문이죠? 네!?”
“그, 그게 아니라…….”
“아, 맞아요! 제가 소문을 또 듣기는 했…….”
“미안, 그건 안 들을게.”
칼같이 자르는 목소리에 안나가 놀라 입을 닫았다. 세이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이더니 살짝 미소 지었다.
“역시 이야기는 본인에게 직접 들어야지.”
뒷소문은 보통 과장되기 마련이다. 세이나는 사실, 과거 안나에게 물어본 것도 조금 후회스러웠다.
그녀도 소문으로 고통받았던 역사가 있지 않던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야지. 여기저기 남에게 묻고 다니며 괜한 선입견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공작님도 듣던 것처럼 아주 냉혈한은 아니고.’
막장 소설을 좋아하는 냉혈한이란 말이지. 그 생각을 하니 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디온도 처음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싶었지만, 며칠 함께 지내다 보니 거리를 둘 만큼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그에 대한 느낌은…… 그냥 동생?
옛날이야기도 좋아하고, 어제 거리를 구경하는 얼굴은 정말 아이 같았다. 뭘 사 줄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꽤 귀여웠단 말이지.
‘이래서 부모님들이 돈을 열심히 버는 거군.’
간식이라도 사서 돌아갈까.
‘그래도 공작은 아직 좀 얄미운걸.’
결국, 마물이 왜 나타났는지 듣지 못했다.
디온의 말처럼 위험한 일일인지도 모르지만, 세이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혹여 그로 인해 원작에 관여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집은, 지켜야 하니까.
‘한 번 더 탐지 부서를 뒤져 볼까?’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이나?”
두 여자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곱슬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 곰 같은 덩치의 남자가 바쁘게 달려오고 있었다.
“로벤?”
“역시 세이나가 맞군! 마침 잘됐다!”
로벤은 한달음에 그들 앞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르는 새도 없이, 그가 덥석 세이나를 붙잡았다.
세이나는 그의 미소가 어쩐지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일이야, 일!”
아, 왜 일복은 항상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생기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