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상인은 디온이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줘서 매우 기쁜 눈치였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작업하며, 이곳에 있는 공예품들은 그들 모두의 결과물을 모아 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동안에도 디온은 드래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인은 그것마저도 좋아했다.
“드래곤을 아주 좋아하나 봐?”
마찬가지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었기에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디온에게 저 드래곤 조각은 아주 흥미로운 관찰 대상임이 틀림없었다.
“나도 드래곤을 좋아하지. 어렸을 땐 동화에 드래곤이 나오지 않으면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니까. 다 커서도 드래곤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기도 했지. 멋지잖아? 마법의 주인이 드래곤이라는 설도 있고.”
“마법은 마족의 것이라던데.”
“신전에서 그랬지.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
“드래곤은 신비의 동물이라 아직 누구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하지. 하지만 계속 전해져 내려왔고, 이렇게 형체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제법 구체적이기도 해.”
“…….”
“그러니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르지. 마법을 썼을 수도 있고.”
“그럼 마족은?”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어쩌면 마족이 드래곤일지도 몰라.”
그러자 디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상인은 더욱 신이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마족들끼리 의견이 나뉘어 일부는 드래곤이 되고, 일부는 그대로 남았을 수도 있지. 드래곤 측은 동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편을 들었고, 그래서 마법이 인간에게 전달된 거야.”
“……신전에서 들으면 화낼 만한 이야기군요.”
“마족이라고 다 나쁜 놈만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
상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안 그래?”
세이나의 소감은 이러했다.
‘와, 안 궁금하다.’
마족이니. 드래곤이니.
그녀로서는 모두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했다. 세이나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만 믿는 주의였다.
하지만 그녀의 흥미와 별개로, 상인의 이야기는 꽤 위험한 것이긴 했다. 성국에서 들으면 해괴망측하다며 열을 올릴 만한 가설이었다.
라샤드도 그녀와 생각이 같았다. 그가 뭐라 반박해 주려고 입을 열었던 그때.
디온이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주 신중하게.
“뭐, 그, 그, 그런 설도 있긴 하지.”
“오, 우, 우, 우와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세이나까지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치자, 상인의 미소가 더욱더 깊어졌다. 저 얼굴을 시무룩하게 할 만한 생각들이 당장 수없이 많았지만.
진지하게 듣는데 옆에서 초를 칠 수도 없는 일이다.
저렇게 몰두하는 디온은 또 처음이기도 하고.
‘의외로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네.’
이윽고 세이나는 중대한 결심을 내렸다.
“살게요!”
디온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세이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사죠, 뭐! 하하.”
저렇게 빤히 보는데, 사 줘야지. 어쩌겠어.
그녀는 기꺼이 주머니를 열었다. 정교한 조각인 만큼 드래곤은 일반 램프보다 꽤 비싼 편이었다.
그래도 소지금은 넉넉했기에 아주 마음이 무거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상인이 포장해 준 것을 들고 막 떠나려고 할 때, 디온이 다시 손을 뻗었다.
“저건 뭔가요?”
“이건 불사조야!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영감을 얻었지!”
세이나와 라샤드는 동시에 생각했다.
‘구라 치네.’
‘사기꾼이군. 그걸 누가 믿…….’
하지만 디온은 달랐다.
“정말인가요?”
‘믿냐!’
“어디서?”
조금 전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상인은 자신이 직접 만난 불사조를 손짓을 이용하여 설명해 나갔다. 디온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세이나는 깨달았다.
“그것도 주세요…….”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 * *
쇼핑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세이나, 이건 뭐지?”
“당연히 먹는 거죠. 자, 종이를 이렇게 내려서 조금씩 베어 먹는 거예요. 이렇게…….”
“이건? 머리에 쓰는 건가요?”
“어린애들이 허리에 매는 가방이에요! 내려놔요, 얼른!”
“이건?”
“아, 이건 그냥 소품인데, 서쪽 멀리 있는 사막에서는 이걸 현관 근처에 두면 재앙이 도망간다고 해요.”
“이건요? 개 목걸이인가?”
“……사람도 써요. 어서 사과해요.”
디온은 슬쩍 고개를 숙였지만, 목걸이 판매상은 험악하게 굳은 미간을 좀처럼 풀지 않았다.
세이나는 황급히 그를 잡아당기고 그 앞을 지나쳤다. 집에 비슷한 목걸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뭐 이렇게 신기해하는 게 많담?’
처음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귀족과 평민의 생활 방식은 꽤 달랐고, 두 사람은 곱게 자란 귀족들이었으니.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은 늘어만 갔다.
세이나는 두 사람이 그냥 곱게 자란 것이 아니라 아주 자신의 저택에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한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아냐?’
그런 눈으로 째려보니 답이 돌아오긴 했다. 라샤드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원체 바빠서 말이야.”
“제 경우에는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디온이 어린아이가 만든 것 같은 조잡한 가면을 살짝 올리며 답했다. 입 안에는 세이나가 사 준 사탕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 불쌍한 자식들.
‘그렇게 말하니까 불평도 못 하겠잖아.’
사실, 세이나가 아는 것이 많기도 했다. 헌터 일을 하면서 대륙 곳곳을 누볐던 그녀다. 그녀는 두 사람의 궁금증을 훌륭히 해결해 주고 있었다.
노천극장에서도 그랬다.
“연극도 하는군요.”
“가 볼래요? 나도 오랜만에 보네.”
세이나 일행은 좌석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각자의 취향에 맞춰 산 물건들도 고스란히 그들 옆자리를 차지했다.
“제목이 뭐야?”
“이름이 귀에 익네요. 아마, ‘율리시즈 로만의 아내로 산다는 것’ 같은데요?”
“처음 듣는데.”
“네?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죠! 엄청 유명한 소설이에요!”
그러나 라샤드는 영 모르는 눈치였다. 디온도 다르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들의 인생에 의구심이 샘솟는 순간이었다.
대체 얼마나 바쁘기에 그 소설도 읽지 않은 걸까.
시작은 평민들 사이에서의 입소문이었지만, 결국은 귀족들에게도 퍼져 황녀의 손에도 들어갔다고 알려진 그 유명한 소설을 말이다!
‘문화생활 정도는 즐기고 살아!’
다행히 연극은 아직 초반부였다.
세이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저기 저 여자의 이름은 엘리야. 주인공이에요. 가난한 귀족의 딸인데, 집안의 빚 때문에 팔려 가듯 결혼하게 되죠. 그 대상은 율리시즈 로만. 바람둥이 개차반으로 아주 유명한 남자예요.”
“남자는 안 보이는군요.”
“좀 더 기다려 봐요. 엘리야는 저런 놈이랑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을 하며 첫날밤을 맞이해요. 그리고 어렵게 마음을 다잡고 침실로 돌아간 후에…….”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세이나는 담담하게 무대 위를 설명했다.
“남편이 침대에서 칼을 맞아요.”
하얀 시트가 붉게 젖어 들어갔다. 엘리야는 경악에 휩싸인 얼굴로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돌연 남자의 고개가 움직였다. 율리시즈가 말했다.
“얼굴을…… 못 봤어.”
“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엘리야. 날 죽인 범인의 정체를 꼭…….”
그는 유언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엘리야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아가씨들이 오셨습니다.”
남편의 누이들이 당도한 소리였다. 무대 위에 그녀의 독백이 울렸다.
“왜 하필? 첫날밤에 들이닥치는 누이들도 있단 말이야? 결혼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평생 얼굴도 몇 번 안 봤다면서?”
왜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타이밍이었다. 엘리야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지만, 다시 쓰러졌다. 그 바람에 그녀가 붙잡은 서랍장이 쓰러졌다.
쿠당탕!
서랍이 열리며 내용물이 그녀의 발치에 쏟아졌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놀랍게도…… 가발이었다. 엘리야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율리시즈가 몰래 여자들을 만나기 위해서 자주 변장을 했다고 들었어.”
엘리야는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남편의 가발을 덮어썼다.
남편의 신발을 신고 남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목을 가다듬어 목소리를 억지로 낮췄다. 남편처럼 입가에 점도 찍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당당히 응접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라샤드는 그렇게 말했으나 일어서진 않았다.
엘리야는 태연하게 연기를 이어 갔다.
오랜만에 가문으로 돌아온 시누이들은 신랑과 신부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를 힐끔거리며 말을 더듬는 것을, 엘리야는 놓치지 않았다.
엘리야의 독백이 다시 허공에 퍼졌다.
“저들 중, 남편을 죽인 이가 있다.”
이후 이야기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세이나는 어느새 저에게 들러붙던 물음표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남자는 연극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라는 전개가 이어지면서도 쉽게 눈을 떼기 어려운 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몇 분 후, 무대 위에 나타난 남자가 엘리야를 향해 말했다.
“율리시즈는 사실…… 당신의 잃어버린 남동생입니다!”
주르륵. 엘리야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주스를 흘렸다. 동시에 두 남자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번지는 것을 보며, 세이나는 미소 지었다.
‘봐, 재밌잖아.’
누군가와 함께 거리를 걸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듯 함께 연극을 보는 건 10년도 더 전이었다.
마지막 연극은 조부모와 함께 본 것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유치한 말장난을 하는 배우들을 보며, 할머니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때 나도 웃을걸.’
어린 세이나는 내내 뚱한 얼굴로 연극을 감상했다. 사고 싶었던 장난감이 있는데, 품절이 되어 결국 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손녀를 달래려고 정말 노력했다. 사탕을 쥐여 주고, 연극을 보여 줬다. 저것 봐, 정말 재미있지 않니?
‘재밌었어. 그런데 안 웃으려고 애쓰고 있었어. 왠지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했거든.’
왜 그런 오기가 들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