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결국, 라샤드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내가 할게.”
“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책도 있고.”
“정말 괜찮아요! 어떻게 손님한테 일을 시키겠어요?!”
“종일 청소했으니 피곤하잖아.”
“새벽에 푹 자서 괜찮아요.”
“아니, 그…… 색이…….”
라샤드의 긴장된 눈이 냄비 안의 보랏빛 물체를 향했다.
‘그거 못 먹을 것 같아서 그래. 진짜.’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었기에, 라샤드는 입을 꾹 닫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세이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모양은 이래도 맛은 괜찮아요. 다른 친구들도 곧잘 먹었는걸요?”
라샤드는 다시 할 말을 삼켰다. 혹시 아주 배가 고픈 상황이라든가. 그런 상황은 아니었니?
“날 못 믿는군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좋아요. 그럼 같이해요!”
그녀가 옆으로 성큼 물러나며 외쳤다.
“누가 더 맛있는지 디온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라샤드는 그녀와 나란히 서서 요리하게 되었다. 식칼은 생각보다 다루기 어려운 도구는 아니었다.
평생 검을 휘둘러 온 그였다. 처음엔 버거웠지만 하다 보니 나름대로 적응이 되었다.
요리책도 매우 상세했고, 재료도 넉넉했다. 세이나는 마정석을 팔고 오는 길에 많이 샀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라샤드는 어린 시절 우등생이었다.
그렇다고 의욕이 마구 샘솟는 것은 아니었다.
딱히 세이나를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냥 제대로 된 요리를 먹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하겠다고 했으니, 제대로 해내야겠다는 책임감 정도.
어차피 심사위원은 그를 싫어하니 말이다.
하지만 내기는 전혀 뜻밖의 결과를 맞이했다.
“세이나.”
디온은 스푼을 내려놓고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더니,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아래로 닫혔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별로예요?”
세이나는 매우 놀란 눈으로 두 요리를 번갈아 보았다. 디온은 차마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응? 엄청 별로는 아닌데…….”
“이쪽도 한번…… 맛보세요.”
“와! 엄청 맛있네!”
순수하게 놀라워하는 감탄이 튀어나왔다. 자존심 상해하거나,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은 세이나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 스푼을 움직였다. 향하는 곳은 자신의 것이 아닌, 라샤드가 태어나 처음 내놓은 요리였다.
“공작님, 요리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나 봐요!”
“나는 그냥 책에 있는 대로 했을 뿐이야.”
“와, 맛있네! 같은 재료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책에 있는 대로 했다니까…….”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세이나의 요리도 아주 못 먹을 것은 아니었다.
라샤드는 문득 다른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매우 오랜만임을 깨달았다.
공작저에는 그와 함께 식사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방문자는 극히 드물었고, 그가 다른 저택을 방문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주변인들은 대부분 부하들. 친척도, 가족도 그에겐 없었다.
거기다 자신이 직접 한 요리들도 있었기에, 라샤드에게 이 자리는 매우 새롭게 느껴졌다. 세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역시 공작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다 잘하나 봐요. 그렇죠, 디온?”
그녀는 정말 그의 요리에 만족하고 있었다. 라샤드는 뿌듯함을 느꼈다. 비록 옆에서 디온이 이렇게.
“제가 아니면 평생 발견하지 못했을 재능이었군요. 고맙게 여겨 주세요.”
……말하고 있어도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그는 세이나 못지않게 열심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남은 고기 한 조각을 두고 두 사람이 신경전을 시작하자 라샤드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또 해 줄 테니 싸우지 마.”
아주 평화로운 저녁 식사였다.
“재능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책에 있는 대로 하면 된다고…….”
* * *
청소는 끝났지만, 아직 할 일은 많았다.
먼저 박살 난 서랍장부터 새로 사야 했다. 카펫과 커튼도 엉망진창. 부서진 물건들은 그냥 버린다고 해도 이것저것 살 물건이 많았다.
“짐꾼 필요하죠?”
디온은 눈치 빠르게 외출 준비를 하는 그녀에게 붙었다. 세이나는 한번 집 안을 둘러보다가 낮게 그에게 말했다.
“공작님도 데려가요.”
“……왜요?”
왜긴. 따돌리는 것 같잖아. 둘만 나오면.
밤의 거리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문을 연 가게도 많았고, 아직 장사를 접지 않은 노점들도 꽤 있었다. 각자 입구마다 걸어 놓은 유리병 속, 마정석이 환한 빛을 품고 있다.
전생의 야시장을 연상케 하는 거리.
수도의 밤은 다른 도시보다 더 소란스럽고, 밝았다.
공기는 쌀쌀했지만, 부대끼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니 그다지 춥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길 잃기 쉬우니 조심해요.”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게, 라샤드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평생 귀족으로 산 그에게 평민들의 거리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다가왔다. 디온도 크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조금 신기해하는 듯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야, 둘 다?’
어린애들을 양쪽에 끼고 나온 느낌이다. 어디서 감금 생활이라도 한 건가.
어쨌든 그녀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첫 목적은 카펫이었다.
“어서 오세요!”
우연히 방문한 작은 가게는 입구부터 휘장처럼 복잡한 패턴의 천을 걸어놓은 곳이었다.
내부의 벽은 작은 틈도 없이 온통 갖가지 천으로 가려져 있으며, 바닥 역시 카펫들이 퍼즐처럼 맞춰져 있다.
강렬한 색상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 광경에 가장 놀란 이는 라샤드였다. 세이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렇게나 신기해요? 공작저에도 카펫은 있지 않나요?”
“이렇게 많은 걸 한 번에 본 적은 없어.”
“아, 그래요?”
“보통 상단에서 시제품을 가져와서 보여 주고 주문을 받아. 하지만 가지고 올 수 있는 종류가 한정적이지. 그리고 이곳은…… 아주 특이하군.”
확실히 여러 지역을 다녀본 경험이 있는 그녀가 보기에도 이곳의 물건들은 확실히 독특했다.
특히 저 커다란 원이 있는 카펫은 보기만 해도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저건 소용돌이일까, 괴물의 눈일까? 저런 걸 집에 거는 사람이 있나? 혹시 의식용? 겁주기용?
진정한 의미는 모르겠으나, 라샤드에게 어떤 용도인지 알 것 같았다.
“놀랍군.”
라샤드는 그걸 탐구용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 가게는 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물건들도 다루고 있어요! 이를테면 이건…….”
판매원은 재빨리 라샤드의 옆에 붙어 설명을 이어 갔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마치 학생 같다. 호기심도 많고, 집중력도 좋은 우등생이다.
세이나는 디온에게 물었다.
“이상하게, 즐거워 보이네요.”
“처음인가 보죠. 공작님께서 직접 저택의 물건을 고르는 경우는 잘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죠?”
“제일 비싼 걸 알아서 사 오겠죠. 집사가.”
아, 그렇구나.
“다른 바쁜 일이 많은 자리죠.”
설명을 들으니 수긍이 갔다. 인테리어에 신경 쓰는 공작님. 드물 것 같긴 하다.
세이나는 배려심 넘치는 마음으로 라샤드가 가게를 충분히 둘러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종업원은 친절했고, 라샤드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때로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문제는 그 과정이…….
“이건 어떤 민족이 만들었지?”
너무 길었다는 것이다.
“재료가 특이해 보이는데, 어떤 작업을 거쳤지?”
“주술적인 의미가 있어 보이는데.”
“장인들과는 어떻게 연락하나?”
‘야, 여기는 박물관이 아니야!’
신나게 말을 이어 가던 종업원에게 마침내 지친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가 간절함을 담은 눈빛으로 세이나를 보기 시작했다.
쟤 좀 말려 보라는 뜻이다. 세이나는 학부모가 된 기분을 느꼈다.
‘우리 애가 탐구 정신이 강해서요…….’
결국 그녀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마음에 들었던 카펫을 골라, 값을 치렀다.
내일 아침 집으로 배달해 달라는 당부까지 마친 후에야 그들은 마침내 직물 가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노점상 앞이었다. 넓은 가판대 위, 다양한 형태의 램프들이 전시되어 있다.
마침 마물 때문에 쓰던 램프가 망가져 버렸기에, 세이나는 자연스럽게 그곳에 이끌렸다.
그녀가 찾는 것은 기름이 아닌 최하급 마정석을 올려 둘 만한 램프였다.
‘이번에는 좀 예쁜 곳에 둬 볼까.’
가판 위에는 일반적인 형태의 램프도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 쪽은 유리로 만들어진 받침대들이었다.
투명한 형태 위에 마정석을 올려 두면 빛이 투과되어 다양한 색으로 빛나는 물건이다.
세이나는 돌고래 유리 공예품을 가리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손을 뻗기도 전에, 옆에서 팔이 튀어나왔다.
“이건…….”
“이건 뭔가요?”
디온이 가리킨 것은 유리가 아닌 조각품 쪽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다.
상인이 씩 웃더니 외쳤다.
“그야 당연히 드래곤이지!”
활짝 펼친 두 쌍의 큰 날개, 도마뱀과 같은 머리, 이마에 난 뿔, 긴 목과 날카로운 것이 달린 꼬리까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드래곤이었다. 그 정교함에 놀란 것도 잠시, 세이나는 드래곤의 아래에 있는 작은 받침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거, 마정석 두는 자리 맞지?
“작품명은 마정석을 지키는 드래곤이다!”
‘맞네, 맞아.’
이 대단한 작품은 놀랍게도 램프와 같은 용도였다.
이렇게 가판에 두고 파는 것을 보아 가정용인 듯했다.
‘응, 마왕의 집에 전시하면 딱 어울리겠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당장 뜨거운 불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녀의 집에 두기에는 과하다 못해 지나친 물건이었다.
하지만 세이나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디온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멋지네요.”
혼자 나올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