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35화 (35/179)
  • #35

    5. 밤, 연극, 그리고 셋

    다시 만난 디온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차림이었다. 비틀린 미소에 문틈에 살짝 기댄 모습. 마치 이곳의 집주인 같다.

    그게, 라샤드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가 뒷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세이나는 거실에서 한창 청소 중이었다. 긴 머리카락은 대충 하나로 묶어 올린 채, 어젯밤처럼 이마의 땀을 닦아 내고 있다.

    “아, 오셨네요!”

    “……집은 좀 어때?”

    “완전 엉망이었죠. 이상한 액체가 거실 바닥에 잔뜩 쏟아져 있었어요. 이게 다 마물의 침이라면서요? 잘 지워지지도 않아서 종일 치우느라 고생했어요.”

    “부서진 건?”

    “아, 다행히도 완전히 부서진 건 서랍장밖에 없었어요. 바닥이 조금 무너지긴 했지만, 수리를 모두 끝냈고요. 둘러대느라 꽤 고생했어요. 대체 뭘 했길래 집 안이 이렇게 난장판이냐고.”

    “비용은?”

    “마정석을 팔았죠. 무려 40만 루펜!”

    세이나가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좀 나눠 드릴까요?”

    “됐어.”

    “파는 것도 디온이 도와줬어요.”

    세이나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라샤드의 뒤로 향했으나, 라샤드는 굳이 그걸 따라가지 않았다. 디온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이나가 그 말을 했을 때, 라샤드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나요?”

    디온은 그의 예상대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었다.

    다시 그의 복장이 라샤드의 눈에 들어왔다. 셔츠는 그의 빗장뼈가 보일 정도로 풀어 헤쳐져 있었다.

    ‘잠자리?’

    온갖 생각이 들게 하는 단어였다. 라샤드가 충격에 어린 눈으로 뭐라고 하기 직전.

    세이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오후에 잠시 눈을 붙이라고 1층 방을 줬는데, 침대가 오래되어서 불편했을 것 같아서요.”

    “이, 1층 방?”

    “네. 종일 디온이 청소를 도와줬어요. 피곤한 게 당연하죠.”

    아, 그렇군. 그런 거였어.

    라샤드는 뒤늦게 상황을 이해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온이 그의 뒤에 다가와서 속삭인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무슨 상상을 하셨습니까?”

    “……시끄러워.”

    잔뜩 웃음을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에 대꾸하며 라샤드는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세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 친해졌나?

    “아주 편안하게 잘 잤습니다.”

    디온이 라샤드를 지나쳐 세이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살짝 보이는 옆모습은 계속 웃고 있었다.

    “어디의 공작저에서는 한숨도 못 잤거든요. 훨씬 낫네요.”

    라샤드가 세이나의 곁을 지키는 동안 디온도 그들의 옆에 있었다.

    라샤드는 좀처럼 그 숨 막히는 새벽을 잊을 수 없었다. 디온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세이나를 보고 있었다. 라샤드보다 훨씬 걱정하는 낯으로.

    그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동시에 매우 살벌하게도 보여서 말을 붙일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공기마저 답답해지는 것 같아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저야말로 폐를 끼친 듯해서 미안합니다. 깨끗하게 청소할 정도로 소중한 방이지 않았나요.”

    디온의 말에 세이나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말을 뱉은 디온도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디온이 머문 곳은 어젯밤, 라샤드도 들어간 곳으로 세이나의 조부모가 지내던 곳이었다. 그녀는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주인 없는 방을 열심히 청소한 듯했다.

    “저를 도와주셨으니. 할아버지도 괜찮다고 하셨을 거예요.”

    “영광이네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훈훈한 분위기. 하지만 라샤드는 불편한 듯 눈썹 한쪽을 치켜세웠다.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아무튼, 전부 다.

    “또 할 일이 뭐가 있지?”

    “네? 그건 왜…….”

    세이나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보통 그런 말을 하면 의도는 딱 하나였다.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물었다.

    “……공작님이요?”

    거기에 담긴 의미는 라샤드도 바로 알아차렸다.

    왜 공작이 일하지?

    그도 동감했다. 굳이 여기서 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이유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세이나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디온이 끼어들었다.

    “이제 저녁이라 식사를 해야 하는데.”

    아주 재미있겠다는 표정으로.

    “요리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네? 공작님이 왜 요리를 해요! 제가 할게요!”

    “아, 역시 공작님처럼 고귀한 분은 못 하시는 거죠?”

    “그럼요! 어떻게 공작님한테 그런 걸 시켜요!”

    “제가 실수했네요. ‘공작님’이 요리를 할 수 있을 리가…….”

    그리고 라샤드는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할게.”

    그러자 디온과 세이나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마치 괴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라샤드가 낮게 말했다.

    “한다고.”

    그러고 그는 몸을 돌려,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그가 거실을 떠난 후에도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발언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특히 세이나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주방으로 달려갔을 땐.

    라샤드가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으로 식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이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맙소사.”

    공작 각하께서 정말 요리를 하려는 모양이다.

    * * *

    당연하게도 라샤드는 요리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다.

    평생 음식은 완성된 것만 접했다. 주방에 들러 본 적도 없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바도 없었다.

    이 집보다도 넓은 서재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가득 채워 살아왔으나, 요리책은 한 번도 손에 들지 않았다. 딱히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작이다.

    어딜 가든 하인들이 따랐고, 그들은 귀찮을 만큼이나 곁에 머물며 시중을 들었다.

    요리는 그가 쉽게 얻는 것 중 하나였다. 만들다니. 그런 꿈조차도 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라샤드는 요리도 썩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이나는 난처함을 느끼며 그에게서 식칼을 빼앗았다. 혹시 기분이 상할까 조심스럽게,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펼쳐 가며 식칼을 놓게 했다.

    덕분에 라샤드에게 그녀를 가까이서 관찰할 시간이 생겼다. 손끝 하나하나, 닿아 오는 온기가 나쁘지 않았다.

    식칼을 빼낸 후에도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샤드는 그녀의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녀 역시, 같을 것이므로.

    공작님과 요리라.

    어울리지도 않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한다고 나섰으니, 차마 쫓아낼 수도 없다.

    그 결과, 세이나와 라샤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게 되었다. 세이나가 그의 눈치를 보다 작게 말했다.

    “이, 일단 제가 하는 걸 도와주세요.”

    디온은 어째서인지 주방으로 오지 않았다. 라샤드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세이나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먼저 꺼낸 것은 양파였다. 능숙하게 껍질을 벗겨 내더니 물로 깨끗하게 씻어 냈다.

    그리고 툭, 반으로 잘라냈다.

    다음은 당근. 마찬가지로 툭. 반으로 잘린다.

    끝.

    ‘잠깐만.’

    다음은 감자.

    역시 껍질이 벗겨지고, 깨끗이 물로 씻겨졌다. 툭, 반으로 잘린 것도 같았다.

    거기서 끝.

    “세이나?”

    “네?”

    “그……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썰어야 하지 않을까?”

    “야영할 때는 다 이러잖아요?”

    ‘지금은 야영하는 상황이 아니지 않나.’

    아니, 야영에서도 해도 그것보다는 좀 더 잘게 썰지 않을까.

    그러나 세이나는 거침없었다. 달군 냄비 속으로 굵은 채소들이 투하되었다. 한참 그걸 볶던 세이나가 문득 중얼거렸다.

    “아, 버터부터였지.”

    라샤드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가까운 선반에 요리책이 있었다. 꽤 오래된 책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둔 것이리라.

    “뭘 할 생각이지?”

    “비프스튜요.”

    라샤드는 빠르게 비프스튜를 책에서 찾아내었다. 요리책은 제법 상세한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차례차례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고, 설명도 매우 자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라샤드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알 수 있었다.

    저건, 잘못되었다.

    냄비를 집어삼킬 만큼 강력한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이제 요리는 쳐다보지 않고 샐러드를 다듬고 있었다.

    “세이나.”

    “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스튜는 오래 끓여야 하는데 지금은 당장 배고프잖아요? 어쩔 수 없죠.”

    라샤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요리책을 뒤졌다. 짧은 시간에,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많은 요리가 그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라샤드는 그중 하나를 골랐다. 가장 간단하고 복잡하지도 않아 보인다. 세이나에게 이걸로 바꾸는 게 어떨까, 말하려던 그 순간.

    그녀가 냄비 안에 레드 와인을 콸콸 쏟기 시작했다.

    라샤드는 세이나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관심 없는 건 대충하는 성격이군.’

    다음 재료들이 냄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세이나는 잠시 찬장을 열어 구석에 있는 작은 케이스를 꺼내 왔다.

    딱 보기에도 오래된 것이었다.

    “옛날에 지인에게 받았는데, 어떤 요리에 넣어도 잘 어울리는 조미료래요.”

    “뭐가 들었는데?”

    “음…… 뭐더라? 건강에 좋다고는 들었어요. 그럼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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