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그대로 안고 마차에 올라탔었죠. 공작저에 도착해서도 침대에 내려놓기 전까지 꼭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들으니 더는 부정하기만도 어려웠다.
확실히, 자신은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누군가 그사이 그녀를 옮겼음이 명백했다.
자는 동안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아주 편안했던 것 같다. 꿈속에서 세이나는 아주 오랜만에 전생의 추억을 맛볼 수 있었다.
두꺼운 이불과 푹신한 침대. 그리고 끌어안은 것은…….
“죄송합니다.”
생각이 끝나기 전에 그 말부터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그 제가 공작님을…….”
애착 베개로 착각했나 봐요.
……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세이나는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재차 찾아온 민망함에 이마를 짚었을 뿐이다.
마물을 두고 쓰러진 것에 이어서, 이 무거운 몸을 직접 들어 옮기게 하다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그와는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정말 죄송합니다.”
“괘, 괜찮아.”
“제가 폐를 끼쳤네요. 정말, 정말 미안합니다. 각하.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그래서 그래요.”
“그랬겠지.”
“왜 내버려 뒀어요? 확 떼어 내 버렸어야지! 진짜 쓰레기 짓 했네.”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미친.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귀족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예의인데!
물론, 라샤드와는 며칠 전에 이미 딱 붙어서 지하실에 내려간 전적이 있으며, 올라오는 길에 손도 붙잡았고.
그 외 ‘예의’라고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으나.
지금 이 순간 세이나는 그 어느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라샤드의 표정이 꽤 묘했던 탓이다.
그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녀의 사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덕분에 세이나는 이렇게 생각해 버렸다.
‘진짜 기분 더러웠나 보다.’
하긴, 머리카락도 엉망이었고 옷도 지저분했다.
대충 닦은 뒤가 그 정도인데 전에는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냄새도 꽤 났었을 테고.
부끄러움이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정말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근처에도 안 갈게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
“아니에요. 꼭 그럴게요.”
열심히 사과했건만, 라샤드는 계속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다.
그 모습이 더욱 강력한 경고로 보여, 세이나에게는 다시금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작님 주변에는 진짜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일부러가 아닌 걸 알게 되셨으니, 너그러이 봐주실 겁니다.”
몹시 신중한 세이나와 달리 디온은 매우 유쾌해 보였다. 조금 전까진 아주 불편해 보이더니, 어느새 손바닥 뒤집듯 얼굴색을 싹 바꾸었다.
그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라샤드에게 물었다.
“그렇죠?”
라샤드의 시선은 이제 디온을 향해 있었다.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은발의 청년을 계속 노려보던 그는, 조금 뒤 한숨같이 답했다.
“그래.”
“휴, 다행이다.”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지.”
그러고 라샤드는 방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옷자락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 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세이나였다.
지금까지의 사과가 무색한 행동에 라샤드는 잠시 멍해졌다.
세이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제 손을 마치 남의 것처럼 바라보다가, 뒤늦게 그에게서 확 떨어졌다.
“아, 죄송.”
“따로 필요한 게 있어?”
“네, 그럼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잖아요.”
“어떤?”
“저번 일과 이번 일. 관련 있죠?”
세이나는 다시 라샤드의 눈에서 일어난 미묘한 흔들림을 포착했다. 그리고 또 작은 미안함을 느꼈다.
그가 그 이야기를 꺼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물러설 순 없었다.
“슬슬 모든 걸 고백할 때가 아닌가요, 공작 각하?”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밝힐 건 밝혀야지.
“왜 내 집 주변에 마물이 나타나게 된 거죠?”
* * *
라샤드는 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앉아 있는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던 세이나는 목에 부담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기에, 그리고 자신이 막 물어봤기 때문에 세이나는 라샤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몇 분간 올려다본 그는 정말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그의 얼굴에 여러 생각이 스쳤고, 또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눈동자는 그동안 끊임없이 흔들렸고, 동요했다.
조금 뒤 그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그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도 아직 알아보고 있으니까.”
뜻밖에 말에 이번에는 세이나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거짓말일까?’ 작은 의심이 마음속에 솟아나던 그때, 라샤드가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을 줘.”
“……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마물이 나타날 줄은 몰랐어. ‘어떤’ 일이 생길 줄은 알았지만.”
“그러니까, 왜요?”
“제대로 조사가 끝나면 네게 얘기하지.”
라샤드의 시선이 세이나의 옆으로 옮겨 갔다.
“너에게도.”
디온은 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른하게 감긴 눈은 졸려 보였고, 이내 소리 없이 하품하기도 했다.
그에게선 일말의 흥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샤드가 좀 전의 자신의 말을 막 후회하던 순간, 돌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제가 방해했나요?”
“나가려던 참이었어.”
아론은 방에 단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라샤드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 남은 이는 단둘이었다.
세이나는 라샤드가 닫고 떠난 문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식사는 맛있을 겁니다. 그래도 공작저니까요.”
뚝,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디온을 돌아보았다.
라샤드가 만들어 놓은 긴장감을 단번에 깨어 놓은 남자는 이제 다 죽어 버린 도마뱀의 사체를 찔러 보고 있었다.
앉은 자세가 놀랍도록 불량했지만, 세이나는 다른 것을 지적하고 싶었다.
지금 그걸 물은 게 아니잖니.
“디온은…… 궁금하지도 않아요?”
어떻게 마물이 수도 안에 나타난 걸까.
수도의 결계는 완벽하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뛰어난 마법사와 가장 뛰어난 헌터, 가장 뛰어난 학자가 머리를 맞대 가장 뛰어난 결계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비싼 마정석들을 매개로 결계는 수백 년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 기간 중 제국은 몇 차례 전쟁을 겪었으나, 적의 칼날이 수도의 턱 끝까지 쫓아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국의 수도는 공고하고,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 그런 수도에 대체 어떻게.
왜.
“왜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공교롭게도, 디온의 첫마디는 세이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와 같았다.
세이나는 그를 따라 생각의 방향을 바꿔 보았다.
“공작님이 저를 신뢰하지 못해서, 말하기를 주저하는 거겠죠.”
“글쎄요, 그럼 죽였을 겁니다.”
참으로 담백한 결론에 세이나는 말문이 막혔다.
기가 막혔지만, 동시에 이해되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칼만 공작저에 손님으로 있었다.
신뢰하지 않는 자에게 베푸는 친절치고는 과했다.
“왜 말할 수 없는지……?”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겠죠.”
그건 라샤드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시간을 달라.’라는 말 역시, 단 몇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사안이 아님을 암시했다.
디온은 그 복잡함에 엉켜 있는 하나의 요소를 지적하고 있었다.
바로, 불길함.
“아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험해지는, 그런 비밀일 겁니다.”
그 순간 세이나는 다시 결계를 떠올렸다.
만약, 결계가 무너졌다면?
결계는 제국의 자존심이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라고 여겨지지 않던가.
소식을 들은 황제는 격분할 게 틀림없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계를 원상 복구시켜라!’ 뒤에는 이렇게 덧붙여서.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그래도 알고 싶나요?”
세이나의 머릿속 황제는 이미 ‘알아낸 자는 모두 죽여라!’라는 극단적인 결론까지 내린 상태다.
실제로 황제가 그런 사람인인지는 모른다.
뛰어난 헌터는 여러 가지 상황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세이나는 늘 그렇듯 최악의, 최악의, 최악까지 고려해 보았다. 황제가 결계 유지를 명했고, 그 사실은 일부에게만 새어 나가 있는 상태라면.
그리고 공작으로서, 칼만 공작은 비밀을 지켜야 한다면.
그렇다면…….
“그래도 내 집에서 일어난 일은 알아야겠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마물은 헌터의 천적이에요. 절대로 가만둘 수 없죠. 또 나타난다면 왜 그런지 알아내야 하고, 알아내고 나선 바로 죽여야 해요.”
“…….”
“마물 따위. 절대 내 집 근처에 얼쩡대게 둘 순 없죠.”
금색 눈동자에 강렬한 의지가 흘러넘쳤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반드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헌터라도, 이렇게 대처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던 그때, 문득 세이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제 디온이 뭐라고 할 타이밍이지 않던가.
‘그렇군요.’라든가. ‘조심하세요.’라든가. ‘공작과 엮이면 안 됩니다!’라든가.
할 말은 많았다.
그는 늘 세이나에게 호의적이었고, 그녀의 일에 관심을 가졌다. 이번에는 자신도 관계자가 되어 버렸지 않나.
나는 이 일의 경위를 알고 싶다. 그럼 너는?
하지만 침묵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디온은 계속 도마뱀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껍질을 툭툭 건드리던 손도 어느새 굳어 멈췄건만. 뭐가 그리 흥미로운지 좀처럼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세이나는 말없이 기다림을 이어가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그렇군요.”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떤 감정도 읽기 어려운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세이나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그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세이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게 끝?
“세이나는요? 바래다 드릴까요?”
“어, 저는…….”
디온은 정말 바로 떠날 것 같았다. 몸도 이미 반쯤 돌리고 있고, 발끝도 어느새 문 쪽을 향해 있다.
대화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야기하기 싫다는 건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