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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32화 (32/179)

#32

세이나는 눈을 뜨자마자 당혹감을 느꼈다.

어쩐지 손에 닿는 촉감이 이상하더라니. 생전 처음 보는 이불에, 생전 처음 보는 침대,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창문이 그녀의 왼쪽에 있었다.

세이나는 좌우로 눈을 열심히 굴리다가 생각했다.

역시, 이럴 때는 이 말을 해야겠지.

“낯선 천장이다.”

“일어나셨군요!”

돌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가 깜짝 놀라 이불을 잡아당기며 몸을 일으켰다.

나타난 이는 연한 갈색 머리칼의 소녀였다. 하얀 앞치마가 있는 하녀복을 입고 있었다.

“오래 일어나지 않으셔서 걱정했어요!”

세이나도 걱정하고 있었다.

들었나? 듣진 않았겠지? 맙소사, 엄청 창피한데. 들은 걸까? 못 들었을 거야. 그렇겠지?

그리고 또 다른 이가 연이어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낯선 곳이라 놀라셨나 봅니다.”

망할, 다 들었네.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인 세이나를 향해 아론이 다가와 물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여기가 어디죠?”

“공작저입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지만, 아론은 우수한 보좌관답게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세이나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집 거실만큼 넓은 방이었다.

화려한 세공이 들어가 있는 장식장에, 우아한 곡선을 가진 테이블, 고급 소재로 만든 커튼,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문과.

낯선 천장.

세이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 천장을 노려보았다. 3m가 넘는 거인이 와도 머리가 닿지 않을 듯 높다.

“의식을 잃으셔서 일단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여기에는 의사도 있고, 씻기도 좋으니까요.”

“씻어요?”

“싫어하실 것 같아서 하녀들을 시켜 닦아 두기만 했습니다.”

세이나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향했다. 그녀는 그제야 제 옷차림이 엉망진창인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계란을 바른 듯 끈적끈적했고, 묘하게 기분 나쁜 냄새도 났다.

아론이 정중하게 말했다.

“목욕물을 준비해 두라고 하겠습니다.”

공작저는 욕실도 호화로웠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나오니 문 앞에 새 옷과 새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녀의 평소 취향과 다른 하늘색 드레스였다.

오랜만에 입은 긴 치마는 생각보다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욕실을 나오자 반긴 이는 방금 전 봤던 바로 그 하녀였다.

하녀는 세심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모두 닦은 후에는 빗으로 가지런히 빗어 내리고, 향기로운 기름까지 발라 끝을 마무리했다.

문이 열린 건 그녀가 하녀의 친절에 ‘이것이 권력자의 삶인가.’라고 감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디온?”

은색 머리칼의 남자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세이나, 몸은 어때요?”

“괜찮죠. 괜찮긴 한데…….”

세이나는 혀로 제 아랫입술을 핥은 뒤 말했다.

“입 안이 왜 이렇게 짜죠?”

잠시 후, 라샤드가 방에 도착했다.

고급스러운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세 사람이 재회했다. 세이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을 고개를 숙여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도마뱀의 사체와 거의 유사했다.

불에 굽기라도 한 듯 새까맣게 타 버렸고, 눈도 완전히 감긴 상태였다.

그녀가 그걸 꾹 찔러 보며 입을 열었다.

“사막 네벤투스예요. 투명화가 가능하고, 먹잇감에 맞춰서 몸의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책에 적혀 있었어요. 약점은…….”

“소금, 이었지.”

“정말인가 보네요?”

얼토당토않은 말이라 설마 했는데. 실제로 엘리엇 라프만도 ‘사실일지는 모르겠다.’라고 직접 써 두기도 했다.

세이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가며 두 사람을 살폈다.

혹시, 내가 위험한 상황이라 나한테 열심히 소금을 뿌려 댔던 걸까.

그래서 입이 짰던가?

“어떻게 된 거예요?”

라샤드는 차근차근히 지난밤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2층 서재에 올라가자마자 세이나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 그리고 그 직후 마물이 나타나 세이나를 꿀꺽 삼켰다는 것.

다시 꺼내려고 했으나 놓쳤고, 마물을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소금을 발견한 것도.

세이나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라샤드의 목소리가 꽤 듣기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먼저 정신 줄을 놓고 기절해 버렸다는 부분이 너무 미안했다.

라샤드는 마물을 상대해 본 경험이 적다고 했고, 디온 역시 마물과 싸워 본 적이 없다.

마물은 사람과 다르다.

일단 그 종류가 너무 다양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헌터들이 사례들을 정리해 왔으나, 오늘날에도 ‘변종’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종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마물이었다.

능력도 제각기 다르고, 처리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행동은 변칙적인 데다가 그들 나름의 성격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헌터들은 발견된 거의 모든 마물의 종류와 그 특성을 외우고 있어야 했다.

뜻밖의 상황에 항상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마물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헌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해결했어야 했는데.’

헌터로서의 책임감이 무겁게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래서 더욱 열렬한 학생처럼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라샤드는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가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금방 홱 얼굴을 돌려 버렸다.

‘내가 쓰러져 버려서 원망하고 있는 건가?’

고고한 공작님의 귀는 지금도 붉게 변해 있었다.

혹 안 좋은 트라우마라도 남은 걸까.

라샤드는 고개를 돌린 채 말을 이었다.

“……내가 마물의 시선을 끌고, 그사이 마법으로 마물을 붙잡아 두는 작전이었지.”

“그 후엔 소금을 쏟아 냈고?”

“그래. 그 직후 쓰러지기에, 처치한 줄 알고 너를 꺼내려고 입 안으로 들어갔었어.”

“하지만 공작님께서도 그대로 삼켜지셨죠.”

디온이 덧붙인 말에 세이나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공작님은 이번 건에 트라우마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점점 더 미안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하지만 물음에도 라샤드는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세이나를 지나쳐 바로 옆에 있는 디온을 향했다.

살짝 들고 있는 턱도 정확히 그를 향했다. 네가 설명해, 라는 뜻이었다.

“공작님께서 마물의 내부에 있던 코어를 떼어 내셔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답니다.”

“엄청 고생하셨겠다.”

“네. 고생하셨죠. 다 공작님 덕분입니다.”

모처럼 전해진 따뜻한 칭찬이건만.

라샤드의 미간은 더 좁아지기만 했다. 그는 범인을 추궁하는 수사관인 양 은발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 역시, 마물에게 삼켜진 이후의 상황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마물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쳐 날뛰었다는 것밖에.

하지만 디온은 그에 대해서 말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라샤드는 그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이게 마물 안에 있던 마정석이다.”

라샤드가 품 안에서 마정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칠흑같이 깜깜한 마물의 배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던 마정석은 낮에도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체적으론 마물의 비늘과 닮은 녹색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푸른빛도 섞여 있었다. 크기는 라샤드의 주먹보다 컸다.

세이나는 바로 거기에 눈이 돌아갔다. 그녀가 탄성을 내질렀다.

“고급!”

그러고도 믿기지 않아 한 번 더 소리쳤다.

“고급 마정석이에요!”

그녀는 어린 소녀처럼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피로로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에 빠르게 혈색이 돌아오고 눈이 환희로 빛났다.

그녀가 디온을 돌아보았다.

“이, 이거 팔면 얼마나 할까요?”

“글쎄요. 30만 루펜?”

“공작님, 이거 필요해요? 필요하나요? 필요한 건 아니겠죠!?”

“가져가.”

세이나는 이제 거의 기절할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라샤드를 바라보자,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주려고 했어.”

정말, 두 사람이 부자라서 너무 다행이다.

다른 헌터들이었다면 이렇게 큰 마정석 앞에선 반드시 싸웠을 것이다.

누구의 기여도가 더 큰지, 누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하나씩 따져 가면서.

그리고 마물을 만나기도 전에 기절해 버린 세이나 로힐은 무엇도 건지지 못했을 테다.

세이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마정석에 손을 가져갔다.

녀석, 가까이서 보니 때깔이 더 좋구나.

“다른 건으로는 집이…… 좀 망가졌는데…….”

마정석의 반질반질한 표면을 매만지던 세이나의 손이 덜컥, 멈췄다.

라샤드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내내 그녀를 보고 있던 디온 역시 슬쩍 시선을 돌려 버렸다.

세이나는 느리게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물었다.

“두 사람 다 다친 곳은 없어요?”

“음, 없지.”

“없습……니다.”

“그럼 됐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미소 지었다. 괜찮다는 뜻을 담은, 담백한 웃음이었다. 꾸며 낸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에게 ‘왜 집을 망쳤냐!’라고 따질 정도로 그녀는 양심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라샤드는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세이나는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감동 받았구나, 짜식.’

그러나 완전히 개운한 것은 또 아니었다.

세이나의 입가에 머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목숨처럼 아끼는 집이 망가졌다는 사실에 바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어서 돌아가 봐야겠다. 막 다짐하는데, 문득 디온이 물어 왔다.

“세이나. 정말 기억나는 게 없나요?”

“네. 쓰러진 이후부터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공작님께 매달려 있던 것도?”

또다시 세이나의 손이 멎었다.

세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디온을 바라보았다. 그 동작이 너무나도 느리고 버거워 보여, 녹슨 기계처럼 끼릭끼릭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당황한 건 라샤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이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질문에 그는 어젯밤의 마물처럼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설마, 그걸 직접 물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마어마한 질문을 던진 디온 쪽도 썩 편안해 보이진 않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턱을 괴고 세이나를 노려보았다.

세이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뭘 했다고?

“쭉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누구를?

“공작님과 세이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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