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사가 시작되었다.
칼만 공작의 방은 1층에서도 가장 큰 곳으로 낙점되었다. 한때는 할아버지의 서재로도 쓰였던 그곳.
옆집을 바라보는 큰 창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정말 잘 보이네.”
세이나는 커튼을 치우고 맞은편의 엘렌을 살폈다. 이 서재의 창문은 딱 엘렌이 자주 서 있는 카운터를 향해 있다.
전체가 보이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낮 동안 엘렌의 동향을 알기엔 충분하다.
엘렌은 커튼을 잘 치지도 않았다. 창가에 둔 화분들이 햇살을 받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왜 내 집을 탐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네.’
가장 좋은 점은 방문하는 손님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보라색 머리도 잘 보일 테고.
마지막으로 손님의 외양을 확인한 세이나는 방을 나섰다.
그녀에 뒤이어 커다란 책상이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칼만 공작의 짐은 크게 많지 않았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몸을 누일 수 있는 소파 하나.
하지만 그것만 해도 꽤 커서, 방이 좀 비좁아 보였다.
세이나는 책상을 옮기고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일꾼들의 수를 세었다. 딱 2명.
뒤이어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조금 피곤한 기색의 라샤드를 향해 세이나가 말했다.
“조건, 잊지 않았죠?”
그의 얼굴의 피로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지겹다는 눈으로 세이나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턱짓했다.
어디, 한번 잘 외웠는지 들어 봅시다.
“……첫째, 2층에 오르지 말 것. 둘째, 닫힌 방문을 열지 말 것, 셋째, 부수거나 파손한 부분에 대한 비용을 부담할 것. 넷째, 반려동물 금지. 다섯째, 가급적 뒷문을 이용할 것.”
“또?”
“셋 이상의 부하를 들이지 말 것.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집주인의 확인을 거쳐야 한다. 무기 소지 시 역시, 집주인의 확인을 거친다.”
“또?”
“하나라도 어길 시 계약은 파기된다.”
세이나는 아주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좋아요. 환영합니다, 칼만 공작 각하.”
“이제 됐나?”
“완벽해요. 머리가 좋으시네요.”
이걸 다 외우기 전까지는 집에 못 들어온다고 했던 것이 바로 어제였다.
세이나는 계약서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는 공작에게 아주 큰 만족감을 느꼈다.
‘은근히 말을 잘 듣네.’
이 계약은 자신에게 매우 유리했다. 특히 여섯 번째 부분이.
셋 이상의 부하는 들이지 말 것.
그건 세이나가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서 둔 조건이었다. 3명의 기사가 뒷문을 넘어온다면 그 순간 계약은 아웃이다.
2명까지는 괜찮다. 거기까진 그럭저럭 혼자서도 막을 만하다.
“저도 환영인가요?”
“그럼요. 어서 오세요. 아론.”
라샤드의 뒤에서 주근깨가 있는 하얀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론이 물었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십니까?”
세이나는 아론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의 디온은 평소와 아주 달랐다.
차가운 색의 눈동자에 짜증이 가득하다. 노려보고 있는 대상은 어제와 같이 칼만 공작이었다.
오후, 디온은 오늘도 어김없이 세이나의 집을 방문했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라고 묻는 세이나에게,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그자가 저녁에 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공작이 또 제 부하들을 우르르 끌고 올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기특해라. 걱정해 주네.
“아는 동생이라더군.”
“아, 그렇군요.”
라샤드의 말에 디온의 한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자알, 부탁합니다. 각하.”
디온이 공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잘 부탁하지.”
맞잡은 손에서 꽈악,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흉악한 시선을 교환하는 두 남자를 보며 세이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거, 곧 싸울 분위기인데.’
디온은 손을 거둔 후에도 사나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 지켜보던 세이나가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이상한 신경전이 이어지는 와중, 아론이 조심스레 세이나를 잡아끌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세이나에게 속삭였다.
“각하께서는 일주일에 하루 혹은 이틀 정도만 머무르실 겁니다. 나머지는 사정을 다 아는 기사분들이 찾아올 예정입니다. 예의 바른 이들로 선별해서 둘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두 남자는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잘 말리세요.”
음. 싸우는 거구나. 역시 그렇구나.
‘하긴, 디온은 그때 이후로 공작을 만나는 게 처음일 테니까.’
그의 적개심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디온의 무례는 거실에서도 이어졌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는 해도, 공작 각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디온이 소파에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라샤드가 자리 잡은 곳은 그의 맞은편에 있는 안락의자였다.
아론을 배웅하고 한발 늦게 거실로 들어온 세이나는 불안감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한가하신가 봅니다?”
라샤드의 조각 같은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디온은 더욱 비꼬듯이 말했다.
“아니면 부하가 없나? 공작‘씩’이나 되는 분께서?”
세이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얘가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다정한 미남은 어디 가고, 뒷골목의 불량배가 찾아와 버렸다. 이건 아주 싸우자고 작정한 태도였다.
디온의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에 세이나는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디온이 그녀를 홱 돌아봤다. 뭐 하는 겁니까? 그리 묻는 눈이었다. 세이나도 눈으로 답했다. 너야말로 뭐 해!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디온이 내버려 두라는 듯 세이나의 손을 밀어냈고, 세이나는 더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
디온이 입을 연 찰나.
라샤드가 낮게 말했다.
“맞아.”
두 사람은 아옹다옹하던 상태로 일시에 굳어 버렸다. 라샤드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내리깔았다.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지.”
거실이 고요해졌다. 세이나는 라샤드를 가만히 지켜보다 디온의 귓가에 속삭였다.
“……따돌림당하나 봐.”
“아니야.”
라샤드는 재빨리 반박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그렇게 단정 지은 얼굴이었다. 방금, 대답하던 그의 표정이…… 너무 쓸쓸해 보였던 탓이다.
“그…… 힘내세요.”
“……그럴, 수도…… 있죠.”
결국 디온까지 위로의 말을 건네자 라샤드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명령에 따라올 부하들은 충분히 있어. 나머지는 신뢰의 문제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야. 조심해서 다뤄야 하고, 새어 나가서도 안 되지. 그래서 나는 정말 믿을 수 있는 몇몇 이들에게만 말해 두었어.”
도발을 당한 사람치곤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샤드는 머리가 아픈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모두 나를 위해 고생해 주는 고마운 이들이다. 그런 이들을 매일 밤을 지새우게 둘 순 없지. 남에게 시키는 일은, 자신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해.”
“그럴듯하게 말했지만 결국 시킬 부하가 별로 없다는 뜻 아닙니까?”
“디온!”
세이나가 잠시 놓았던 디온의 손목을 다시 붙들었다. 조금 전 옥신각신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강한 힘에, 디온이 당황하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이나?”
“이만 돌아가요!”
“네?”
“착한 아이는 이제 잘 시간이에요.”
괜히 시끄러워질까 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오느라 공작의 이사는 저녁 시간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제 창밖은 완전한 밤이었다.
세이나는 더욱 강한 힘으로 디온을 잡아끌었다.
그는 가지 않겠다는 듯 조금 버텼지만, 세이나가 한 번 매섭게 노려보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정말 가요?”
“네, 가요!”
“정말?”
“네에!”
이러다 싸움 난다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비록 라샤드가 아직까진 차분하게 대응해 주고 있지만, 그도 결국 자존심 강한 귀족이었다.
건장한 남자 둘이 싸우고 뒹굴다 보면 가구 몇 개 부서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끌려오는 동안 디온은 바퀴가 고장 난 수레처럼 계속 덜컹거렸다.
세이나는 끈기 있게 그를 현관까지 밀어냈다. 마지막으로 가라는 듯 턱짓을 하자 그가 몹시 서운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마주 봤다.
하지만 세이나는 완강했다. ‘가!’ 디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몸을 돌려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는 것까지 보고, 세이나는 거실로 향했다.
라샤드는 계속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급격한 어색함이 밀려왔다.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엄청 화난 얼굴은 아니란 사실이다.
환불은 안 해 줘도 될 것 같다. 세이나가 속으로 안도하던 그때였다.
“저, 세이나?”
반사적으로 돌아본 그곳에는 아직 디온이 남아 있었다.
현관문의 바로 앞에서, 반쯤 몸을 틀어 그녀를 향해 있다. 손에는 손잡이가 쥐어져 있다.
철컥. 그가 손을 돌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 열리는데요?”
“……네?”
세이나는 대번에 미간을 좁히고 그의 손 쪽을 바라보았다.
철컥, 철컥, 그가 두 번 더 문을 흔들었지만 현관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세이나는 당혹감을 느끼며 디온을 바라보았다. 철컥, 그가 한 번 더 문의 손잡이를 흔들어 보았다.
“안 열려요.”
그렇게 말하는 디온은 왜인지 아주 흡족해 보이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