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4.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은 있다
세이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이게 불편해 보이는 손님들에게 서빙하는 직원의 마음이구나. 잠깐만, 난 집주인인데?’
그녀를 중심으로 양쪽에, 두 남자가 앉아 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들이 너무 살벌하여 뒷배경에 천둥과 번개가 치는 것 같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도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들을 번갈아 보던 세이나는 오른쪽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그들의 사이에 놓았다.
그녀가 앉자마자 라샤드가 말했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
그리고 디온이 말했다.
“거절합니다.”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남자가 서로를 보는 눈빛들이 한층 더 뜨거워졌다.
“왜 저자가 이 집에 있지?”
“왜 저 사람을 들여보낸 겁니까?”
“제 맘인데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식당이 정적에 휩싸였다. 세이나는 작은 희열을 느꼈다.
좋아, 마법의 단어를 하나 손에 넣었다.
‘이 집은 내 거라고 이 자식들아. 주도권은 내가 갖는다.’
경고의 눈길도 한 번 보내 주자 두 사람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드디어 두 사람의 시선이 어긋나고, 세이나가 한 번 헛기침했다.
“크흠, 공작님께서는 무슨 일이죠?”
“제안하고자 왔다.”
“그러니까 무슨 제안이요?”
“너도 알다시피, 저번의 사고로 지하실 천장이 무너졌어. 그래서 보수 공사를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고치기가 어렵더군. 하나를 손대면 다른 쪽도 손봐야 하는 상태다.”
“거기가 좀 오래되긴 했죠.”
“다른 곳도 낡아서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더군. 집의 겉만 남기고 내부를 완전히 고치려고 해.”
“오, 네. 대공사겠네요.”
“꽤 시간이 걸릴 거야. 1달……. 아니, 2달은 족히 걸리겠군.”
그의 말을 따라 생각하던 세이나는 곧 하나의 의문에 봉착했다.
잠깐, 그럼 공작은 엘렌을 어떻게 구해 주지?
“그동안 이 집을 빌리고 싶은데.”
“안 됩니다.”
할 말을 가로챈 쪽은 이번에도 디온이었다. 그가 날 선 눈으로 라샤드를 째려보다, 세이나를 바라보았다.
“안 됩니다. 세이나.”
“네. 당연히 안 되죠.”
“전부를 뜻하는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방 하나 정도다. 돈도 제대로 지급할 거고, 계약서도 작성하지.”
“안 됩니다.”
“계약서요?”
디온과 세이나가 동시에 말하자, 라샤드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말린 종이 두 장을 펼쳤다.
하얀 종이 위, 깨알 같은 글자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가장 위의 단어는 짧았다. 계약서.
하지만 전생의 표현대로라면 앞에 이 단어가 붙어야 할 것이다.
월세.
“계약은 월 단위야. 월에 한 번, 내가 돈을 내지. 넓은 방이었으면 한다만.”
혹은 하숙이라고 해야 할까.
세이나는 천천히 계약 내용을 읽어 갔다. 그러다 덜컥, 그녀의 시선이 걸린 부분이 있었다.
월 지불 비용이 적혀 있는 공간이었다.
“원한다면 더 줄 수도 있…….”
“50만!”
크게 소리친 후에도 믿기지 않아 다시 읽어 보았다.
50만.
그곳에 적혀 있는 금액은 확실히, 50만 루펜이 맞았다. 세이나는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라샤드를 보았다.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녀의 연 수입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그 금액을 1달 안에 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 하나를 내어 주는 조건으로.
몇 번이나 계약서를 읽고, 또 읽었지만 딱히 자신에게 해가 되는 내용도 없었다. 50만.
거기에 적혀 있는 ‘0’이 줄어드는 일도 없었다.
세이나는 결정을 내렸다.
“서명은 오늘?”
환영합니다. 고객님.
“세이나!”
디온의 큰 손이 쿵, 계약서 위에 떨어졌다.
“50만 정도는 저도 줄 수 있습니다.”
“네? 갑자기?”
“더 드릴 수도 있습니다.”
“디온. 이건 정말 나쁘지 않은 거래예요.”
“아니요. 나쁩니다. 하면 안 돼요. 반대입니다.”
“이건 디온을 위해서도 필요…….”
“그런데.”
막 말싸움이 시작되려는 가운데, 불쑥 라샤드의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라샤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이지?”
순식간에 방 안이 고요해졌다. 세이나는 입을 조금 벌린 채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라샤드가 그녀를 주시했고, 디온의 눈동자도 느리게 그녀를 향해 굴러갔다.
잠시 후, 그녀가 답했다.
“아는 동생?”
그 순간, 라샤드는 디온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 *
칼만 공작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세이나는 차근차근히 계약서를 검토했다.
추가로 필요한 조항이 있다면 붙여도 된다고 했기에, 조건도 적어 내려갔다.
‘음,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세이나는 어느새 빽빽해진 계약서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안전장치로는 괜찮은 것 같다.
남은 건 이제 한 사람.
“어때요?”
그녀는 자신이 휘갈긴 계약서를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디온은 공작과 마주했던 자리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불만스럽다는 표정. 말투는 몹시 퉁명스러웠다.
“제 의견을 왜 묻습니까? 그냥 아는 동생이라면서.”
어차피 내 말 따윈 안 들을 거잖아. 그 말이 이어 들리는 듯하다.
세이나는 따지고 싶었다.
야, 그럼 거기서 뭐라고 하냐? 친구라고 하기엔 우리가 그렇게 가깝지 않은 게 사실이긴 하잖아?
‘고용인과 고용주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주인님은 그의 아버지였다. 그렇다고 ‘제 도련님이십니다.’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정말 할 겁니까?”
“네. 돈이 필요해서요.”
“그럼 저번에는 왜……!”
디온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세이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저번? 저번이 뭐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세이나의 반대편으로 돌렸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까지, 세이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혹시 공작과의 첫 만남을 말하는 걸까.’
확실히, 그때도 어마어마한 금액을 제안받았었다. 하지만 지금과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세이나는 이제 라샤드 칼만이라는 사람이 무도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숙은 매매와도 다르다. ‘계약서’라는 형태도 마음에 들었다.
‘공작’이란 지위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세이나는 당장 자신이 공작이라는 가정하에, 어떤 낡은 집을 빼앗을 비책을 5가지나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라샤드도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약’을 내세운 건 나름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금액도 딱 좋았다. 계약서를 내미는 눈빛도.
‘다른 속내가 있어 보이진 않았지.’
그리고 이 조건이면…….
“여기 봐요, 이 조건들이면 괜찮지 않을까요?”
세이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결국, 디온의 시선이 식탁 위의 계약서로 향했다. 그가 읽어 내려가는 동안, 세이나는 히죽이며 손에서 펜을 놀렸다.
아, 몰래 0을 하나 더 추가해 버릴까.
“돈은 저도 드릴 수 있습니다. 세이나.”
하지만 그는 바꾼 계약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세이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보다 더 적은 금액이라도, 저는 공작님이 필요해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엘렌의 집에 도둑이 들었던 것, 기억하죠?”
엘렌. 세이나는 아주 어렵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예상대로 디온의 얼굴이 굳었다.
이전도 좋지 않은 표정이긴 했지만 나쁨에서 더 나쁨으로 간 느낌이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라색 머리 남자가 이곳에 올 것을 예고했고요.”
“……네, 그렇죠.”
“그래서 공작님이 필요한 거예요. 누군가는 그걸 막아야 하잖아요?”
그러자 그의 눈이 커졌다. 막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 완전히 타인이고.”
그리고 그다음엔 그를 가리켰다.
“디온은 공작님께 맡기겠다면서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이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 살짝 미소 지으며 등을 의자에 기댔다.
“이대로 공작님이 저 때문에 이 거리를 비우게 되고, 그사이에 엘렌이 다치면 엄청 죄책감 느낄 거 같아서요.”
엘렌의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세이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들것에 실려 나온 누군가가 엘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크게 안도하기도 했다.
엘렌은 여주인공이었지만 그녀의 이웃이기도 했다.
이웃이 납치당할 수도 있다는데, 모르는 척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세이나는 그녀의 안타까운 과거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정심이 생겼다.
처음엔 옆집의 원작 따위, 무시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옆집에서 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그녀도 원치 않았다.
“그냥 모르는 척해도 되지만, 제가 그렇게 모진 성정은 또 아니라. 조금 불편해도 어쩔 수 없죠.”
저번 일만 하더라도 칼만 공작의 개입으로 미수에서 그쳤다.
세이나는 앞으로도 이런 일이 더 벌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칼만 공작은 엘렌을 지켜 줄 것이다. 그것이, 남주의 역할이다.
이제 자신은 무슨 일이 생기면 “가랏! 공작! 몸통박치기!”라고 외치기만 하면 된다. 그럼 대단한 공작 각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잘 해결해 주실 테다.
그동안 발 뻗고 잠이나 자야지.
“이렇게 많은 돈을 받게 되었으니 저도 이득이기도 하고.”
말을 마친 세이나는 조심스레 디온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내리깔고 있는 눈에 수심이 가득했다. 붉은 입술이 뭐라고 할 것처럼, 몇 번 벌어졌지만 새어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살짝 흔들어 보았다.
“디온? 괜찮아요?”
“……제가.”
그는 그러고도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에 세이나가 다시 한번 그를 흔들려던 그때, 그가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그런 말을 해서, 그 남자를 받아들인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