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어떻게?
가까이서 본 디온은 뭔가를 원하는 듯한 눈이었다.
햇살을 받은 푸른색 눈동자가 빛난다. 세이나는 한쪽 손이 그에게 완전히 붙잡힌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검지가 손목을 매만졌다.
서늘한 체온. 저번에 손목을 잡을 때도 느꼈지만, 그는 유독 손이 차가운 사람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랬다.
겨울을 사람으로 만든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다. 머리칼은 하얀 설산을, 눈동자는 시린 겨울 하늘을 닮았다.
세이나는 어렵게 그의 속내를 추측해 보았다.
위로, 위로라.
“……어제 같은 박장대소는 또 힘들어요.”
그러나 세이나의 말과 달리 디온은 쉽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그런 걸 원하는 것처럼 보였나요?”
“아, 아닌가요?”
어제의 디온은 지금껏 봤던 모습 중 가장 즐거워 보였다.
‘위로’는 상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바로 어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말로 하는 위로는 방금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디온은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같이 있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아마……. 좀 더 걸리지 않을까요?”
‘아, 그러니까 우울할 때마다 놀아 달라는 거군?’
드디어 그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행동이다.
“오늘도 같이 있으면 좋겠죠.”
“뭘 하고 싶어요?”
“일단 식사?”
“오늘……. 오늘은 힘들지도…….”
오늘은 반드시 일을 구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나온 그녀였다.
빈둥거리는 생활은 좋지만 재정은 이미 바닥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확실하게, 굶어 죽는다.
세이나는 슬며시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었다. 디온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중에 갑시다. 나중에. 응?”
이게 아이와의 약속을 미루는 아버지의 심정이로군.
급격히 시무룩해진 디온을 보니 살짝 양심의 가책이 일었다. 동시에 의문스럽기도 했다. 너, 친구 또 없니?
“일단은 여기서 빨리 벗어나죠. 누가 오면 곤란해요.”
10분 후, 탐지 부서의 작업실은 완전히 깨끗해졌다.
더 이상 종이들이 바닥을 떠돌지 않았고, 마구 튀어나와 있던 서류들도 책장에 잘 들어가 있다.
그게 더 위화감이 느껴졌다.
‘미안합니다. 앤디 로스웰 씨. 난 노력했어.’
세이나는 몇 분 전 그랬듯이 문에 귀를 가져갔다. 또각또각. 멀리서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디온이 문을 연 건 그때였다.
세이나는 깜짝 놀라 그를 확 뒤로 잡아당겼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닫히며 디온의 몸이 뒤로 확 젖혀졌다. 크게 확장된 푸른 눈이 그녀를 향했다.
세이나도 눈을 부릅뜨고 그를 쏘아봤다.
“미쳤어요?! 밖에 사람 있잖아요!”
“아, 그런가요?”
“아, 그런가요? ……가 아니라! 마주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우리는 지금 무단 침입 중……!”
“세이나. 목소리가 밖에 들리겠어요.”
그녀는 급히 제 입을 확 틀어막았다. 다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멀리서 들려오던 그것은 이제 문의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 갔다.
또각. 또각. 또각. 세이나는 그 소리가 모두 사라진 후에야 손을 뗄 수 있었다.
“마주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하면 되죠.”
“볼일이라니! 세상에……!”
누가 도련님 아니랄까 봐. 위기의식이 이렇게나 없을 줄이야.
마주친 사람이 탐지 부서 마법사랑 잘 아는 사이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하게 깜빡이는 눈이 얄밉게만 느껴졌다.
조금만 친했으면 확 꿀밤을 먹였을 테다.
하지만 그는 회장님 아드님이었다. 세이나는 그를 붙잡고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디온은 눈에 띄니까 최대한 몸을 숨기고 다녀야 해요. 이 머리카락도 그렇고, 얼굴도 말이죠! 이런 잘생긴 얼굴은 어딜 가든 누구나 기억해요!”
“……제가요?”
“어제 도서관 사서가 당신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했다는데 500루펜을 걸 수 있어요. 덧붙여 루셀 도르라는 이름도 외우고 있을걸요.”
이만큼 설명했는데도, 아직 그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는 세이나가 자신을 갑자기 잡아끌었을 때의 표정 그대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디온의 팔을 거칠게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자신은 디온이 서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위치가 바뀌었다. 문고리와 세이나, 그리고 디온.
둘 다 등을 문 뒤에 붙인 모습이 딱 숨어든 도둑들을 연상케 했다. 어깨는 맞닿아 있었다.
“더 조심합시다. 알겠죠? 내 뒤에 따라붙어야 해요.”
세이나는 다시 문에 귀를 가져갔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어쩐지 불안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세이나.”
그렇게 한참 집중하는데, 옆에서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이나는 짜증과 함께 그를 홱 돌아보았다.
디온이 웃으며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역시 오늘 같이 있지 않을래요?”
그게 지금 할 소리니?
* * *
며칠이 지나도 일자리는 구해지지 않았다.
세이나는 그동안 정말 다양한 직종들을 시도했다.
카페 종업원, 여관 카운터, 상단의 일꾼, 경호원까지도.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어느 곳 하나 자리가 나지 않았다.
한숨만 푹푹 나오는 상황이었다.
결국 세이나는 궁지에 몰린 심경으로 뒷 세계 쪽 소개서에 이름을 올렸다.
며칠 후 아주 지저분한 도박장의 입구 가드가 되어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세이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막 정오를 지나가고 있었다.
‘거의 다 됐군.’이라고 생각한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활짝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지난 며칠. 그녀는 어떤 일자리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새로이 얻은 것은 있었다. 디온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뭘 먹을까요?”
그리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얘 도대체…… 왜 자꾸 오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탐지 부서에서 나온 직후, 디온은 곧 식사하자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에게 ‘곧’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세이나는 별 의심 없이 그를 따라나섰고 저번과 같이 비싼 음식을 대접받았다.
세이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다.
헌터로 생활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디온만큼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것이나.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아서 유명하지 않을 뿐이지 앞으로는 더더욱 인기가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이나.
어제 도서관에서도 사서가 반한 눈치이지 않았냐.
등등.
스스로가 생각해도 주접이 아닐까 싶은 수다가 쏟아져 나왔으나 쉽게 멈추기가 어려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디온의 표정이 너무 흐뭇했던 탓이다.
그래, 은인을 위해서 나 하나 희생하는 것 정도야. 더군다나 오늘 밥도 얻어먹지 않았던가.
“고마워요. 세이나.”
“헥…… 헥…….”
“여기, 물이요. 쉬었다가 말하세요.”
“……예? 더 말하라고요? 여기서 더?”
“더 남았으면.”
“이, 이젠 더 없는데…….”
그러자 디온은 폭소를 터트렸다.
세이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귀가했다. 이 정도면 밥값은 충분히 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훌륭한 위로였다고 생각하며, 홀가분한 기분으로 잠들 수도 있었다.
두 번째는 바로 다음 날이었다.
“또 들렀습니다.”
상쾌하다는 말이 썩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저게 실연당한 남자의 얼굴이 맞나 싶어 가만히 보는데, 디온이 말했다.
“제가 사겠습니다.”
그는 다음 날도 찾아왔다.
“비가 많이 오네요. 오늘 점심은 서부 음식이 좋겠습니다.”
그다음 날도.
“광장 쪽에 새로 디저트 가게가 생겼대요.”
그리고 오늘도.
‘왜 자꾸 오지!?’
아무리 현실적인 그녀라지만, 이렇게 반복적으로 얻어먹으니 양심이 조금 아팠다. 민망하기도 했다.
혹시 회장님 도련님은 불우이웃 돕기가 취미이신가. 내가 가난해서 불쌍해 보였나.
혹은 정말 코미디언으로 생각하나?
‘그래, 나만 보면 유난히 웃긴 하지.’
지금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흘리고 있다. 매우 즐거워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디온이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식당들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
“친구들이 많아서요. 저도 들었어요.”
거짓말.
‘친구가 많으면 이렇게 자주 올 리가 없지.’
게다가 함께 보내는 시간도 꽤 길었다. 세이나는 그도 자신과 같이 백수라는 데 500루펜을 걸 수 있었다.
돈 많은 백수라는 것에서 자신과 큰 차이점이 있겠지만.
“바쁜가요?”
세이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다. 일은 오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남자를 따라가면, 오늘도 식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이득이긴 하다.
‘조금 편해지기도 했고.’
그는 나쁘지 않은 대화 상대였다. 세이나는 그와 여러 번의 식사를 했으나, 한 번도 어색함이나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질 때쯤 그는 항상 새롭고 흥미로운 소재를 꺼냈다.
이런 것도 귀족들은 배우는 걸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계속 얻어먹는 건 좀 그렇잖아. 날 보고 뻔뻔스럽다고 속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실리와 양심 사이에서 열심히 저울질하던 세이나는 늦지 않게 결정을 내렸다.
“일단…… 들어와 계세요. 청소 좀 마무리하고.”
조금 늦게 일어난 탓에 오전 청소가 아직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다.
세이나는 어쩐지 두통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그녀의 뒤로, 디온이 현관문을 넘었다. 내딛는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현관문까지 꼼꼼히 닫은 후 거실로 들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는 푸른색 눈에 만족감이 스친다.
그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세이나였다.
그녀는 벽난로 위에 있는 파이프를 닦고 있었다. 그다음은 작은 화장품 케이스, 다음은 빈 꽃병이었다.
매만지는 손길이 꽤 조심스럽다. 그리고 그녀가 빈 꽃병을 제자리에 두었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이나와 디온은 한번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현관문 쪽으로 다가간 이는 디온이었다. 그는 세이나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짓하고 성큼성큼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외투.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머리칼이 꽤 평범하다. 행색만 두고 보면 지나가던 헌터 혹은 검사에 딱 맞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히 범상치 않았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라샤드 칼만이 물었다.
“세이나, 잠시 시간 괜찮나?”
그리고 디온이 답했다.
“아니요.”
쾅! 문이 닫혔다.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놀라 소리쳤다.
“디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