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24화 (24/179)
  • #24

    “당연히, 이제 좋아하지 않아서 아닐까요?”

    안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뭘 그런 당연한 걸 물어봐?’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 생각 없다, 라니. 그건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뜻이라고요.”

    “하지만 꽤 오래 좋아했다고 들었는데.”

    “아, 그럼 그거네! 힘들게 마음 접고 있으니까 굳이 상기시키지 마라! 분명 그거예요! 확실해!”

    안나는 손뼉까지 치면서 자신이 떠올린 추리에 열을 올렸다.

    오전. 그녀답지 않게 일찍 일어난 세이나는 오늘도 모험가 협회를 방문하고 있었다. 주목적은 다른 것이었으나 어느새 잊어버리고 말았다.

    세이나와 안나는 본분도 잊어버린 채 수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드물게도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는 날이기도 했다.

    주제는 어제 도서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 슬픈 표정이어야 하잖아? 그런데 완전히 맹했다고. 과장 좀 더해서 바보 같았어.”

    “표정 연기의 달인일 수도 있죠.”

    “그걸 굳이 연기까지 하면서 말해야 해?”

    “애써 태연한 척하는 거죠. 폼 좀 잡을 줄 아는 놈이네.”

    “아무리 그래도…….”

    첫사랑이 납치당할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는다고?

    차마 거기까지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옆집과 디온에 얽힌 복잡한 사정을 전부 털어놔야 할 것 같았다.

    세이나는 지금도 안나에게 최대한 간략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렇게.

    “B는 A를 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 A에 대한 소식을 들어도 ‘아무 생각 없다.’라고 답변한 거예요. 애타게 사랑했지만 결국 차였으니, 최대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죠.”

    “그래?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나, 그런 설정이?”

    “설정이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이다.

    첫인상은 분명 조용한 도련님이었는데. 뒷골목에서는 양아치였고.

    어제는 가명을 써서 사람을 놀라게 하질 않나.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사람을 또 긴장하게 만들고. 그러더니 이제는 첫사랑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웃는 게 예쁘긴 했지.’

    “그런데, 누구예요 그 사람?”

    “이, 있어. 그런 사람.”

    “흐으으음?”

    세이나는 잊으라는 듯 손을 내저어 보였다.

    사람은 잘 안 변한다지만, 스스로가 마음을 먹으면 또 쉽게 바뀌는 게 사람이었다.

    안나의 말대로 정말 엘렌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했다면 그에게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어제 보라색 머리 남자 건은 공작에게 말해야겠네.’

    라샤드 칼만. 그 인간을 떠올리니 또 짜증이 확 올랐다. 세이나는 투지를 불태우며 안나 쪽으로 몸을 숙였다.

    “탐지 부서 놈들, 있어?”

    “탐지 부서요?”

    “응.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오늘은 잠시 미뤄 뒀던 두 번째 계획을 수행하는 날이었다.

    탐지 부서 마법사에게 마물에 대해 묻기.

    세이나는 그들에게서는 이번 일의 힌트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대단한 정보를 가지고 가서 ‘흥, 숨겨 봤자 소용없어! 난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라며 공작의 기를 꺾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아무도 없어요.”

    “윽. 진짜 안 풀리네.”

    “전부 외출했다고 되어 있어요. 어머, 모두 장기 임무 중이네?”

    “보통 한두 명은 꼭 남기지 않아?”

    “그러게 말이에요. 흐음? 이거 이상하네.”

    안나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마법사 10명의 이름 옆에는 모두 ‘출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말 드문 일이었다.

    ‘설마 공작이 비밀로 하려고 외부인과 만나지 못하게 한 건가?’

    “혹시 일찍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니 가 볼래요? 탐지 부서는 3층에 있어요.”

    잠시 후, 세이나는 협회의 3층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구긴 채 속으로는 아직도 공작을 씹고 있었다.

    넓은 복도에는 통행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출근하지 않은 부서들도 꽤 많은 모양이었다.

    탐지 부서의 방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앞에 서는 건, 조금 각오가 필요했다.

    ‘따고 들어가 버릴까?’

    운이 좋아 탐지 부서 마법사를 만난다더라도, 순순히 털어놓을 것 같지 않았다. 전부 장기 출장으로 표시해 두었다는 건, 곧 ‘대화하고 싶지 않다.’라는 뜻과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몰래 들어가 버려서 자료만 슬쩍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마침 문 따기에 적절한 머리핀도 있다.

    ‘아니야, 그건 범죄라고.’

    세이나는 짧게 노크를 한 후에 문에 귀를 가져갔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나쁜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찰칵.

    ‘응?’

    문이 열렸다.

    세이나는 눈을 크게 뜨고 열린 틈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핀은 아직 그녀의 반대쪽 손안에 있었다. 열쇠 구멍에 넣지도 않았고, 틈 사이에 쑤셔 넣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문을 열기만 했다.

    ‘혹시 내게 내려진 사기 능력이 이거야? 문 따기?’

    젠장, 뭔가 쓸모 있어 보이지만 크게 쓸모는 없어 보이는 능력이었다. 빙의물 주인공 능력이 문 따기라니 너무 소소하지 않나?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문은 착실하게 열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세이나는 그를 확인하고 두 번째 충격을 느꼈다.

    푹신한 의자를 차지한 사내는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린 채 서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신발은 뻔뻔스럽게도, 벗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바람에 은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하얀 얼굴, 그리고 파란 눈동자가 세이나를 보았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디온?”

    “세이나?”

    “일찍 왔네요.”

    “일찍이라니…… 디온이 왜 여기에 있어요?!”

    “세이나가 올 것 같아서요. 어제 여기에 볼일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분명 그러긴 했지만.

    그게 ‘내일 여기서 만나자.’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세이나는 쉽게 당혹스러움을 거두지 못한 채 주변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곳은 당연히 열려 있는 문이었다.

    “문이 열려…… 있던 것 맞죠? 그렇죠?”

    “네. 제가 열고 들어왔습니다.”

    “디온, 혹시 탐지 부서 마법사세요?”

    그러자 그가 미소 지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세이나는 가만히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일어선 그가 천천히 세이나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찬연한 가을 햇살이 후광처럼 그의 뒤에서 빛났다.

    어딘가의 종교화에서 본 것 같은 광경 속, 신비로운 은발의 남자가 품에서 열쇠를 꺼내 보였다.

    세이나는 열쇠 옆에 달려 있는 작은 종이의 이름을 읽었다. 앤디 로스웰.

    안나의 목록에 있는 탐지 부서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훔쳤습니다.”

    디온이 세이나의 손에 열쇠를 쥐여 주었다.

    “선물로 드릴게요.”

    오늘 디온의 콘셉트는 미친놈인 것 같다.

    * * *

    미안합니다. 앤디 로스웰.

    세이나는 일단 사과해 보았다. 들릴 리는 없겠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해 보았다.

    미안해요, 앤디. 상사한테 조금 덜 까이길 바랄게.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디온은 여기저기 방을 뒤지고 있었다.

    책상들 위에 올라와 있는 서류들은 이미 모두 봤는지, 이제는 서랍장 안 혹은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종이들을 찾는 데 열중이다.

    딱히 조심스러운 손길은 아니었다. 종이들이 팔랑팔랑 바닥에 떨어졌다.

    누구든 쉽게 이곳에 침입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

    앤디 로스웰 씨. 파이팅.

    세이나는 디온을 따라서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며칠 전의 마물에 대한 서류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 경우 둘 중 하나였다.

    정말 모르거나, 혹은 숨겨 뒀거나.

    “디온, 혹시 여기에 왔을 때 탐지 부서 마법사는 없었나요?”

    “네,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기척도 없었고. 주변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더군요.”

    즉, 이건 무단 침입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없으니 보기 편하고 좋네요.”

    하지만 디온에게 양심의 가책은 없어 보였다. 세이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너 양아치니?’

    “빨리 보고 도망가죠.”

    아니다. 도둑이구나.

    그리고 자신은 공범이었다.

    세이나는 안주머니에 있는 열쇠가 유난히도 무겁다고 생각하며 흐트러져 있는 서류들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다시 살펴보았지만, 어디서도 수도에 나타난 마물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써 봐야겠네요. 직접 물어봤자 절대로 안 알려 줄 테고.”

    냉담한 얼굴을 들이밀며 “안 돼.”라고 말할 게 뻔하다. 세이나는 답답함에 혀를 찼다.

    “다른 건은 어떻게 할 거예요?”

    “다른 건이요?”

    “그…… 엘렌이요.”

    내내 궁금했던 질문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녀는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뒤를 돌았다.

    디온은 그녀에게서 멀지 않은 책장 앞에 있었다. 서류를 막 꺼내던 상태 그대로,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등을 돌린 상태였기에,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세이나의 눈에 그의 뒷모습은 엘렌의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미안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던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와르르. 애써 정리한 종이 뭉치들이 와르르 바닥 위로 떨어졌다. 세이나는 그걸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칼만 공작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패배다.

    저건 완전한 패배 선언이다.

    ‘맙소사. 진짜네.’

    실연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더니, 결국 몇 년을 이어 오던 짝사랑이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세이나는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결국 조연은 조연인 걸까. 남주인공에게 밀려나는 운명인 걸까.

    ‘불쌍한 자식.’

    그가 다시 서류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침없었던 조금 전과 달리 그 손길이 현저히 느려졌다.

    세이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를 살폈다. 살짝 보이는 옆얼굴이 먹구름이 낀 듯 우울해 보였다.

    “디온.”

    디온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세이나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토닥토닥.

    “디온도, 충분히 좋은 남자예요.”

    진심이 담긴 위로여서일까.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서일까.

    디온은 아주 놀란 기색이었다.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고, 세이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암시를 거는 것처럼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진짜라니까.

    그러자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진심입니까?”

    “그럼요. 이 정도면 일등 신랑감이지. 너무 좌절 말아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고말고. 이렇게 잘생겼고, 돈도 많고, 잘났는데 어떤 여자가 마다할까? 그…… 사람 좀 잘 패는 것도, 따지고 보면 괜찮은 특징이다. 맞는 것보단 낫지 않나.

    ‘도벽은 어쩌지?’

    그때,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일었다.

    디온이 자신의 어깨를 잡은 세이나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럼, 위로해 주세요. 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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